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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쌀 …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를 읽는 또 하나의 관점
욕망과 쌀 … 고도성장기 한국 사회를 읽는 또 하나의 관점
  •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연구소·과학사
  • 승인 2017.06.12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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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김태호 지음 | 들녘 | 350쪽 | 30,000원

 

육종학이란 사람이 원하는 품종을 만들어낸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학문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욕구와 의지가 육종학을 통해 쌀이라는 사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쌀은 다시 인간의 어떤 욕구와 의지를 자극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갔는지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것을 벼와 인간의 공진화(co-evolution)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쌀인가.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다. 벼와 쌀이라는 것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뒤부터 줄곧, 한국인은 그것을 모든 곡식 중 으뜸으로 쳤다. 그러나 쌀은 늘 모자랐기에 쌀을 배불리 먹기 위한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분투의 역사가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사에서는 이것을 주제로 삼아 본격적으로 연구한 것이 많지 않았다. 근대 이전의 전통 과학기술사에서는 농서의 편찬, 농업기술의 도입과 보급, 농업생산량의 변화 등을 다룬 연구들도 적지 않으나, 근대로 넘어와서는 농업은 경제사와 사회사에서 다루어 왔을 뿐 과학기술사의 영역에서는 소외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근대 한국 사회에서 농업의 위상이 지속적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에서 다른 주제들이 먼저 연구자와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서일 것이다. 

내가 과학사를 공부하러 대학원에 진학했던 1999년 무렵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는 막 태동하는 새로운 세부 분야였다. 한국의 과학사학계에서 서양과학사와 한국 전통과학사는 연구자 집단도 형성돼 있었고 연구 전통도 나름대로 확립돼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는 새 세대의 젊은 연구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연구에 뛰어든 1990년대 이후 비로소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았거나 잘못된 속설로만 알려져 있었던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의 진면목을 발굴해 내고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 제도의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이들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오늘날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었다. 나도 이러한 새로운 흐름에 많은 자극을 받고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를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박사학위논문 구상 중에 깨달은 연구 지평

그런데 박사학위논문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농학과 농업에 대한 과학기술사적 연구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연구자들뿐 아니라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의 잠재적 독자들도 ‘과학기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농학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이들은 “과학기술의 기반이 매우 취약했던 한국이 어떻게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품과 자동차 등을 만드는 나라가 됐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접근으로 쓰는 한국 근현대 과학기술사는 과거를 현재의 기준에서 취사선택하게 된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하여 현재의 성공에 이르게 됐는가”라는 서사가 되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기술(반도체, 휴대전화 등)이나, 현재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는 기관이나 기업(포항제철, 서울대, 카이스트 등)이나, 현재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들을 우선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역사란 현재와 소통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므로, 이런 연구들은 한국 과학기술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살아남아 성공한 것들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려낸 과거의 모습은 온전한 과거의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중요하게들 여기는 인물, 단체, 사건들이 과거에도 그만큼 중요했는가? 반대로, 과거에는 중요하게들 여겼던 인물, 단체, 사건들 중 지금은 존재감을 잃어버린 것들은 없는가? 

예를 들어 기능인력의 양성이나 발명 진흥운동 같은 주제들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과학기술 뉴스’에 포함하기에는 중요성이 떨어져 보일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기능올림픽의 종합우승이라든가 ‘전국민의 과학화운동’ 같은 사건들이 한국 과학기술의 성장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이러한 계기를 통해 한국 과학기술은 다음 세대의 도약을 위한 여러 층위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예컨대 1980~90년대 한국의 대학원에서 연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던 배경을 설명할 때, 흔히 1970~80년대에 유학 경험을 가진 과학기술자들이 귀국해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에서 멈추곤 한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세운상가 등지에서 선진 기계와 부품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쌓고 물건을 만들어 내는 역량을 갖춘 숙련 노동자 계층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상아탑의 연구자들이 책에서 읽은 실험을 해 보려 해도 그것을 현실로 구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당대의 눈으로 고도성장기의 과학기술을 다시 본다면, 석·박사급 연구자들이 활동하던 대학과 연구소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세운상가나 금오공고 같은, 지금은 과학기술의 공간으로 선뜻 인정받지 못하는 장소들에도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고도성장기 농학 발전사를 탐구한 결실

이런 눈으로 1960~70년대 고도성장기를 다시 들여다보니 농학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오늘날에도 농학은 그 발전 수준에 비해 세간의 관심이 박하기는 하지만, 1960~70년대의 농학은 더 많은 관심과 더 높은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다. 특히 허문회 박사가 주도한 ‘통일벼’의 개발은 국제적으로 화제가 됐던 업적이었는데, 1960년대 후반의 한국 과학기술계 전체를 통틀어 보아도 이 정도의 위상을 확보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 나아가 통일벼를 선봉에 세워 진행했던 ‘한국의 녹색혁명’은 쌀의 자급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1970년대 중후반 한국에 살던 모든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나는 1960~70년대 벼 육종학의 역사는 그것이 단순히 다른 분야보다 덜 연구됐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시기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상을 대표할 수 있는 독보적인 성취를 거둔 분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서 고도성장기 농학의 발전사를 탐구해 온 작은 결실이다. 『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는 통일벼를 앞세운 ‘한국의 녹색혁명’을 중심으로 그 전후 시기를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근현대 한국 사회에서 벼 품종의 역사를 정리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인간의 욕구가 벼의 품종 개량 과정에 반영돼 새로운 벼를 만들어 냈는지, 반대로 새로운 벼는 인간의 인식과 행동을 어떻게 규율해 나갔는지, 그리고 그 한계는 어디까지였는지를 분석한다. 시기적으로는 일제강점기에 식민권력이 ‘과학적 영농’이라는 개념을 수입하면서 한국의 벼 품종이 어떻게 바뀌기 시작했는지부터 시작해, 광복 후 1960년대까지 일본 육종학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의 육종가들이 어떤 모색을 했는지를 거쳐, 1970년대에 통일벼라는 독자적인 품종을 통해 한국 농학의 새로운 기원을 세워 낼 때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통일벼가 퇴장한 1980년대 이후에는 벼 품종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이 다시 어떻게 달라졌으며, 그것이 소비자들의 식생활에 어떻게 반영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육종학이란 사람이 원하는 품종을 만들어낸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학문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욕구와 의지가 육종학을 통해 쌀이라는 사물에 어떻게 반영됐는지,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쌀은 다시 인간의 어떤 욕구와 의지를 자극하여 새로운 방향으로 역사를 이끌어갔는지를 추적하고자 했다. 이것을 벼와 인간의 공진화(co-evolution)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벼와 쌀이란 문헌이 아니지만 인간의 흔적을 담고 있으므로 사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역사의 행위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사물이 담고 있는 역사적 역할을 발견하고(또는 사물에게도 역사적 역할을 부여하고) 새로운 각도에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것도 과학기술사가 역사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일 것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책이지만, 고도성장기의 한국 사회를 읽어내는 또 하나의 관점으로서 동료 연구자들에게 이 책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김태호 전북대 한국과학문명연구소·과학사
서울대 대학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과학기술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과학기술을 중심에 놓고 한글타자기, 기능올림픽, 식품영양학 등 다양한 주제를 발굴, 그 역사를 논문으로 정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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