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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속의 천문학이 지닌 독특하면서도 근본적인 성격
한국 역사 속의 천문학이 지닌 독특하면서도 근본적인 성격
  • 전용훈 한국학중앙연구원·과학사
  • 승인 2017.06.1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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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한국 천문학사』 전용훈 지음 | 들녘 | 477쪽 | 35,000원

 

천문학을 실행할 수 없는 이념적 제약 속에서도 단절 없이 이뤄진 천문학의 실행, 이것이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이 지닌 독특하고도 근본적인 성격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천문학은 이론적 차원에서는 중국에서 형성된 천문학 지식을 수용하고 따르면서도 실행적 차원에서는 독자적인 실천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하는 천문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천문학사 공부를 시작했을 때부터 오랫동안 나는 니덤이 중국 천문학사에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천문학사에서 어떤 천문학 이론이 창안되고 발전됐는지, 한국의 천문학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지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한국 천문학사에 관한 지식을 쌓고 연구를 진행할수록 이런 목표는 쉽게 달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 천문학사는 중국 천문학사의 아류이거나 중국의 천문학을 답습한 보잘것없는 역사로 보일 뿐이었다. 욕심을 줄이고 줄여서 사소한 천문학 이론의 창안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그마저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 천문학사는 중국 천문학사의 저열한 아류이자 답습일 뿐인가. 

하지만 한국 민족이 역사기록이 증거 하는 한에서 최소 2천500백 년 이상을 독자적인 역사 및 문화공동체로 존속해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런 유구한 한국의 역사 속에 있었던 천문학이 중국 천문학의 아류이자 답습일 뿐일까. 역사기록들을 검토해보면, 한국의 역사만큼이나 그 역사 속에서 실행된 천문학의 역사 또한 유구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사에서 이뤄진 천문학의 역사는 그만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런 생각을 붙잡고 여러 해를 보냈다. 최근에야 나는 한국 천문학사의 연구 목표와 역사적 실상과의 괴리가 생기는 이유를 알게 됐다. 그것은 ‘과학의 역사’를 탐구하려는 목표를 지닌 채 ‘역사 속의 과학’을 탐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바꿔 말하면,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에서 보편적인 천문학의 역사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현재 천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서양에서 발생하고 변화해서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특별한 성격의 학술을 말한다. 사실 동아시아의 전통시대에 이러한 천문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 전통시대에 우리가 천문학이라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천문학이라고 부르는 서양 천문학과 일면 유사하고 일면 다른 학술이 동아시아의 전통시대에 존재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부를 마땅한 이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천문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동서양의 천문학은 그 이름이 같을 뿐, 이 학술에 부여된 이념과 가치를 시작으로 탐구의 목적과 방법, 사회적 기능과 역할, 다른 학술과의 관계 등 많은 것들이 서로 달랐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전통천문학은 오늘에까지 이어진 것이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완전히 종언을 고하고 서양 천문학으로 대체돼 단절돼버린 학술이다. 때문에 동아시아의 천문학에서 그것이 현대 천문학으로 이어진 천문학의 역사를 탐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현대로 이어지지 못한 단절된 역사에 대해 동아시아 천문학은 왜 현대 천문학으로 이어지지 못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런 식의 연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서양 천문학과 비교하고 그 수준과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천문학을 원래의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이탈시킨다는 점이다. 비교와 가치 평가의 기준은 항상 현대 서양 천문학이며 나아가 그것에 이르게 된 천문학의 역사인 서양 천문학사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 천문학사 연구자는 한국의 천문학이 얼마나 서양 천문학 혹은 중국 천문학과 비슷했는지, 혹은 달랐는지, 그것이 왜 서양 천문학이나 중국 천문학처럼 되지 못했는지를 묻고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한국 천문학사의 사실들이 ‘한국의’ 맥락에서 이탈하고, 연구자는 그것이 원래 한국의 역사 속에서 지녔던 의미와 가치를 서양이나 중국의 관점과 맥락에서 재단해버린다. 

