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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를 가진 지능'에 관한 논의가 유효하려면?
'신체를 가진 지능'에 관한 논의가 유효하려면?
  • 교수신문
  • 승인 2017.05.23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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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연구회·한국인지과학회·서강대철학연구소 2017 봄학술대회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관’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격돌 이후 인공지능(AI)에 관한 관심과 논의가 부쩍 늘었다. 인공지능은 단순히 과학영역의 이슈가 아니다. 오랫동안 인간을 탐색해온 철학 분야도 바쁘긴 마찬가지다. 지난달 29일(토) 서강대에서 열린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관’은 인공지능에 쏠리는 관심 속에서 인간 정체성을 다시금 질문한 자리였다. 

철학연구회의 최신한 회장은 “알파고의 등장에서 확인됐듯 인공지능의 진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그 영향은 기계를 넘어서 인간 고유의 영역을 넘보는 상태로 진입한 듯하다”라고 지적하면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기조강연 「다시 묻는 인간다움의 요건」(손동현, 대전대 석좌교수)을 시작으로 이날 발표된 논문은 「뇌 발달과 지능의 진화」(이경민, 서울대), 「Robots with free will」(장병탁, 서울대), 「인공지능의 ‘환경’과 ‘상황’: 현상학적 고찰」(김태희, 건국대),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나는 무엇인가?’」(고인석, 인하대) 등이다. 각 논문에 대한 논평은 각각 김태경(KAIST), 유정(서경대), 유제광(서울대), 천연득(이화여대)이 맡았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인공지능의 ‘환경’과 ‘상황’: 현상학적 고찰」과,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나는 무엇인가?’」의 결론 부분과 주요 논평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인공지능의 ‘환경’과 ‘상황’: 현상학적 고찰」(김태희, 건국대)
이제까지 우리는 환경과 상황 개념의 구분에 근거해 EAI의 목표와 과제를 규정하고자 시도했다. 우리는 환경과 상황이 기본적으로 모두 주체유관 맥락임을 확인하면서도, 과제유관 미시 맥락인 상황과 과제무관 거시 맥락인 환경을 구별하여 논의할 것을 제안했고, 현상학적 분석에 기초해 상황과 환경이 가장 근본적 차원에서 주체의 키네스테제 및 키네스테제 훈습에 의해 구성됨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제 이러한 논의가 EAI에 있어 지니는 함의를 살펴보면서, 발표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EAI는 우선 과제유관 맥락인 상황에서의 정확하고 빠른 행동을 할 수 있는 AI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AI가 진정으로 자율적인 AI이기 위해서는 단지 상황에서의 이러한 행동이 자율적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자율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EAI의 다음 목표는 환경에 자율적으로 적응하는 AI를 구현하는 것이 돼야 한다. 우리는 현상학적 분석에 기초해, 상황에서의 정확하고 빠른 행동을 위해서는 AI에 키네스테제, 즉 감각-운동 지식이 구현돼야 하며, 나아가 환경에의 적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AI에 이러한 키네스테제의 훈습이 가능해야 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환경 구별은 AI 설계 과제에 어떠한 함의를 지니는가. EAI에서는 시간척도(time scale) 구별에 의거해 AI 설계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구별한다. 1) ‘지금 여기’-상태 지향(state-oriented), 2) 개체발달-학습과 발달, 3) 계통발달-진화.

우리의 상황/환경 구별과 관련하여 1)은 상황 개념에, 2)와 3)은 환경 개념에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보다 중요한 점은, 상황 구성과 환경 구성의 관계다. 다시 말해, 환경에의 적응을 통한 발달은 바로 과제유관 맥락으로서의 ‘상황을 규정하는 능력’까지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 키네스테제는 다양한 감각-운동 연결들의 체계로 이뤄져 있다. 이러한 키네스테제 체계의 훈습은 곧 어떠한 상황이 주어질 때 그에 유관한 특정 키네스테제를 가동시켜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숙련 대처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이른바 프레임 문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다. 프레임 문제는 “인지 체계가 맥락의존적 유관성에 적응적으로 민감한 방식으로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는가?”를 설명하는 문제인데, 이는 맥락내 프레임 문제와 맥락간 프레임 문제로 구별할 수 있다. 맥락내 프레임 문제가 “순수 기계적 체계가 어떻게 적절하고 유연하고 유동적 행위를 하나의 맥락 내에서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정의된다면, 맥락간 프레임 문제는 “순수 기계적 체계가, 새로운 맥락들에의 적응이 끝이 열려있고 다수의 가능한 맥락들이 미규정적일 때, 어떻게 이러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맥락내 프레임 문제는 하나의 상황에서 키네스테제가 어떻게 작동해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라면, 맥락간 프레임 문제는 하나의 환경에서 하나의 과제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다시 말해 하나의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라는 문제 및 이에 상응하여 어떠한 키네스테제를 가동하는가라는 문제다.

