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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인의 노래
방랑인의 노래
  • 교수
  • 승인 2003.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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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17년 전 봄 나는 무엇에 떠밀리듯 전주로 왔다. ‘運命’은 글자 그대로 항상 ‘움직이는 것’이라는 어줍잖은 믿음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휘파람 불며 여행 가듯 이 곳에 왔다. 한때는 전국 6대 도시 안에 들었다는 인구 60여 만 명이 살고 있는 古都, 전통과 예술이 살아 숨쉬는 예향, 맛깔스러운 전통음식과 순박한 인심이 살아 남아있는 고장, 아파트의 전세 가격이 매매가격보다 비쌌던 희한한 곳, 주변에 광활한 평야를 거느리고 있는 農道의 중심도시…. 이 같은 전주의 모습과 특성들을 보고 체험하고 또 생활해 온 17년 동안 나는 아파트촌, 차량, 신작로, 고층건물들이 늘어남으로써 외형적으로 커져 가는 전주의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의 증인이 돼왔다.

‘호모 비아틀’(방랑인). 방랑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인 것. 마르셀은 인간을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마르셀은 인간을 그렇게 부름으로써 방랑하는 곳에서 인간의 삶이 갖고 있는 본질을 보고자 했으며, 그래서 그 말속에는 구하며 방랑하고 방랑하며 구할 때 인간적 방랑의 참모습이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던가.

전주라는 낯설었던 고장에 둥지를 튼 지 어느덧 17년. 처음에는 이곳이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 아니라는 점에서, 즉 한 이방인으로서의 심정적 방랑자였다면, 지금은 또 다른 의미의 심정적 방랑자가 돼 있다. 물론 내가 느끼는 이러한 방랑의 의미를 마르셀이 부여한 ‘방랑의 참모습’이라는 현학적 의미로 포장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왜냐하면 나의 심정적 방랑이란 ‘구하기 위한 방랑’이라기 보다는, 잘 보아준다면 ‘가상스러울 수 있을지 모르나 올바른 태도는 아닐 수도 있는 목가적 도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처음 학교에 부임했을 때 ‘어쩌다’ 영어나 수학을 다른 학생들 보다 조금은 못했거나 싫어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럴듯한 기업체의 취업 관문에도 가보지 못하는 학생들을 쳐다보면서, ‘(연줄을 동원하면) 그래도 몇 명쯤은 그럴듯한 회사에 취업을 시킬 수 있을 것’이라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릇을 그리지 않고, 그릇에 담겨있는 물의 모양만 그리려고 했던 치기마저도 무너져 버리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가 아닌 누구라도 낯선 곳에 온 이방인으로서가 아닌 또 다른 심정적 방랑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한탄하는 횟수마저 줄어들게 되면, 나 스스로가 현실을 하나의 틀 속에 고착시켜 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전혀 眺望的이지도 못하게 돼 가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나의 맥락 속에 고착돼 있기를 거부하는 현실,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 하면서도 아무 것도 나타내 주지 못하는 현실을 ‘하나의 틀’로 고정시킴으로써, 스스로 그 현실을 거대한 암벽이나 신기루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목가적 도피’라는 자기 합리화로 나타날 뿐이다.

서울에서 전주. 고속버스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 그러나 그 거리는 지방대학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너무나 먼 거리이다. 그 거리는 지난 17년간 한치도 좁혀지지 않았거나, 심정적으로는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이제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는 내가 멈춰선 공간, 그 곳을 휘감고 있는 불가시적 안개를 헤집고 다시 떠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을 풀고, 머리 꼿꼿이 들고 눈 반짝이며, 굳이 신의 이름조차도 다르게 쓸 수 있다는 당당한 믿음을 갖고….

지난 17년 동안, 조금 ‘뻥튀기’를 하면 1천명쯤 되는 제자들이 밥벌이 못해 굶어 죽었다는 친구 하나 없이 지내고 있는 것이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굳이 지방분권에 관한 목소리가 높지 않아도, 5년마다 찾아오는 선거의 계절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나 같은 지방대학의 교수들도 스승의 날이나 사은회 때 귓전을 울리는 ‘스승의 노래’가 부끄럽지 않은 시절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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