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의 두 얼굴 … “민족·여성 차별주의에 맞서 명예 되찾겠다”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의 두 얼굴 … “민족·여성 차별주의에 맞서 명예 되찾겠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27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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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 교수 인터뷰

 

만일 내가 싸우지 않으면 대다수의 정년보장교수들의 입지가 위협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소신과 양심에 따른 연구 활동마저 위축돼, 결국 우리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싸워야하고, 또 이겨야만 한다.

 

김미경 교수가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교수로 자리 잡은 이후 지난 12여년 동안 그의 연구주제나 신문기고문의 내용들, 그리고 우익 인사인 히로시마 평화연구소장과의 불화 등을 빌미로 대학 측은 호시탐탐 그를 쫓아내려고 골몰했다. 2006년 제1기 아베정권이 시작됐을 때부터 최근까지 우경화돼가고 있는 일본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던 김 교수는 신안보법안, 평화헌법개정, 특히 한일위안부 합의에 관해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 우경화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연쇄효과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고활동을 벌였다. 그는 이게 ‘학자들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인식했다. 그런 그가 히로시마시립대학엔 눈엣가시처럼 비쳐졌을 것이다. 

발단은 의외의 곳에서 불거졌다. 김 교수가 2014년 대학 장기 연수프로그램으로 원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가기로 했지만, 한국국제교류재단 방한 연구자로 한국학중앙연구원(3월~8월)에서 연구한 뒤, 서울대 아시아센터(9월~12월)에 초빙교수로 머무른 걸 문제 삼았던 것. 김 교수는 소속기관장인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장의 자필 서명 추천서를 받아 한국에 나왔지만, 소장은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모르쇠’로 일관했고 대학 측은 김 교수가 소장의 서명을 위조했다고 몰아붙였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김 교수가 영국으로 가지 않고 한국에서 연구 활동을 한 일이 ‘사기’라는 게 대학 측의 ‘징계 해고’ 논리다.

‘우익’ 시장·평화연구소장의 오래된 폭력

도대체 히로시마시립대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 문제는 일본사회의 우경화라는 큰 맥락을 떠나면 설명되지 않는다.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는 1998년, 지금도 일본 지역사회에서 존경받고 있는 진보적 인물인 히라오카 당시 히로시마시장이 세계평화에 공헌하는 히로시마를 지향하며 만든 연구소다. 20세기의 비극인 원자폭탄 투하로 인한 대량살상의 비참함을 경험한 히로시마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평화연구를 지원하겠다는 설립 취지가 있었다. 문제는 일본 중앙정부와 사회전체가 우경화되기 시작하면서다. 일본 핵무장 등을 주장하는 학자들을 심기위해 ‘정지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히로시마에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2012년 제2차 아베정권이 등장한 뒤, 비슷한 시기에 아베와 노선을 같이하는 자민당 소속 마쓰이가 히로시마 시장에 당선됐다. 대학은 ‘악명 높은’ 우익 인사인 키카와를 히로시마 평화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 키카와가 소장으로 오기 전 ‘소장직’은 공석 상태로 있었다. 키카와의 전면 등장은 김 교수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김 교수가 들은 바에 의하면 히로시마 시장 마쓰이나 평화연구소장 키카와는 ‘일본회의’라는 천황제 신토주의를 신봉하는 극우단체와 연결돼 있다. 키카와의 부친은 만주군 8단 소속 장교였으며, 고베대 교원시절 자위대와 같이 수업을 진행한 일로 쫓겨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사고를 가진 인물이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2013년 4월, 키카와가 평화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김 교수를 협박하고 차별을 일삼기 시작했다. “사소하게는 바라보는 시선과 언동부터, 심하게는 거의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소장실로 불러서는 한국과 한국인을 ‘배은망덕한 민족’,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계속해온 나라’ 등의 비판과 함께 일본의 조잡하고 저급한 주간지 기사 등을 보여주며 ‘공부 똑바로 하라’는 등의 모욕을 가했다.” 그렇게 말하는 김 교수의 눈가에는 촉촉하게 눈물이 맺혔다. 

