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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연극계의 총아 … 베를린 무대에서 퇴장 당한 뒤 망명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연극계의 총아 … 베를린 무대에서 퇴장 당한 뒤 망명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6.21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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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 20. 막스 라인하르트
▲ 연극감독 라인하르트. 젊은 시절의 모습. E.비버가 촬영한 라인하르트(함부르크).

망명이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추방이나 도주 혹은 국가폭력이다. 망명을 떠나지 않으면 수배를 당하고, 결국에는 체포돼 고문을 당하거나 수용소로 옮겨져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가해자들의 주도면밀함이 모자라 망명을 떠나야할 자들이 금방 가려지지 않을 때가 있고, 옭아매야 할 자로 지목은 하고 있지만 체제 수호에 도움이 될 만한 자들을 슬쩍 눈감아 버리는 수도 있다. 블랙리스트나 분서목록에서 빠진 경우가 그렇다. 당한 자 입장에서 보면 행운일 수도 있지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커다란 상처를 남긴다. 행운이나 상처뿐만 아니라, 모욕이다. 이런 경우 블랙리스트나 분서대상에서 제외된 자들은 ‘나를 불태워라! 나를 모욕하지 마라! 나를 남겨놓지 말아라! 나는 언제나 진실을 말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지금 너희들에게 내가 마치 거짓말쟁이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라는 분노의 소리를 지르게 된다.

1933년 1월 말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나치 정권은 유대인혈통의 연극배우이자 감독이요, 베를린 연극계의 총아로 저명한 극장의 극장장이자 여러 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던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 1873~1943)에게 ‘명예 아리아인 증서’를 수여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했다. 유대인 주제에 감히 아리안 혈통 독일인들의 특별한 호의를 무시한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의문을 품어볼 필요도 없다. 연극계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당연하고, 소유하고 있던 재산까지도 그 자리에서 빼앗겼다. ‘아리안인 증명서’는 나치가 인정하는 독일인 신분증과 마찬가지인데 모두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연예인이니 독일사람 대우를 해주겠다는데 이를 거절한 결과는 빤한 것이었다.

나치시대에 ‘아리안인 증명서’는 관료, 공무원, 의사, 법조인, 대학교수 등 고위직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신분증이었다. 이 증명서는 아리안인 민족공동체에 소속하는 자들의 ‘순수 아리아인 혈통’ 보증서로 나치가 집권한 1933년부터 나치가 패망한 1945년까지 독일 내에서 공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나치가 ‘아리안인 증명서’를 법제화한 이유는 아리아인이 아닌 사람들, 즉 유대인이나 집시를 가려내기 위함이었다. 가려내진 사람들은, ‘아리안인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선 공직에서 파면 당했다. 그러한 다음 국적을 박탈당했다. 직장을 잃었고, 추방당했다. 수용소에 감금됐다. 강제노역에 시달렸고, 결국에는 독가스 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아리안인 증명서’는 이승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생명 보증서였다.

‘아리안인 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무조건 끌려간 것은 아니다. 영국인, 스웨덴인, 프랑스인, 체코인, 폴란드인, 이탈리아인들은 제외 대상이었다. 아리아인들과 혈통으로 볼 때 친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은 아리아인 취급을 받았다. 취급을 받았다는 것은 특히 직장을 의미했다. 그런데 막스 라인하르트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이었다.

‘명예 아리아인 증서’를 거부한 대가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약 2개월이 지난 1933년 4월 4일 나치 지도부는 막스 라인하르트를 ‘도이치 극장(도이체스 테아터 Deutsches Theater)’에서 축출했다. 축출을 허가한 담당관은 독일문화 투쟁연맹(KfdK) 위원장인 한스 힝켈(Hans Hinkel, 1901~1960)이었다. 한스 힝켈은 언론인 출신으로 나치제국 문화부의 고위관료이자 나치친위대(SS) 대장을 역임한 자였다.
 

▲ 1930년 베를린에서 미국 영화 제작자 커티스 멜니츠(Curtis Melnitz)와 계약에 사인하고 있는 라인하르트.