고전적 AI에서처럼 프레임 문제를 고차인지의 문제로 규정해 하향식으로 접근해서는 이 문제가 해결되기 어렵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되고 있으며, 따라서 EAI에서는 이를 감각운동 차원의 문제로 규정해 상향식으로 접근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환경과 상황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은 이를 암묵지로서 작동하는 키네스테제의 가동과 그 훈습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며, 특히 키네스테제 훈습을 통해 환경에의 적응이 가능한 AI가 구현되는 것이 특정 상황에서 키네스테제를 유능하게 작동하는 진정한 AI를 구현하는 토대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러한 일반적 차원의 논의가 구체적으로 EAI 연구에 어떻게 적용돼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더 상론할 수 없으며, 향후 공동의 과제로 제안하고자 한다.

▷논평(유제광, 서울대)
신체를 가진 체화된 지능의 논의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목적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인지체계를 갖추기 위함이어야 한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인간의 인지적 영역은 인공지능에 의해 상당부분 대체될 것으로 예상되며, 당분간 또는 아주 오래 남아 있을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인지적 능력은 이제 ‘자유의지’ 정도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는 인공지능의 목적은 무엇일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이론이 인공지능의 발전에 도움을 주어 왔으나 앞으로의 발전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춘 존재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방식으로 그 지능을 달성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보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 ‘나는 무엇인가?’」(고인석, 인하대)
우리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물을 때가 자주 있다. “저게 뭐죠?” 그만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런 물음을 묻게 되는 경우도 있다. “당신은 도대체 뭐죠?” 그것보다 더 드물게 일어날 법한 일이지만, 이런 물음을 묻게 되기도 한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은 나라는 관념의 존재 덕분에 비로소 가능해진다. 나의 관념이 없이는 이 물음이 성립하지 않는다. ‘나’의 관념은 이 물음의 성립 근거이면서 그것의 발생적 원천이기도 하다(아마도 이 물음은 나의 관념을 가지는 존재자의 운명 같은 것이다).

‘나’라는 관념이 없는 존재자가 이 물음을 묻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발생 가능하다. 그와 같은 현상을 불가능한 것이라고 금할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마치 광화문을 단 한 번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도 몸소 경험한 일이 없는 자가 광화문에 대한 추억을 서술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가 그렇게 떠들게 된 연원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그의 서술을 ‘그의 추억’에 대한 서술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마땅하다.

앞 절의 논의로부터, 우리는 똑똑한 로봇청소기의 ‘알아서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수고’가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 로봇청소기가 행위주체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2011년 ‘제퍼디!’의 역대급 우승자들을 가볍게 누른 IBM 왓슨이나 최근 의료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는 왓슨 포 온콜로지나 이세돌을 바둑으로 이긴 알파고나 시험운행이지만 세계 곳곳의 도로를 누비고 있는 구글의 무인자동차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평가다.

그러나 인공지능 기술의 어느 발달 단계에서 자아의 관념이 발현될 수 있지는 않을까? 글쎄… 발표자의 답은 ‘알 수 없다’이다. 그리고 의견 한 마디를 덧붙이면서 발표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논의의 취지가 철학적 사변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에 관한 것인 한, 알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비철학적인 태도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공동체가 가진 자원과 시간을 기술의 발전에 어떻게 배분하고 투입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서슬 시퍼런 중요한 문제다. 철학이 사회의 그러한 메타 물음에 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도 묻는다. “난 도대체 뭐지? 나에게 주어진 삶으로 도대체 무얼 할 거지?”

▷논평(천연득, 이화여대)
행위주체에 관한 설명은 인간이라는 높은 기준을 적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개념능력과 의도가 행위성의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에서, 행위성의 표본은 인간에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인간만이 개념을 가지고 행위하는 존재인가? 충분한 식별 능력을 가지고 목적지향적 행동을 하는 동물의 경우는 어떤가? 동물의 목적지향적 행동도 그 개체 안에서 단순히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 개체가 하는 일로 볼 수 있다면, 왜 그것을 ‘행위’라고 부르는 안 되는가? 아마도 행위주체는 책임지는 주체이기 때문일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동물 행위자나 인공 행위자에게도 일정한 범위 내의 책임을 물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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