나는, 한국 천문학사의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에서 일반적인 서양 혹은 중국 천문학에서 도출된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목표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대신 한국의 역사에서 천문학이 수행한 역할을 한국사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내가 이 책에서 의도한 한국 천문학사는 보편적인 천문학의 발전사에 비춰본 한국의 천문학사가 아니라 한국의 역사 속에서 천문학이 수행한 역할의 변천사가 됐다. 내 관점대로라면, 중국 천문학사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천문학이 수행한 역할의 변천사가 돼야 하겠지만, 중국 천문학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내 주제를 넘는 일이다. 하지만 중국 천문학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상관없이, 한국 천문학사는 중국 천문학사와 다를 수밖에 없고 나아가 독자적 특질과 가치를 지니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서양 천문학과 다른 동아시아 천문학의 근본적 특성과 한국 역사의 독특성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전통시대에 천문학은 동아시아인들이 신뢰할 만한 모든 권위와 가치를 최종적으로 의탁했던 하늘에 대한 학술이었다. 하늘의 命을 받은 하늘의 아들, 즉 天子만이 천문학을 연구하고 실용할 수 있었다. 천문학은 하늘의 명을 읽고 이를 백성에게 전달하는 도구였기에, 천문학의 실행은 천자의 의무이기도 했다. 이론적으로 천문학은 중국의 천자에게만 실행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학술, 나아가 위정자가 정치를 위해 독점하는 학술, 즉 국가천문학(state astronomy)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런 천문학이 당연히 실행됐고 그 역사는 중국 천문학사가 됐다. 

그런데 이러한 천문학을 한국 왕조에서 실행할 때, 한국 왕조의 특수한 지위와 지리적 위치가 천문학의 실행에 개입되면서 한국 천문학사의 독특성이 생겨났다. 먼저 천자만이 실행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동아시아 천문학에 부여된 근본이념은 한국 왕조가 중국 왕조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으면서 한국 왕조에서 천문학의 실행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게 됐다. 한국 왕조의 위정자는 천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독자적으로 천문학을 실행하는 것이 금지됐다. 삼국시대 이후 19세기 말까지 중국의 왕조와 조공책봉의 관계를 맺어왔던 한국 왕조의 천문학, 즉 한국의 천문학은 애초부터 조공국의 천문학으로 제약됐던 것이다. 

하지만 전통시대의 동아시아에서 천문학이 실행된 것은 이와 같은 정치성에 더하여 이보다 더 강한 실용적 목적과 천문학의 역할 때문이었다. 천문학은 연월일시의 시간규범을 수립하고 이것을 공동체가 사용하게 함으로써 공동체를 통합하고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학술이었다. 나아가 동아시아의 천문학은 천체현상을 포함한 자연의 현상이 알려주는 의미를 해석해 위정자의 올바른 정치 행위와 백성들의 올바른 행동 양식을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한마디로 천문학 없이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수준 높은 문화생활이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왕조에서는 조공책봉 관계가 강제하는 제약 속에서도 자국 내에서 독자적인 천문학을 실행할 필요가 있었고, 실행하고자 노력했으며,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실행했다. 한국 민족은 공동체로 존재하는 내내 스스로 천문학을 실행함으로써 동일한 시간규범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천문학을 실행한 역사가 한국 천문학사가 됐다. 

천문학을 실행할 수 없는 이념적 제약 속에서도 단절 없이 이뤄진 천문학의 실행, 이것이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이 지닌 독특하고도 근본적인 성격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천문학은 이론적 차원에서는 중국에서 형성된 천문학 지식을 수용하고 따르면서도 실행적 차원에서는 독자적인 실천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하는 천문학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천문학사에서 이론적 차원의 진보가 거의 보이지 않는 반면, 실행적 차원에서의 활동과 실천에서 중국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독특하고 가치 있는 역사가 생산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과장과 엄살을 섞어 말한다면, 나는 이 책에서 실로 죽을힘을 다해 고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의 역법사를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 이야기를 얽어놓기는 했지만, 이 책을 써보겠다고 결심했을 때에 지녔던 스스로의 포부와 그간에 가르침을 얻은 많은 선생님들의 기대 앞에서는 부끄러울 뿐이다. 특히 天文과 曆法이라는 동아시아 전통천문학을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 분야 가운데 천문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못한 것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일반 독자들의 기대는 충족할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는 한국의 역사 속의 천문학과 관련된 문화 전반을 포괄하는 서술이어야 보다 바람직한 한국 천문학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욕심만으로도 벌써 日暮途遠이지만, 앞으로 탐구를 계속해 현재의 부족을 메워나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스스로 목표 삼은 한국 천문학사의 완본을 만들어보고자 다짐한다. 

 

전용훈 한국학중앙연구원·과학사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니덤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를 지냈다. 한국천문학사 관련 연구 외에도 한국 과학사의 다양한 주제들을 탐구했다.  『물구나무 과학』, 『천문대 가는 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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