힝켈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기 12년 전인 1921년에 이미 20세의 대학생으로 나치에 입당했고, 1923년에는 히틀러 폭동에 참여할 정도로 골수 나치분자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시절 나치 언론에서 활동했고, 1931년에는 나치 친위대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나치가 정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나치 행정에 참여해 불순분자 색출에 앞장섰다. 1933년 7월부터는 국가직 위원과 ‘(나치)제국문화관’ 자격으로 ‘독일 유대인 문화연맹’을 감시했고, 1941년 9월부터는 베를린 게슈타포에서 근무했다. 힝켈이 주안점을 둔 부분은 유대인 예술이 독일인과 독일예술에 때를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예술을 차단함으로써 독일정신과 예술을 보호하고, 이를 통해 독일인들의 아리안화에 집중했다. 나치 집권시절 괴벨스가 장관으로 있던 선전부에 근무하며 문화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

'명예 아리아인 증서' 거부 … 하인츠 힐퍼르트와 명암 엇갈려

막스 라인하르트가 쫓겨난 자리에는 하인츠 힐퍼르트(Heinz Hilpert, 1890~1967)가 앉았다. 베를린출신이었고, 독문학 철학 예술사를 전공한 독일인이었다. 힐퍼르트는 정규교육에 정통 인문학까지 대학에서 공부했지만, 라인하르트는 실업학교 출신에 대학이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었다. 힐퍼르트는 1934년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1944년 문을 닫을 때까지 ‘도이체스 테아터 (DT)’ 극장장이라는 권좌를 유지했다. 하인츠 힐퍼르트 역시 1920년대와 30년대 이름을 날린 연극 감독이다. 초반에는 주로 칼 추크마이어 작품을 연출했는데 막스 라인하르트의 눈에 띄어 1926년부터 ‘도이치 극장’에 채용돼 라인하르트 밑에서 연출을 담당했다. 1931년 ‘도이치 극장’에서 칼 추크마이어의 「쾨페닉의 대위」 초연으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외덴 폰 호르바트의 「빈(비엔나) 숲의 이야기」 초연으로 역시 연극사에 이름을 기록했다. 「쾨페닉의 대위」 초연은 원래 라인하르트가 연출하려던 작품이었는데, 작가인 칼 추크마이어와의 교분관계로 힐퍼르트가 담당한 것이었다.

‘도이치 극장 (DT)’의 사장과 직원관계였던 라인하르트와 힐퍼르트는 나치가 집권하자 사회적 지위의 명암이 갈리게 된다. 라인하르트는 축출됐고, 공석으로 남아있던 바로 그 자리에 나치는 힐퍼르트를 앉힌다. 힐퍼르트는 알게 모르게 잘 나가는 라인하르트를 시기하며 경쟁심을 지니고 있던 터였다. 한 사람은 망명을 떠났고, 시기했던 사람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영예를 누리는 위치가 된 것이다. 독일 망명 지식인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중의 하나다. 2차 세계대전 후 힐퍼르트는 나치전력 때문에 한 동안 고생을 했지만 곧 재기해 프랑크푸르트 극장장과 괴팅겐 극장장을 역임했다. 유명한 작품들도 연출했다.

잠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연극계 상황 및 베를린 연극계 지도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막스 라인하르트의 망명 원인과 연극계에서의 위상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시절의 연극계는 그야말로 물밀듯이 몰려오는 개혁과 혁신의 파도 속에 있었다. 서사극은 고루한 옛 전통을 깨부수며 현대극을 창조하고 있었고, 민중극 역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1920년대 중반까지는 그래도 표현주의 연극이 공연 프로그램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연극계는 고정돼 있지 않고 연극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기심과 흥미는 급속도로 증가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8년까지는 무엇보다도 궁정극장이 지배적이었다. 영주나 제후의 궁정에서 직접 공연을 하거나 귀족의 재정적 지원과 정치적 후원으로 연극이 가능했다. 전통적으로 연극은 지배자의 궁정에서,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을 위해 공연을 했다. 배우는 그들을 위한 놀이꾼이었다. 그런데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작되며 연극을 후원하는 기관이 지배자에서 국가로, 주정부로, 시로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국립극장’, ‘시립극장’이란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황제가 지배하던 제국과 시민의 대표로 이뤄진 민주공화국의 차이가 연극에서는 궁정극장과 국립극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역사적으로 연극이라고 하면 궁정극장을 의미했지만 19세기부터 연극계에는 민중극장이 있었다. 민중극장은 지배자나 귀족이 아닌, 민중이 관객인 연극을 말한다. 누가 관객이냐에 따라 연극의 성격이 나눠진 것이다. 민중극장은 사적으로 운영됐고, 사적인 만큼 당연히 수입을 염두에 두었다. 궁정극장이 무엇보다도 고전적인 비극을 공연한 데 비해, 민중극장에서는 희극과 만담 (혹은 익살극)이 무대에 올랐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가 되며 사적으로 운영되던 연극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급속도로 양적인 팽창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완전히 새로운 기법의 연출이 고안됐고, 사적으로 운영된 연극이 시민계급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전작품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이제 과거와는 달리 새로운 관객을 위해 연극을 한 것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연극계 상황을 살펴보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연극의 중심지는 베를린이었다. 연극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문화의 중심지였다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문화가 발달한 곳에는 항상 연극이 있기 때문이다. 연극이야 말로 문화의 상징이다. 연극이 죽으면 문화가 숨쉬기가 힘이 들다. 베를린의 연극무대는 문화를 주도했고, 새로운 이념이 무대에서 탄생되고 실험되었다. 새로운 발전이, 새로운 세계가 무대에서 펼쳐졌다.