“대학은 연구자로서 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김미경이란 ‘조센진 여자’가 열심히 연구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거다. 거기다가 그들이 보기에 연구주제도 영토분쟁, 위안부같이 민감한 사안이라 ‘그냥’ 싫었던 것으로 밖에 달리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내 논문이 만약 편파적이었다거나 사안을 정치화해서 분석한 것이었다면, 유명국제저널들에 과연 실릴 수 있었을까. 그간 내가 발표한 한일관계 연구논문들은 모두 국제 저널에 실렸다. 그런데도 대학 측은 연구의 내용이나 질과 상관없이 ‘조센진 여자’라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봤다. 특히 징계해고라는 방식을 택한 것은 타 대학에서의 재취업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겠다는 의도다. 학자로서 끝을 내겠다는 거다.”

그를 괴롭힌 건 비단 대학 내 우익 라인만이 아니었다. 때때로 우익들은 직접 메일을 보내 ‘(한국으로) 돌아가라’, ‘형편없는 니 나라 걱정이나 해라’, ‘일본 국민들의 세금으로 월급받는 주제에 입 닥치고 있으라’ 등 협박을 일삼았다.  2011년 영유권 관련 연구를 진행할 때는 대학의 사무직 직원들로부터 어이없게도 도둑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조용히 버텼다. 

결국 끝도 없이 악화만 되던 차별과 억압을 견디다 못한 김 교수는 2016년 3월 키카와 소장을 상대로 ‘하라스멘트(harassment) 보고서’를 대학에 제출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더 정교해진 차별이었다. 보고서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 ‘절대로 발설하지 말 것’을 강요한 히로시마시립대는 키카와 소장을 비호하기 위해 1년 동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히로시마시립대가 이 하라스멘토 보고서에 예민하게 반응한 건 이유가 있다. 대학 측과 히로시마시측이 연계돼 있다. 이들이 ‘하라스멘트’에 대해 합당한 책임을 진다면 키카와는 물러나야만 하고, 그건 그를 임명한 대학의 책임과 그를 추천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의회의 인맥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를 윽박지르고 협박하려 했다.” 김교수가 졸지에 해고를 당한 이후 경황이 없이 서울로 거처를 옮긴 뒤에야 대학은 1년이 넘도록 방치해둔 이 ‘하라스멘트 보고서’를 철회할 심경의 변화가 있는지를 은근히 물어왔다. 참으로 비열하다. 히로시마시립대는 이렇게 한국인 여교수, 그것도 독신의 여성 학자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김 교수는 부산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조지아대에서 사회학·여성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1994, 1995), 1998년에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무성 공공외교 전문위원(2000~2004), 미국 오레건주 포플랜드주립대 풀브라이트 교수(2004~2005)를 지냈다.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조교수로 일본 대학에 자리 잡은 건 2005년 10월이다. 2008년 10월부터는 ‘정년보장교수’가 됐다. 

학회 활동도 활발했다. 그의 무대는 좁은 히로시마를 벗어나 있었다. 대표적인 것만 나열해보면, △미국 맥팔랜드(McFarland) 출판사 North Korean Review 편집장(SSCI 저널, 2012-13) △영국 세이지(Sage) 출판사 Memory Studies Journal 한국인의 기억 특별호 편집장(SSCI, SCOPUS 저널, 2013) △미국 국제학회(ISA) 인권분과 프로그램체어(2013) △재미한국정치연구회(AKPS, www.akps.org) 회장(2016-18) △세계정치학회(IPSA, www.ipsa.org) 인권분과 회장(2016-18) △미국정치학회(APSA, www.apsanet.org)·미국국제학회(ISA, www.isanet.org) 인권분과 회원대표(2017-18) 등, 그의 이력은 빽빽하다. 

연금보험 깨서 서울서 독방 생활 시작 … 5월말부터 소송 진행

그가 집필에 관여한 책도 녹록치 않다. 『동북아시아의 기억(Northeast Asia’s Difficult Past: Essays in Collective Memory)』(공저, 영국 Palgrave Macmillan 출판사, 2010), 『인권의 안보화: 동아시아의 탈북자 (Securitization of Human Rights: North Korean Refugees in East Asia)』(미국 Praeger 출판사, 2012), 『동아시아의 기억과 화해(Routledge Handbook of Memory and Reconciliation in East Asia)』(공저, 영국 Routledge 출판사, 2015. 그는 이 책으로 ‘2016년 우수출판도서 교육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침몰한 세월호, 난파하는 대한민국(Challenges of Modernization and Governance in South Korea: The Sinking of the Sewol and Its Causes)』(공저, 영국Palgrave Macmillan 출판사, 2017. 도서출판 한울, 2017)등이 대표적이다.

