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圖像學 정립한 20세기 예술사학의 태두 … 예술 속에 내재된 의미 탐구
圖像學 정립한 20세기 예술사학의 태두 … 예술 속에 내재된 의미 탐구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6.07 1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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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9. 에르빈 파노프스키
▲ 만년의 파노크스키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무용, 건축 등 미국예술은 기본적으로 유럽의 전통과 형식위에 발전했다. 그 결정적인 가교 역할을 담당한 것이 1930년대 독일 망명 예술인들이다. 일례로 미스 반 데어 로에, 발터 그로피우스, 미국으로 이주한 바우하우스 전통이 그러한 역사를 증거로 제시한다. 건축사적 맥락에서 1920년대 유럽에서 시작한 ‘현대 고전 건축’ 조류인 ‘인터내셔널 스타일 (International Style)’이 독일 망명 건축가들에 의해 미국에 전수되고 꽃을 피워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 그 흔적이다. 건축에서도 그랬지만 음악에서는 쇤베르크와 힌데미트, 미술에서는 막스 에른스트가 대표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데 아무리 신대륙이라고 해도 그들만의 예술이 없었겠는가. 그들만의 전통도 없이 유럽에서만 배웠겠는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럽인들만의 이민국가가 아니다. 문화적으로 우쭐함을 감추지 않는 독일·프랑스·영국인들만의 이주민 국가가 아니다. 미국예술이 유럽의 전범을 따랐다든가, 독일 망명지식인에 의해 미국예술이 발달했다는 등등의 단정적인 증거대기 뒤에는 ‘유럽 중심주의(Eurocentrism)’가 강하게 버티고 있다. 미국 음악이라고 하면 오케스트라나 실내악 혹은 고전적인 유럽 스타일의 성악보다도 ‘재즈’나 ‘블루스’, ‘컨트리 뮤직’이나 ‘로큰롤’이 우선 떠오른다. 굳이 유럽을 앞장세우지 않더라도 미국에는 미국 특유의, 혹은 아프리카-아메리카 식 등등의 미국화된 미국문화도 도처에 깔려있다.

하지만 예술을 학문화시킨 ‘예술사학’은 그 경우가 좀 다르다. 미국의 예술사학은 유럽전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학문성 때문이다. 신대륙에서는 지금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문화적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는 지닐 수 없는 바로 그 학문성이다. 자연은 누구나 접촉할 수 있고 예술은 한두 명의 천재에 의해 순간적으로도 창조될 수 있다. 하지만, 유구한 문화적 전통이나 뿌리 깊은 학문은 인간소외의 변증법적 반성과정이나 ‘가르치고 배우고 논쟁하고 사색하는’ 제도라는 틀과 엄격한 수련을 통해서만이 태동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유럽은 잠바티스타 비코, 장 자크 루소, 헤르더, 헤겔, 부르크하르트, 니체,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문화학을 정립한 학문의 땅이다. 그들에 의해 ‘새로운 학문’, ‘문화비판’, ‘문화사’, ‘문화철학’, ‘경험 문화학’, ‘문화정치’, ‘문화분석’ 등의 개념이 논쟁을 하며 체계화돼 있는 곳이다.

미국에서 ‘예술학’, 혹은 ‘예술사학’이 학문이라는 실체로 부상하기에는 20세기가 시작 된지 얼마 동안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종전과는 눈에 띄게 다르게 미술품상들 숫자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예술시장이 학문으로 탈바꿈하는 전 단계 풍경이었다. 1918년 유럽대륙에서 전장의 포성이 멎고 평화의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으니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였다. 그 시기 미국인들은 미술품, 즉 예술품이 상품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예술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구로 시작한 것이다. 분위기가 그렇게 되자 예술사에 대한 논의는 광범위하고도 공공연히, 그리고 일반대중에게 까지도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양질의 예술품을 소지하는 것은 곧 부의 축적을 의미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1930년대 후반이 됐을 때 미국인들의 예술사에 대한 관심이 최고도로 올라갔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바로 이 시점에 독일에서 예술사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온 것이었다.

