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7:55 (수)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가? … 음식에 담겨있는 인간의 욕망들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가? … 음식에 담겨있는 인간의 욕망들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7.06.12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욕망의 음식-음식의 문화사_ 3. 미식의 세계(2): 맛에 대한 인간의 편벽
▲ 모르타델라. 유럽 중세사 전문학자이자 문화로서의 음식사의 권위자인 볼로냐대학교의 맛시모 몬타나리 교수(Massimo Montanari)는 모르타델라가 이탈리아 자생이 아니라 유럽연합의 리더 국가인 독일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말한다. 출처=https://www.italianfoodexcellence.com

“이탈리아에서는 11시 이후에 카푸치노를 마시면 비난은 안 하지만, 용서는 못한다.”

볼로냐에 와서 아침에 일어나 집 근처 카페나 바르(bar)에 나가면 인근에 사는 직장인, 학생, 주부, 노인들이 자신의 단골집에서 브리오슈(brioche)라는 이름의 빵과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본다. 개가 있는 사람들은 꼭 개를 데리고 나온다. 취향에 따라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이가 있는가 하면, 프로쓰(froth)라는 우유 거품을 얹은 카푸치노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빵 한 조각과 커피 한 잔으로 아침 식사를 하는 것이다.

‘Bar 500’이 그런 일상을 목격하기에 제격이다. 구에라찌 거리와 산토 스테파노 거리가 만나는 네거리 750여년 역사의 건물 1층에 ‘파르마시아 꼬르소(Farmasia, 약국; Corso, 영어로는 course)’가 있고, 신호등 건너 길 맞은편에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소박한 바르 500이 있다. 주인은 50대 초반의 마르코씨로 드니스와 파올로라는 참한 알바 처녀가 있지만 직접 커피를 만든다. 맛있다. 단골이 많은 이유는 그의 친절 외에 그것 밖에 없다.

여기 단골인 86세의 노익장 알베르토 영감님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바르를 찾아 자신의 지정석에 자리 잡고 앉아 출입하는 동네 사람들과 말을 섞거나 신문을 읽으며 정보를 얻는다. 비벤차 출신의 드니스는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다. 알바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다. 이탈리아는 내외국인 막론하고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 드니스와 알베르토씨는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친하다. 드니스가 예의 바르고 알베르토씨가 무례하지 않기 때문인데, 알베르토씨는 12세 연하의 띠동갑 부인과 사는 게 다소 쑥스럽지만 자랑스런 모양이다. 그는 모르는 게 없어서 파마시아 꼬르소의 약사 산탄드레아(Santandrea)씨의 이름을 알려준 것도 그다. 산탄드레아라는 이름은 성 안드레아를 지칭하는 것이다.

4대 째 대를 이어 약국을 운영하는 산탄드레아씨는 연배는 나와 비슷한데, 작은 키는 아니지만 허리와 무릎이 좀 구부정하다. 볼로냐에서 가장 고객이 많은 곳이 이 약국이라고 내가 단정하는 건 이야기라도 좀 하려고 가보면 약을 사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민망해 그냥 나온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이방인인 나를 보면 반색하며 기다리는 손님 아랑곳 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체코 여행 중 여권이 만료돼 헝가리 부다페스트 소재 이탈리아 대사관에 갔다가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듯 문 앞에 서 있던 의학 공부하러 루마니아에 온 페루 출신의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된 사연을 전하는 그의 눈은 30여 년 전 젊은이의 낭만적 눈빛을 띠고 있었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데 설탕을 한 봉지 털어 넣고 잘 저어 마시면 커피의 쓴 맛과 설탕의 단맛이 절묘한 대비라 할까 멋진 앙상블을 이룬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원샷으로 마시고 탄산수를 입안에 머금고 입가심을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삶의 의욕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탈리아인들은 보통 오전 11시 이후에는 카푸치노를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모두의 우스갯소리(pun, 익살 또는 신소리)에서 보듯 아무 때나 카푸치노를 마시는 사람들과 자신들을 구별 짓는 기상을 보인다. 이렇게 사람들은 저마다 맛있게 먹고 마시는 법을 발전시킨다. 그리고 개인의 법도가 여럿의 법도가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일러  문화라고 이름 붙인다. 맛있게 먹는 것, 미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지난 번 글에서 롯시니가 대단한 미식가였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유별난 별미 기호를 위해 필요한 식재료를 현지에서 직접 주문하는 정성과 맛있는 음식을 쫓아 거처를 옮겨 다닌 열정을 지닌 음식의 진정한 팬이었다. 혹시 미식의 달인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자녀 교육과 재산 증식을 위한 한국인의 위장 전입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가 좋아했던 음식 중에 모르타델라(mortadella)라는 여기 볼로냐 지방 특산 소시지가 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나없이 소시지와 햄을 먹는다. 부대찌개에, 단독이나 다른 채소 따위와의 볶음 요리에. 그러나 그렇게 일상화된 건 미식의 대상이 아니다.

