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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최초로 학제간 대화 모색한 학술지, 그 40년의 무게
인문사회 최초로 학제간 대화 모색한 학술지, 그 40년의 무게
  •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경영학
  • 승인 2017.06.12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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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과인식> 창간 40돌 학술대회를 마치고

지난달 27일(토) ‘인간의 한계’라는 주제로 숙명여대에서 <현상과인식> 창간 40돌 기념 학술대회를 치르면서, 이 학술지가 우리 학계에서 가지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가끔 “왜 <현상과인식> 인가?”하고 질문할 때가 있다. <현상과인식>은 1977년 4월에 창간됐다. 목적은 뚜렷했다. 인간과 사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사회현상 분석의 이론적 틀을 재정립함으로써 올바른 인간인식과 사회인식을 하자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경영학의 오세철, 사회학의 박영신, 영문학의 임철규, 철학의 박동환, 정치학의 진덕규 등 5인이 창간동인이 돼 우리 인문사회과학계 최초의 학제 간 학술지인 「<현상과인식>이 창간됐다. 지금은 학제 간 연구, 융복합 연구라는 용어들을 빈번하게 들을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학제 간 연구라는 시도는 학계에서 아주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과인식>의 선구자적 시도는 오늘날 학계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학제 간 연구의 시초를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현상과인식>의 초기 사람들

내가 <현상과인식>을 만난 것은 1979년이었다. 10여년 만에 미국에서 들어와 오세철과 박 영신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됐다. 오세철은 노스웨스턴대에서 리더십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받은 학자다. 한국 교수 중 조직행동 분야에서 맨 처음 학위를 받았다. 박영신은 예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버클리대서 학위를 한 사회학자다. 두 교수 주변엔 늘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 사람들 모두 <현상과인식>에 관심을 갖고 힘을 모았다. <다이달로스(Daedalus)>와 같은 학술지가 한국에도 필요하다는 박영신의 생각에 힘입은 바 큰 <현상과인식>의 창간은 그러나 여러 어려운 시기를 맞기도 했다. 1997년 IMF 위기는 기존 연 4회 발간하던 학술지를 연 3회로 줄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연세대 송자 총장은 우리의 형편을 듣고 <현상과인식>을 연세대에 달라고 제의까지 했다. 하지만 박영신은 출판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평생 후원이사를 모집했고, 140여명이 호응해 도움을 줌으로서 어려운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세계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그 꿈이 나 자신 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고, 다른사람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 될 때 세상은 진정 살만한 곳으로 변화 될 것이다.                 나는 <현상과인식>을 통해 오늘도 이 꿈을 꾸고있다. 

 

1988년 4월 2일자 경향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떴다. “김 학수 교수가 편집장을 맡아 봄 호를 내기 위해 동분서주. 외국학문의 소개 및 토대 마련에 중점을 두던 편집 방침을 바꾸어 한국사회현실을 정면에서 이론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고 편집진에 국민대 최종욱(철학), 한양대 양창삼(경영학), 경상대 김중섭(사회학), 연세대 김용학(사회학) 4명을 영입했다.” 시인이자 <뿌리 깊은 나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강창민이 떠나고 최종욱과 김용학이 동참한 것이다. 최종욱은 마르크스와 하버마스에 관련된 논문을 열심히 발표했다. 김용학은 박영신 교수 제자로 시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연세대 교수로 왔다. 지금 연세대 총장으로 있다. 김학수 교수는 2017년 <현상과인식>을 내는 한국인문사회과학회 회장이 된다. 

학술 계간지 <현상과인식>이 학회의 학회지로 옷을 바꿔 입게 된 것은 1998년 12월이었다. 이것은 교육부의 지침에 따른 교수 업적 평가와 연관이 있다. 교수 평가가 실시되면서 업적 평가에 논문이 주요 평가 지수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학회의 초대 회장은 박영신이었다. 이어 서울대의 최대권, 아주대의 이화수, 한양대의 양창삼, 숙명여대의 김철, 감신대의 이원규, 숭실대의 박 정신, 경상대의 김중섭, 평택대의 신현수가 회장이 됐다. 