▲ 그의 '베스트 프렌드'였던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와 함께 찍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1934년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가 뉴욕대학교 객원교수를 거쳐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교수로 부임했다. 圖像學(Iconography)을 발전시킨 20세기의 저명한 예술사학자, 바로 그 파노프스키였다. 발터 프리트랜더(Walter Friedlaender, 1873~1966)가 파노프스키의 도움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거쳐 역시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 교수로 부임했다. 게오르크 슈바르첸스키(Georg Swarzenski, 1876~1957)는 1938년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에, 오스트리아 출신은 에른스트 크리스(Ernst Kris, 1900~1957)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1938년 빈에서 영국으로 망명한 다음 캐나다를 거쳐 1940년 망명대학인 ‘뉴 스쿨 포 소셜 리서치’에 교수로 부임했다. 쉽게 눈에 띄는 저명한 망명 예술사학자들의 면면이다.

독일 망명객들로 북적이는 신설 미국 대학 예술사학과

이들 이외에도 신설된 미국의 대학교 예술사학과는 독일에서 온 망명객들로 북적였다. 이들이 신임 교수로 충당된 이유는 단지 미국인 전문가들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빈자리가 남아돌아 독일 망명객이 우연히 운 좋게 교수가 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에서 온 학자들은 미국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방법론을 겸비했고, 그동안 미국에서 무시했던 분야를 체계적으로 두루 섭렵한 높은 학식의 예술학 전공자들이었다. 실력을 갖춘 학자들이었다. 미국 측에서 볼 때 눈이 확 뜨이는 경외의 순간이었다. 미국의 대학이 도상학, 고전 고대예술, 바로크, 16~17세기 예술, 건축사 등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학문으로 정립한 것은 전적으로 독일 망명 예술사학자들의 업적이었다. 독일 망명 예술사학자들은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무시당했던 혹은 미처 깨닫지 못한 대상과 주제를 설정해 강의를 개설하고 세미나를 통해 학생들과 토론하고 논문을 작성하게 했다. 부의 축적에 대한 관심이 전통적인 학문으로 변용돼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예술사에 대한 엄청난 연구 열기와 대학에서의 학과 팽창은 두개의 사건, 혹은 두개의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중앙 유럽에서 예술사학 전문가가 결원이 생긴 것이고, 둘째 미국 쪽에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독일 망명 지식인들 입장에서 설명해 보면, 독일 망명 예술사학자들은 망명지 미국 대학에서 대접받으며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지위가 확보되고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독일에서 못지않게 대단한 학문적 업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경우에 꼭 부합하는 인물이 에르빈 파노프스키다. 파노프스키는 1933년 함부르크대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해 1934년 프린스턴 ‘고등과학연구소’의 교수가 됐고, 그 주변에 대다수의 독일 망명 예술사학자들이 모인 덕에 이들을 근간으로 뉴욕대학교에 ‘미술학부(Institute of Fine Arts)’를 창설할 수 있었다. 이제 망명의 출발지였던 1933년의 독일로 돌아가 보기로 하자.