‘까뻴레티 인 브로도’에 흠뻑 빠진 롯시니

유럽 중세사 전문학자이자 문화로서의 음식사의 권위자인 볼로냐대학교의 맛시모 몬타나리 교수(Massimo Montanari)는 모르타델라가 이탈리아 자생이 아니라 유럽연합의 리더 국가인 독일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말한다. 그 진위 여부는 별도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핑크색 모르타델라를 자신들 소산이라고 믿으며 즐겁게 먹고 먹을 때마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 어느날 밤 필자와 맛시모 몬타나리 볼로냐 대학교 유럽 중세 음식문화사 교수.

알프스 남단 이탈리아 북서부 피예몬테주의 주도 토리노(피예몬테어로는 Turin) 지방은 송로버섯의 주요 산지다. 롯시니가 이 버섯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웬만한 식도락가는 다 안다. 캐비어(cavir, 철갑상어 알), 후아 그라(Foi Gras, 거위 간 요리)와 더불어 세계 3대 珍味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진귀한 버섯 요리를 롯시니는 허구한 날 먹다시피 했다고 한다. 

또 롯시니는 까뻴레티 인 브로도(cappelleti in brodo)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수프에 완전히 반해서 누군가 뺏어 먹을까봐 두렵기라도 한 냥 정신없이 뜨거운 수프를 들이키다시피 먹었다고 한다. 베르디 역시 이 아스파라거스 수프를 좋아해서 ‘맛있는 수프’라는 의미의 라 스퀴시타 미네스트라(la squisita minestra)라고 부르며 친구나 손님들에게 접대했다고 한다.

까뻴레티 인 브로도는 사실 이탈리아 만둣국이다. 브로도는 ‘육수’라는 말이며, 까뻴레티는 ‘작은 모자’란 의미의 파스타다. 주로 반죽할 때 채소를 사용하여 예쁜 빛깔을 만들어낸다. 이 만둣국의 국물 맛을 내는데 아스파라거스를 능가하는 것이 없다. 롯시니와 베르디의 미각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아스파라거스 육수 아니었나 싶다.

만드는 방법은 먼저 질 좋은 재료를 구하는데 있다. 발폴리첼라는 믿거나 말거나 줄리엣의 고향으로 알려진 베로나(Verona) 북쪽의 작은 마을이다. 여기에서 마을 이름과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알코올도수 14%의 고급 레드와인이 생산된다. 베로나는 볼로냐에서 열차로 한 시간 반 거리다.

발폴리첼라(Valpolicella)는 또 올리브 오일로 유명한 곳이다.  다른 지역 올리브 오일보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황녹색 빛깔과 섬세한 향, 레몬 잎새의 느낌과 함께 사향 냄새가 나는 뒷맛이 이곳 오일의 특징이다. 여기서 생산되는 것과 같은 질 좋은 올리브 오일에 향신료 로즈마리(Rosemary)와 깨꽃 즉 샐비어(salvia, 세이지라고도 부르는 꿀풀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지중해 원산이며, 향신료·약초 및 관상용으로 쓰임) 등을 혼합해 돼지 허리살과 송아지고기 각각 500g에 골고루 문질러 180℃ 오븐에서 40분 동안 구운 뒤 칼로 잘게 다진다. 그리고 나서 미리 다져 둔 프로슈토 200g과 모르타델라 200g을 함께 섞은 뒤 ‘치즈의 황제’라 불리는 곱게 간 파르마지아노 레지아노(흔히 파마산이라고 부르는 치즈)나 그라나 파다노 치즈 가루를 알맞게 섞어 소를 만든다. 다음으로는 달걀 2~3개를 볼에 깨뜨려 넣고 잘 풀어서 까뻴레티 반죽을 만든다. 숙성시킨 반죽을 정사각형으로 잘라 소를 가운데에 올리고 세모로 접어 양쪽 끝부분을 서로 붙여주면 이탈리아식 미니 만두 까빨레티가 완성된다.