40년간 1천250여편 논문 소개 … ‘한글중심’ 글쓰기 지켜

<현상과인식>은 1977년부터 2016년까지 130호를 펴냈고, 총 논문 수만도 1천250편이 넘는다. 문학, 사학, 철학, 종교학, 교육학, 심리학, 경제학, 정치학, 법학, 사회학 등 인문,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폭넓게 학술논문을 게재했으며, 이 논문들은 교수는 물론 대학원생들의 연구와 논문 작성에 귀중한 자료로 사용돼 왔다. 창간 이후 대학에서 특강을 하면 <현상과인식>을 읽었다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으며, 지금은 데이터베이스로 처리돼 인터넷을 통해 세계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매체에서도 학술회의 보도를 해주었고, 뜻을 같이 한 기업들도 출연을 해주기도 했다. 

이처럼 우리 사회와 학문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현상과인식>의 학술지로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순수학술논문을 위주로 수준 높은 학문성을 유지코자 했다. 우리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심층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현상과인식>은 다양한 방면의 우리 사회 이슈를 이론적 관심에 기대어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일에 매진했다. 둘째, 인문사회과학의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학제성(學際性)의 원칙을 강조했다. 사회 현상이 단일 학문에 의해 재단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상과인식>은 처음부터 학문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존중하고 학문 간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구성원의 다양성과 학제 간 토론 활성화에 초점을 뒀다. 셋째, 왜곡된 주체성과 매판적 외국이론 도입 모두에 비판 정신을 견지했다. 외국의 이론에 대한 관심과 성찰을 강조하되, 우리의 상황은 우리의 생각과 이론에 터하여 접근돼야 함을 강조했다. 넷째, 우리말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한글 쓰기를 고수했다. 우리 학문은 우리말과 글에 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아래, 그 동안 외국의 학술지와 한자 중심의 글쓰기에 기반해 이루어진 편집 체계를 한글 중심으로 전면 개편하고 이러한 원칙들을 현재에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현상과인식>은 무엇이었는가? <현상과인식>이 나에게 처음 선사한 것은 경건한 지적 나눔이다. 경건하다는 것은 그만큼 진지했다는 말이다. 그들은 서로를 존중했고 인격적으로 대했다. 비록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비난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일리를 믿고 이해해 주었다. 벽에는 항상 앞면과 뒷면이 있는 법이다. 지적 나눔의 자리는 언제나 열린 교실이 돼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깨어줌으로써 나는 비로소 학문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알게 됐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과인식>은 학문의 길잡이가 됐다.

지적인 나눔으로만 끝난다면 그것은 공허한 것일 수 있다. 그것이 나의 삶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쪽으로 길을 만들어갔다. 나는 평소 헨리 나우웬의 삶을 본받고자 했다. 그는 55세에 교수직을 그만 두고 토론토에 있는 라르쉐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10년 동안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담이라는 청년을 돌보았다. 깨우고, 씻기고, 먹이는 일이다. 아담이 전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그와 함께 했다. 그 일을 10년 하고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그 일을 하면서 교수 때보다 더 많은 글을 남겼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경건한 지적 나눔의 의미

내가 55세가 됐을 때 스스로 “지금 떠날 수 있는가”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기회를 주셨다. 55세에 연변과기대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신 것이다. 그곳은 임금을 주는 곳이 아니다. 자비량으로 해결해야 한다. 여비도, 숙식비도, 그 어느 것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감사하게 생활하는 곳이 그곳이다. 그곳에서 난 여러 직책을 맡으며 하늘의 기쁨을 맛보았다. 나는 한양대에 이어 그곳에서 제2의 정년을 맞았다.

나에게 <현상과인식>은 계속 이어져 나갈 꿈이다. 앞으로 수천 개, 수만 개의 논문이 발표되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영향을 주면서 이 작은 반도가 결코 작지 않음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세계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그 꿈이 나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하고, 다른 사람에게 꿈을 심어주는 것이 될 때 세상은 진정 살만한 곳으로 변화될 것이다. 나는 <현상과인식>을 통해 오늘도 이 꿈을 꾸고 있다. 

 

양창삼 한양대 명예교수·경영학
서울대를 거쳐 연세대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한국사회이론학회 회장, 한국경영사학회 이사,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부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양대 ERICA캠퍼스 경상대학 경영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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