▲ 그의 도상학 관련 저작

독일 망명객을 설명하는 방식은 출발지에서 시작할 수도 있지만, 예술사학자들처럼 망명지 현실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망명의 원인과 상관없이 이미 새로운 고향, 삶의 터전이 된 망명지에서 위치와 명성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명인사의 출신과 계보를 찾아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파노프스키는 1933년 유대인이란 이유로 ‘공무원 신분 원상회복법’에 의거해 함부르크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이미 1931~32년에 미국의 뉴욕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했고, 두 번째 미국 방문으로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강연과 박사과정 학생들의 논문을 지도하고 있던 중 독일에서 교수직 박탈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러자 망명도 준비하고, 자신의 제자 3명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해 졸업시키기 위해 잠시 독일 함부르크로 돌아왔었다. 그러던 중 1934년 뉴욕대학교로부터 3학기 간 객원교수 제의를 받자 미국망명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다른 분야에 비해 예술사학자들은 요란하게 망명을 떠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정치적 성향이나 학문성보다는 단지 유대인이라는 혈통이 망명의 원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예술사학’이란 학문은 정치성과는 좀 거리가 먼, 예를 들면 극단적인 공산주의나 사회민주주의 사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파노프스키를 위시해 발터 프리트랜더, 게오르크 슈바르첸스키, 율리우스 헬트,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에른스트 크리스, 니콜라우스 페브스너, 로자 샤피레 등이 망명을 떠난 저명 예술사학자들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유대인들이었다.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이들 중 정치적 색깔을 나타냈다면 로자 샤피레 정도인데, 그녀는 1916년 이다 데멜과 공동으로 ‘독일 미술후원 영성동맹’을 창립했고, 1933년부터 1939년까지 ‘함부르크 유대인 예술동맹’에서 활약한 정도다. 그녀 역시 1939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노버의 부유한 집 출신 … 김나지움에서 라틴어 습득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하노버의 부유한 집 맏아들로 태어났다. 외가는 100년 넘게 하노버에 정착한 유대인 가족이었고, 아버지는 오버슐레지엔 출신으로 상인이었다. 외삼촌은 하노버에 은행을 소유한 재력가였다. 하노버에서 잠시 김나지움(인문계 고등학교)을 다닌 후 베를린으로 옮겨 명문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독일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했다는 것은 일류고등학교라는 것 이외에 라틴어를 습득했다는 자만심이 은근히 포함돼 있다. 라틴어를 비롯한 고전 고대에 대한 지식은 곧 바로 ‘예술사’ 연구의 전제조건이다. 1910년부터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시작했지만 곧 바로 예술사, 역사, 철학을 전공하며 예술사 연구에 몰두했다. 예술사에 몰두하게 된 동기는 빌헬름 푀게(Wilhelm V?ge, 1868~1952) 교수의 독일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강의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 도상학의 창시자인 바르부르크를 기념한 바르부르크 아카이브

1914년 ‘알브레히트 뒤러의 이론적 예술론(뒤러의 미학)’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20년에는 함부르크대학교에서 교수자격논문이 통과됐다. 논문주제는 ‘라파엘과 관련 된 미켈란젤로의 형성원리’였다. 교수자격논문 통과와 함께 함부르크대학교의 전임강사가 됐고, 1927년 정식교수로 취임했다. 1920년대에 예술학 방법론에 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들 중에는 칸트의 철학과 빈의 예술사가인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에 관한 주제가 눈에 띄는데, 이는 칸트의 미학과 리겔의 예술학 이론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파노프스키는 리겔이 개척한 ‘예술의욕(Kunstwollen)’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1920년에 논문 「예술의욕의 개념」을 발표한다. ‘예술의욕’은 리글에 의해 최초로 정립된 개념으로 ‘예술가, 각 시대, 사회, 민족은 어떠한 특정한 예술적인 문제에 대해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와 충동을 지니고 있다’는 이론이다. 1925년에 발표된 논문 「예술사와 예술이론의 관계」에서 파노프스키는 리겔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이어받고 있다. 더 나아가 신칸트 범주로서의 예술의욕을 예술사에 도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예술품은 칸트식의 ‘시간’과 ‘공간’ 사이의 눈금 위에 정렬된다는 것이다.

파노프스키는 함부르크대학교의 교수가 되자 바르부르크 도서관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한다.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9)는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고’, ‘마음은 함부르크인’이고, ‘영혼은 피렌체인’이라고 자신을 자각한 도상해석학의 창시자이며 현대적인 시각문화 연구 및 이미지론 분야의 토대를 구축한 독일의 저명한 예술사학자다. 하여간 파노프스키는 아비 바르부르크, 프릿츠 작슬(Fritz Saxl, 1890~1948),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와 함부르크 학파를 결성한다. 그들 이외에도 함부르크학파의 주요 학자는 게르트루트 빙, 윌리엄 S. 헥셔, 에드가 빈트가 있다. 바르부르크 사후에는 에른스트 H. 곰브리치도 합류한다. 바르부르크의 가장 큰 동생은 고전 고대 연구를 위한 도서관을 함부르크에 세운다. 작슬과 빙이 이 도서관을 이끌었다. 에른스트 카시러는 파노프스키와 함께 함부르크학파를 결성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파노프스키의 스승이었다. 파노프스키는 카시러에게서 ‘상징적 형식’ 연구방법론을 배웠다.