감독인 에르빈 피스카토르(Erwin Piscator, 1893~1966)와 레오폴트 예스너(Leopold Jessner, 1878~1945)는 연극에서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피스카토르는 ‘정치극’을 무대에 올렸다. 예스너는 시대극을 올렸다. 정치극이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피스카토르와 예스너는 브레히트가 서사극에서 소외형식을 사용하는 것처럼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정치극에 집중했다. 사회변혁을 위해 비판하고, 선동하고, 투쟁했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도이치 극장 (DT)’과 또 다른 대극장에서 연극을 하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성황리에 「서푼짜리 오페라」(1928년)를 공연 중 이었다. 에르빈 피스카토르, 레오폴트 예스너, 막스 라인하르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20년대 독일 연극을 주도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베를린을 대표하는 연극인들이었고, 이들의 연극이, 이들의 주변 이야기가 당시 베를린 연극계의 풍경이었다. 베를린의 극장에서 전 독일의 사람들이, 독일인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연극을 관람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중심지였고, 유럽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러한 풍경에서 우뚝 들어나는 것이 막스 라인하르트와 ‘도이치 극장’이었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연극계의 총아였고, 극장을 지배한 권력자였다.

▲ 라인하르트와 호프만스탈이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다.(Photo: courtesy of Welt). 한가로운 여유처럼 보이지만, 나이 60세에 망명에 오른 그의 생활은 궁핍했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배우이자 감독이었고, 극장장이자 극장경영자였고, 연출가이자 극장을 설립한 사람이다. 수많은 수식어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20세기 초반 독일 연극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연극인 중의 연극인 이다. 연극사적으로 볼 때는 현대 ‘레지테아터 (Regietheater)’의 창시자다. ‘레지테아터’란 말 그대로 감독 중심의 연극으로 원작에 충실하기보다는 연출가가 시대와 배경을 자유자재로 설정하는 연출가 중심의 연극을 말한다. 원작을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연출가가 작품을 해석하여 무대에 올리는 것이다. 연극보다는 오히려 오페라에서 보통 ‘레지테아터 연출’이란 말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연출방식을 위해 대형 무대에 화려한 무대장치를 사용했다. 연기자는 ‘연기연극(Schautheater)’을 펼치도록 했다. 현대연극의, 현대연출 기법의 길을 연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902년부터 이미 베를린에서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다. 1905년에 베를린 ‘도이치 극장(DT)’ 관리를 넘겨받았고, 1906년에는 극장자체를 구매해 버렸다. ‘도이치 극장’의 사장이 된 것이다. 극장 사업 이외에 연극학교를 세웠고, 주로 현대연극을 공연하는 소극장도 열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극장들을 매입해, 결국에는 11개의 무대를 소지했다. 베를린에서 ‘극장제국’을 건설한 것이다. ‘극장제국’이라는 말 보다는 우리식의 ‘극장재벌’의 창업자인 셈이었다. 그만큼 베를린 연극계에서 명성을 날렸고 동시에 막강한 권력을 구축한 연극인이었다. 이러한 연극계 분위기와 사회적 배경에서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며 나치가 “명예 아리아인 증서”를 수여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막스 라인하르트의 부모는 상인으로 헝가리 출신 유대인들이었다.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 빈으로 이사해 사업을 했다. 사업이 잘 되는 듯 했지만 반자유주의적 분위기와 유대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뚜렷해지자 빈 근교의 시골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1873년 5월, 가족이 더욱 가난해진 상태에서 막스 라인하르트가 세상에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라인하르트가 아니라 막시밀리안 골드만이었다. 어린 시절, 그리고 철이 들 무렵 라인하르트는 가난이 뼈에 사무쳤다. 실업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원이 되기 위한 연수를 받았고, 그와 함께 배우가 되기 위해 연기지도를 받았다. 먹고 살아야 했지만, 꿈은 연극배우였다. 17세가 되던 해인 1890년 빈의 사설무대에서 배우로 데뷔를 했다.