▲ 돼지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자연 숙성시킨 이탈리아 햄 프로슈토(볼로냐 근교 모데나의 한 냉동창고에서 숙성 중인 프로슈토)

이렇듯 세상은 진정 맛있는 먹거리로 넘친다. 그리고 인간은 못 먹는 것이 없다. 우스갯소리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바다 속을 누비고 다니는 잠수함만 빼고. 물론 시간만 되면 그것들도 못 먹을 까닭이 없다고 중국인들은 말한다. 먹을 것에 대한 과도한 욕구, 이것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욕망은 있으되 대상의 부재로 인한 대리 충족은 아닐 것인가? 사실 음식 사랑이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서 癖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롯시니 개인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당나라 이후 중국 남성들을 사로잡은 전족에 대한 과도한 열정 내지 탐욕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결코 고상한 인생을 살지 못한다. 영원히 사는 길은 성장을 통해서 가능하고, 성장을 통해 영원히 사는 삶은 至福(felicity)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음식의 유혹 앞에 귓전에서 뇌리에서 멀어진다.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가? 아니다, 대체로 먹기 위해 산다. 인간의 탐식은 본능이고, 그러므로 죄악이 아니며 오히려 진지하게 추구해야 마땅하다.

金蓮과 金蓮癖 혹은 蓮癖

<道山新聞>에 따르면 南唐의 後主인 제2대 元宗 李璟에게 姚娘이라는 가냘프고 춤을 잘 추는 애첩이 있었다. 그는 높이 6척의 金蓮을 만들어 진귀한 보물로 장식하고 구슬로 치장한 뒤 그 안에 갖가지 색깔의 瑞蓮을 만들게 했다. 요랑은 흰 비단으로 발을 감싸고 발끝을 구부려 초승달 모양을 만든 후 비단 버선을 신고 연꽃 안에서 춤을 추니 그 모습이 마치 구름 위에서 노니는 듯했다고 한다.

宋代에 이르러 여성의 纏足은 더욱 유행하게 됐다. 송말에서 원대에 이르면 여성의 큰 발 자체를 수치로 여기게 됐다. 여자가 전족을 하지 않고 귀를 뚫지 않으면 大脚仙(발 큰 선녀), 半載美人(반쪽 미인)이라고 조롱했다. 발 큰 여성은 시집가기조차 힘들었다.

▲ 신발로 봐도 전족은 기형적인 ‘성의 상징’으로 보인다. ‘粽子’라는 음식이 이 전족과 관련 깊다.

이처럼 점차 전족은 여성미를 나타내는 조건이 되었다. 남송 때는 노래하는 기녀에 대해 四絶(네 가지 장기)을 요구했다. 사절은 脚絶, 歌絶, 琴絶, 舞絶로서 예쁜 발, 노래 솜씨, 빼어난 가야금 연주 실력, 춤 솜씨를 말한다. 전족은 낮에는 남자들에게 감상의 기쁨을 주고, 밤에는 노리개로 활용됐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詞’를 ‘詩余’라고 불렀다. 詞란 원래는 노래의 바탕이 되는 광범위한 의미의 시를 뜻한다. 노래 歌詞가 바로 그것이다. 민간 俗曲이 수없이 생겨나다보니 노랫말인 詞가 발전하게 됐다. 소동파의 ‘菩薩蠻’은 여성의 전족을 소재로 한 최초의 노랫말 즉 詞다. 보살만은 詞牌名으로 많은 문인들이 동일한 제목의 작품을 남겼다. 당나라 선종 때 오늘날의 미얀마 지역에 있던 女蠻國에서 사신이 왔는데, 아름답게 늘어뜨린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장식이 발끝까지 내려오는 차림이라, 중국인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마치 보살을 닮았다 하여 보살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 후 보살만은 미녀를 가리키는 속어로 쓰이게 됐다.

