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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불교문화의 한 부분 '禪茶文化' 규명하는 데 중요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한 부분 '禪茶文化' 규명하는 데 중요
  •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7.06.22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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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56. 고려차맷돌(高麗石製茶硏)

맷돌의 기원은 先史時代 갈돌과 갈돌판으로 볼 수 있다(사진1). 갈돌은 石棒이라고도하며 갈돌판위에 도토리와 같은 야생에서 난 작은 열매나 곡물 등을 갈아 음식으로 만들 때 사용하던 도구다.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 주로 출토되며 당시 음식문화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물이다.

현대에도 사용되고 있는 형태의 맷돌로서 가장 오래된 맷돌은 평양 낙랑토성에서 출토된 화강암 맷돌로 1세기~3세기경에 제작된 것이다. 이 맷돌은 土城안의 주거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곡물을 갈아내던 생활용구로 추정된다(사진2).

맷돌은 시대에 따라서 크기와 모양이 여러 종류로 변모해, 사찰에서 사용하던 커다란 크기부터 지름 20cm정도의 작은 것까지 용도에 맞게 제작 사용됐다. 명칭도 다양해 石磨, 石兒, 磨, 東磨, 매, 매돌 등으로 불리었다.

맷돌은 윗부분의 암돌과 아랫부분의 수돌로 구성된다. 암돌은 상부에 곡물을 넣는 구멍과 측면에 맷돌을 돌리는 어처구니를 끼우는 구멍이 있고(지방마다 다소 차이가 있음) 중심부 바닥에는 암쇠를 끼운다. 수돌은 볼록한 중심부에 수쇠를 고정해 암돌의 암쇠를 끼워서 곡물을 갈 때 암돌이 벗어나지 않게 한다. 암돌의 바닥이나 수돌의 상판은 격자 홈을 내거나 쪼아서 곡물이 잘 갈리게 한다. 다만 현무암으로 제작된 맷돌은 거친 표면의 성질로 별도의 홈을 낼 필요가 없다.

고려시대 차잎을 가는 맷돌은 우리나라 飮茶文化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의 수량이 적어 매우 귀하게 여겨지고 있다. 1994년 강화도 선원사지에서 출토된 차맷돌은 고려시대 사찰에서의 禪茶文化를 규명하는데 도움을 주었고(사진3), 청주 사뇌사지출토 차맷돌(사진4), 전남 월남사지출토 차맷돌(사진5), 보경사 차맷돌(사진6), 한독의약박물관 소장 차맷돌(사진7~8)이 있으나 알려진 고려시대 차맷돌은 모두 6점뿐이다. 출토된 차맷돌은 모두 절터에서 출토돼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필수요건으로 禪茶文化가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의 광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은 공덕제를 올릴 때 사용할 말차를 차맷돌로 직접 갈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 차맷돌의 존재를 문헌으로 남긴 이는 무신정권시대 대표적인 문인으로 이규보(1168~1241)다. 그는 지인에게 차맷돌 선물을 받고 느낌을 詩로 남겼다.
 
“돌을 쪼아 만든 수레바퀴 같은 맷돌을 돌리니 한쪽 팔이 힘들지만 / 그대도 차를 좋아할진대 어찌 나에게 보냈는가 / 차 좋아하는 내 성품을 알고 내게 보냈으리라 / 맷돌을 돌리면 향기롭고 푸른 가루 날리니 / 고마움이 더욱 깊기만 하여라”
 
이규보는 茶와 禪은 같은 길이라 했으며 차를 너무 좋아해 바위 앞의 샘물을 차를 끓여 마셔서 마르게 하고 싶다고 했다. 한편으론, 飮茶文化가 사치스러워지면서 백성에 대한 茶稅가 과중해 폐해가 심각해지니 과도한 茶稅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지난 4월부터 일본 도쿄박물관에서 ‘茶の湯’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필자는 지난주에 전시현장을 다녀왔다(사진9). 일본 내에서 가장 유명한 茶道具는 총 망라해 전시하고 있으며 규모도 대단했고 평일임에도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로 관람자가 많았다. 자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일본국민들의 높은 문화의식의 한 단면을 보게 돼 부럽기도 했다. 전시된 茶道具들은 국보찻잔, 차단지, 향로, 차화로, 차항아리, 차숟가락, 차선, 차물통, 화병, 차물을 끓이는 쇠솥, 차단지, 차와 관련된 書畵 등이다. 그러나 당시 유행하던 말차를 만드는 중요한 차맷돌은 전시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차맷돌은 17세기에 제작된 것은 확인이 되지만 그 이전의 것은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사진10).
 

(사진11)은 필자가 새로 발견한 개인소장품인 고려시대 차맷돌이다. (사진7)의 고려 차맷돌과 같은 형식이며 암돌과 수돌의 형식도 유사하다. 암돌은 상부에 차잎을 넣는 아가리가 있고 저부의 중앙에는 암쇠를 끼웠던 홈이 있으며 차잎이 잘 갈리도록 잔잔한 요철을 쪼았다. 옆면에는 어처구니를 끼웠던 홈이 있으며 4획으로 나눠 모란꽃가지무늬를 음각했다(사진12). 수돌은 상판의 중심부에 수쇠를 끼웠던 홈이 있으며 잔잔한 요철을 쪼았으며 암돌과 만나는 면이 약간 올라와 있다. 세발의 다리를 만들어 陰刻線으로 장식했고 木家具의 풍혈처럼 멋을 부리고 갈려진 차가루를 잘 담을 수 있도록 풀메처럼 주둥이가 나와 있다(사진13~14).
 
수돌의 지름은 32cm, 높이는 11cm이고 암돌의 높이는 12cm로 총 높이는 23cm이다. 이 차맷돌은 입자가 곱고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미세한 입자의 上品 차가루를 만드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온전한 차맷돌은 새로 발견된 것을 포함해 4점뿐이다. 가루차인 말차의 맛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茶粒子의 크기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차맷돌의 중요도가 새삼 강조되는 요인이다. 고려시대 문신 이규보가 차맷돌을 선물 받고 기쁜 나머지 詩까지 남긴 것을 보면 당시 禪茶文化에 차맷돌의 중요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몇 해 전에 겪은 ‘농약녹차사건’은 상대적으로 빈약한 우리나라 차문화를 크게 위축시키면서 전통 차문화의 계승 발전과 상반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안정적인 생활이 보장되는 전통 차문화 계승자의 양성과 우리 차문화의 대중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대환 상명대 석좌교수·문화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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