거의 빈손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서울로 거처를 옮긴 김 교수는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지금 길고 고독한 싸움에 나섰다. 세계정치학회 인권분과 회장으로 활발하게 학술활동을 해온 그는 이달 말부터 히로시마시립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할 예정이다. 교원지위에 관한 행정소송도 계획 중이다.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내적 문화를 지탱하는 한 축은 ‘수치심의 문화’다. 즉, 일반적으로 만에 하나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학내 규정에 따라 조용히 처벌하는 것이 관례다. “수치라는 감정에 민감한 문화적 맥락에서는 더더욱 조직의 대외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 위계질서에 따라 연대책임을 지고 내부에서 정리하는 편인데, 히로시마시립대의 경우는 정반대의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히로시마시립대는 정년보장교수를 ‘사기’라는 파렴치한 형사범죄로 고소, 구금시킨 뒤 구속 당일 총장이 직접 기자회견을 자청하기도 했으며, 검찰의 불기소 결정에 불구하고 ‘징계해고’를 강행했다. 악의적인 여론몰이다. 

“체포 소식이 당일 NHK 뉴스로 떴고, 이를 본 분들은 ‘마치 원폭 맞은 것 같았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라고 김 교수는 체포 이후 학계의 반응을 설명했다. 그는 고소와 체포가 일종의 ‘맛보이기’, 즉 ‘순순히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이 꼴 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시범 케이스’였다고 말했다. “교수회의 등에서 소신 발언을 하는 교수들이 거의 다 사라졌고, 서로 만나도 어떤 정보가 어디로 샐지 몰라 눈을 맞추지도, 대화도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그의 소송이 중요한 이유는 차별주의에 대한 저항이란 점도 놓칠 수 없지만, 외적 압력으로부터 사상의 자유를 지켜내는 학문 본질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12년 동안 재직해왔던 히로시마시립대의 차별적인 해고 조치는 그의 말대로 학문의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다. 그는 ‘정년보장교수’ 신분이었다. 그의 말대로 대학이 교수들에게 ‘정년보장’을 해주는 것은, 단순한 노후 보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조건 속에서도 학문적 양식과 신념, 학문의 자유를 지향하면서 소신 있게 학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장치다. 

“정년보장제도가 있기 때문에 학자들이 정치적인 맥락과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고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이번 사건이 중요한 함의를 가지는 큰 이유는 히로시마시립대의 수법이 전례로 악용될 여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정년보장 교수를 해고하기 위해 일단은 없는 죄를 만들고, 고소라는 수단을 통해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매장시킨 뒤, 다시는 저항할 수 없게 짓밟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근래 일본 학계에 이런 전례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욱 ‘길고 지루한’, 현해탄을 사이에 둔 이 싸움에 비장하게 임할 생각이다. “만일 내가 싸우지 않으면 대다수의 정년보장교수들의 입지가 위협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은 소신과 양심에 따른 연구 활동마저 위축돼, 결국 우리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싸워야하고, 또 이겨야만 한다.” 

김미경 교수는 이번 소송이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8년 정도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모든 것을 빼앗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내가 ‘조센진 여자’이고, 그래서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본에서 처음 배웠다. 인권과 학문의 자유를 연구해온 나 스스로가 싸우지 않고 도망가면서 터키나 헝가리 등지에서 탄압을 받고 계신 분들께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당당하라고, 절대 꺾이지 말라고 조언할 수 있겠는가.”

그는 소송에서 이겨 ‘복직’ 되더라도 ‘그 곳’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나는 1963년생, 82학번이다. 남은 시간을 학자로서 스스로의 이론도 정립하고 후학들에게 뭔가를 남기는 작업에 집중하고 싶다. 내게 남겨진 한정된 시간을 의미 있게 쓰고 싶다.”

김 교수는 당분간은 해약한 두 개의 연금보험으로 생활을 꾸려나갈 계획이다. 서울 광화문 근처에 독방을 구했다. 가녀린 그는 마치 김수영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그 ‘풀잎’처럼 보였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먼저 누웠지만, 그는 다시 먼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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