파노프스키의 학문적 관심사는 무엇보다도 예술 속에 내재하는 의미에 관한 연구였다. 서술된 내용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수용이 그의 관심사였다. 즉 역사적 맥락속의 이해와 그로 인한 예술의 형식과 동기가 연구주제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 도상학이라고 명명된 3단계 모델을 이론을 발전시켰다. 3단계 이론이란 ‘도상학 이전의 묘사’, ‘도상학적 분석’, ‘도상학적 해설’을 말한다.

▲ 바르부르크 도서관 실내 모습

그렇다면 도대체 ‘예술학’이란, 혹은 ‘예술사학’이란 무엇인가. 서양에서 ‘예술학’이란 대략 ‘예술사’와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학에서 ‘예술사’를 가르치고 배우는 학과가 ‘예술사학과’이고,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예술사학자’들이다. 대학교에서 ‘예술사학과’를 최초로 만든 학자는 1799년 독일 괴팅겐대학교의 요한 도미니크 피오릴로(Johann Dominik Fiorillo, 1748~1821) 교수다. 이탈리아 혈통으로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생해,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후 독일에서 교수가 된 미술선생이다. 피오릴로는 대학교에서 최초로 예술사를 강의하며 학생들을 지도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술사학과는 19세기 시작과 더불어 태동했고, 학과가 대학에 설치된 후 19세기 내내 특정 예술품인 「라오콘 군상」과 드레스덴의 ‘홀바인논쟁’ 등을 통해 학문적 토대를 쌓아가며 발전을 거듭해갔다.

‘예술사’, 나치 정권 장악하면서 쇠퇴의 길로

▲ 바르부르크가 살던 집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까지 ‘예술사’는 어떠한 학문분야 보다도 대학교에서 학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확보하고 권위와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예술사는 단순히 예술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정신사와 문학이론 형성까지 기여를 했다. 예를 들면 문학사기술의 한 근거를 대주었고, 문학해석 방법론을 제공했다. 세상을 보는 눈을 가르쳤고, 시대를 분류하고 예견하는 눈을 틔워 주었다. 학문의 꽃을 피운 ‘예술사’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다수의 학파까지 형성하고 있었다. ‘베를린학파’, ‘빈학파’, ‘뮌헨학파’, ‘함부르크학파’가 대표적이었다. 빈학파는 특별히 ‘記錄學’으로, 뮌헨학파는 ‘형식주의’, 함부르크학파는 ‘도상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렇게 개화했던 ‘예술사학’은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옛날의 명성과는 상관없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독일에서는 1933년 이후 ‘공무원 신분 원상회복법’의 철퇴를 맞으며 유대인 예술사학자들이 떠났고, 오스트리아에서는 1938년 독일과 합병되자 유대인들이 떠났다. 학자만 떠난 것이 아니라 연구소도, 도서관도 망명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도서관도 귀향하지 않았다.

망명객들이 떠난 자리를 나치에 열성적으로 동조하는 예술사학자들이 교수가 되어 자리 잡고 앉았다. 나치가 제창한 ‘제3제국’이 그들의 예술사학적 연구대상이 됐다. 「라오콘 군상」과 드레스덴의 ‘홀바인논쟁’이 벌어졌던 대학의 강단은 사라지고 체제를 옹호하고 시대를 대변하는 학문이 자리를 잡았다. 뮌헨과 베를린대학교의 빌헬름 핀더(Wilhelm Pinder, 1878~1947) 교수, 빈대학교의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 1896~984) 교수, 괴팅겐대학교의 페르시 에른스트 슈람(Percy Ernst Schramm, 1894~1970) 교수가 대표적인 그들이다.

독일 예술사학자들의 망명으로 인해 독일 밖 외국에는 중요한 예술사연구소들이 속속 탄생했다. 영국의 ‘바르부르크 연구소’, ‘코톨드 미술연구소(Courtauld Institute)’, 미국의 프린스턴대학교, 컬럼비아대학교, 버클리대학교, 스탠포드대학교의 예술사연구소들이 망명객으로 인해 탄생한 연구기관들이다. 망명 발생으로 인해 독일의 학문이 세계 문화발전에 기여를 한 것일까, 아니면 독일의 연구가 침체된 것일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직도 예술사학 강국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이다. 예술사학의 경우 부정적인 면, 긍정적인 면이 겹쳐서 떠올라 어떻게 결론을 맺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할 말은 많이 남아있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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