연기를 시작하며 광고전단에 예명으로 ‘라인하르트’를 사용했다. 라인하르트는 테오도르 슈토름의 유명한 시적 사실주의 소설 『임멘 湖』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청순했고 아련한 사랑의 추억에 살아온 인생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한 순수했던 인간이 라인하르트이다. 1904년에는 예명이 아니라, 관청의 허가까지 받아 가족의 이름을 아예 라인하르트로 개명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노역으로 출연했다. 실제 나이가 어린데도 많은 관객들은 그를 오랫동안 노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데뷔 후 옛 왕립 작센 궁정배우이자 콘서바토리엄 교수인 에밀 뷔르데에게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 이후의 연기활동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연기활동뿐만 아니라 극장경영에 두각을 나타냈다. 빈에서 활동했고, 20세가 되던 1893년에는 잘츠부르크 시립극장에서 연기를 했다. 한 시즌에 49개의 역할을 소화해 냈다. 21세가 되던 해 베를린 ‘도이치 극장’의 배우가 되어 30세 가까이 될 1902년까지 단골로 노인역을 맡았다. 그는 연극을 자연주의의 편협함이 아니라 인간과 세상의 근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색채’, ‘음악’, ‘크기’, ‘화려함’, ‘밝음’이 라인하르트의 연극을 특징짓는 키워드다. 이에 따라 라인하르트의 연극은 화려하고, 밝고, 음악성이 있으며, 거대했다.

30세가 되기도 전인 28세의 나이로 베를린에 극단을 조직했다. 연기뿐만 아니라 극장경영인이 되는 출발이었다. 30세에 ‘소극장(Kleines Theater)’과 ‘신극장(Neues Theater)’을 인수했다. 이 극장들이 오늘날의 ‘베를린 앙상블’이다. 1905년에는 3년 전에 본인 스스로 무대에 서서 연기하던 ‘도이치 극장’까지 인수한다. 그뿐만 아니라 연극학교까지 설립한다. 1902년부터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는 1933년까지 막스 라인하르트는 각종 무대의 감독으로, 극장 설립자로, 극장경영자로 ‘극장제국’을 건설한다. 극장제국을 건설했다는 말은 연극계를 평정하고 연극계의 황제가 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된다. 물론 혼자의 힘이 아니라 경영면에서 동생의 조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년엔 생활안정 위해 '연기워크숍' 개설하기도

막스 라인하르트의 ‘극장제국’ 건설은 오늘날까지 극장 경영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라인하르트는 극장제국 건설로 현대극장의 이정표를 제시한 사람이다. 라인하르트는 극장을 예술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한 것이 아니라, 경영으로 여겼다. 1905년 ‘도이치 극장’을 인수하는 시작부터 자본주의 경제제국 기반위에 연극예술을 진행시켜 나갔다. 연극이, 극장이 현대화 되는 순간이었다. 이 방법은 할리우드의 문화산업보다도 훨씬 앞서간 경영방식이었다.

▲ 라인하르트는 1943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뉴욕 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헤이스팅스 온 허드슨에 있는 웨스트체스터 힐즈묘지에 안장됐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나치의 제안을 거부하고 일단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자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933년 베를린 연극무대에서 강제로 퇴장당한 후 왕년의 성공은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퇴장 당할 때의 나이가 60이었다. 미국에서 여러 길을 모색했지만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라인하르트는 돈이 없었다. 노년에 안정을 찾아보려고 연기워크숍을 개설했다.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나 가난이 뼈에 사무쳤던 젊은이는 한때의 영화를 뒤로하고 다시 가난의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고 70세 생일이 몇 주 지난 후 망명지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었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꿈을 실현시키는데 일생을 바쳤다. 배우로 성공했고, 연극사에 이정표도 마련했다. 극장경영으로 부와 권력을 누리기도 있지만, 더러운 손이 그것을 미끼로 내미는 악수를 거절했다. 잘 산 것일까? 그의 인생은 연극무대였다. 그는 배우였고 퇴장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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