향 바르니 연꽃 걸음 아끼지 마소.
비단버선 물결 넘어 가버릴까 늘 근심하는데.
춤추니 도는 바람만 보이고 종적은 간 곳조차 없네.
살그머니 궁중풍으로 얌전히 차려입고
두 발로 서고자 하지만 넘어지고 마네.
가늘고 고와 아마도 어려울 것 같으니
손바닥 위에서나 보아야 할 것을

淸代 蘇州지역에서 유행하던 山歌 「纏金蓮」 또한 남자가 여성의 작은 발 전족에 몰두하는 모습과 남자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여성이 자신의 三寸金蓮(세치 길이의 전족)에 대해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중국남자들은 먹을 것이 넘쳐나는 연회석상에서 여자의 세치 신발을 술잔 삼아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리고 이 비인간적인 작은 발 전족에 맞는 작은 신발을 金蓮杯라고 했다. 金蓮은 女子의 예쁜 발을 形容하는 말인데, 旱蓮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미인의 걸음걸이는 金蓮步라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영동지방에서 결혼식이 끝난 후 신랑 다루기의 하나로 신랑 구두에 술을 따라 신부와 신부 들러리들에게 마시도록 강요하는 풍습이 있는데, 설마 이것이 금련배의 유습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명대의 奇書 『金甁梅』 제6회에는 長安의 소문난 花花公子 西門慶이 무대의 아내이자 호랑이를 맨 손으로 때려잡았다는 무송의 형수 潘金蓮을 유혹해 첩으로 삼은 뒤 그녀의 세치 金蓮 신발을 벗겨 술을 따라 마시며 노는 대목이 나온다. 이와 같은 변태행위의 근저에는 무엇이 자리 잡고 있을까? 청대 방현(方絢)의 「貫月査」에는 여인의 앙증맞은 작은 금련 신발을 쟁반 위에 올려놓고 한 자 다섯 치 정도의 거리 밖에서 손님들이 젓가락으로 팥이나 연밥 등을 집어 던져 넣는 놀이가 묘사돼 있다. 만일 집어넣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한다. 말은 벌주지만 숨은 의도는 신발에 밴 여인의 발 냄새를 맡기 위함이다. 방현의 또 다른 시 「采蓮船」은 세치 발을 한 여인과의 사랑을 동경하는 남자들이 아예 도자기로 세 치 전족 모양 술잔을 만들어 두고 여인이 그리울 때 그것으로 남다른 감회와 함께 술을 마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김명석, 『역사 속 중국의 성문화』 참조).

이런 전족에 대한 집착 혹은 이상 행위를 당시는 金蘭癖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우리는 어떤 일에 치우친 사람을 편벽되다고 말하는데, 여기서의 편은 치우치다는 의미고, 벽은 후미지다는 뜻이다. 따라서 편벽은 ‘어떤 일에 지나치게 치우침’이라는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
 
얽어매 묶은 발 纏足(얽힐 전)은 裹脚(쌀 과/꾸러미 과, 보자기 같은 것으로 싸다, 얽다), 纏小脚, 裹小脚, 紮脚(감을 찰, 廣東)으로도 불렸다. 헝겊 천으로 하루 종일 칭칭 동여매고 살다보니 발은 기형이 됐다. 그러면서 남자들의 악취미에 점차 익숙해져 갔다. 이윽고 전족은 성의 상징이 됐다. 남자가 여자의 발을 만지는 것은 교접의 예비행위로 간주됐다.

전족은 여아 나이 4~5세에 시작하는데 8월 24일 길일을 택해 헝겊 천으로 발을 동여맸다. 이 때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나머지 네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접어 흰 띠로 꽉 잡아맨다. 그리고 끝이 뾰족한 신발을 신는데 낮에는 집안사람들이 그것을 잡고 다니고 밤에는 흰색 천을 실로 칭칭 감아 풀어지지 않도록 했다.

전족의 희생자는 여성이다. 모진 고통을 견디고 변태에 가까운 남성들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완상물에 다름 아닌 전족을 완성해야 하는 건 여성들의 몫이다. 결국 남성들은 자신들의 성적 취향을 심미성으로 위장하고 여성들에게 전족을 강요했다. 더불어 자신들의 불순한 욕망이 아름다운 결과를 맺도록 아름다운 전족을 위한 음식을 창조했다.

어린 아이가 전족을 한 다음 날 粽子를 먹도록 한 것이다. 종자는 찹쌀에 대추 따위를 넣어서 댓잎이나 갈잎에 쪄서 먹는 식품이다. 왜일까? 남성들의 단순함이 엿보이는 이 종자는 전족한 발의 모습과 닮았다. 때문에 종자를 먹는 풍습은 예쁘고 앙증맞고 매력적인 세치 전족이 되기를 바라는 남성들의 검은 욕망이 반영된 음식이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