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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타계후 10년만에 순금같은 '진주'의 의미를 읽어냈다
스승 타계후 10년만에 순금같은 '진주'의 의미를 읽어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23 13: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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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인연, 한 수필가를 기리는 평전의 의미_ 『피천득 평전』 정정호 지음, 시와진실, 408쪽, 29,000원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 같이 보드랍다. (……) 신록을 바라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 「오월」 중에서
오월에 왔다가 오월에 간 사람, 琴兒 皮千得(1910.5.29.~2007.5.25.). 교과서에 실려서 더욱 오래도록 알려졌던 수필 「인연」의 사람. 그에 대한 문학계의 평가가 늘 공에 맞춰졌던 것은 아니다. 한계를 지적한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평가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다음과 같은 대목 위에 놓이는 게 마땅할 것 같다. 

‘순수 정신의 영원한 사표’를 읽는 평전

“한국 현대문학 100년사를 통해 피천득은 가장 순수한 문학인의 한 분일 것이다. 진정한 순수란 역사와 현실적인 시련과 고통을 육화시킨 후에라야 이를 수 있는 인간정신의 가장 고귀한 미학적 정상의 영역에 속한다. 피천득의 문학세계는 너무나 투명한 순수성으로 이뤄져 있어 감히 어떤 불순물도 침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순수 정신의 영원한 사표다.”

여기 다시 한 권의 평전이 세상에 나왔다. 「‘나이를 잃은 영원한 소년’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피천득 평전』(시와진실 刊)이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수필’의 오솔길을 홀로 걸어갔던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응시한 접근이란 점에서, 다른 하나는 금아의 문학세계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제한했던 기존의 독법에서 벗어나, 일종의 ‘최소저항주의로서의 글쓰기’라는 측면을 적확하게 복원해냈다는 점에서다. 세 번째는 평전의 저자가 금아의 제자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일종의 思父曲에 해당한다. 이것은 한국 학계의 어떤 학맥이 형성한 조용한 울림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앞서 전체적으로 응시했다는 것은, 생애와 문학, 사상을 삼각형으로 해서 그것을 일원론적으로 소환해냈다는 뜻이다. ‘최소저항주의로서의 글쓰기’는 그의 문학세계가 ‘산호와 진주’로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의미 해석과 연결된다. 

평전의 저자인 정정호 중앙대 명예교수(영문학)가 금아 평전을 가슴에 담은 것은 아마도 추측컨대 1996년쯤일 것이다. 당시 저자는 안식년을 맞아 호주 브리즈번에 머물고 있었다. 그의 수중에 금아의 시집 『생명』, 수필집 『인연』, 번역 시집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과 『내가 사랑하는 시』가 들려 있었다. 브리즈번의 그리피스대 방문 교수로 갔던 저자는 그해 11월 한여름 어느날 금아가 그렇게 ‘소원’하던 ‘산호’와 ‘진주’가 널려 있는 호주 동해안의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찾았다. 어떤 靈感이 그를 스쳐갔다. 

“수평선을 따라 멀리 나가기는 했지만 ‘파도는 언제나 거세고 바다 밑은 무’서워 산호를 직접 따거나 진주조개를 잡지는 못했다. 그러나 유리로 된 배 밑바닥에 엎드려 꿈꾸듯 코발트색 청정바다 속에 끊임없이 펼쳐져 있는 진기한 산호초들, 기이한 물고기들, 그리고 예쁜 조가비들을 아주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탄성이 울려 퍼졌다. ‘그 현란한 산호 밭은 이미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거야!’ ‘아아, 금아 선생의 시와 수필 자체가 나의 산호 밭이요, 진주조개들이었구나!’ 작은 조가비와 예쁜 조약돌을 몇 개 주웠다. 금아 선생의 시와 수필처럼 언젠가 이 조가비와 조약돌들이 산호와 진주가 되기를 꿈꾸었다.”

스승에게 매혹당한 제자의 집요한 글쓰기

그러니까 이번 평전이 세상에 나온 건, 마치 진주조개가 상처를 통해 진주를 키우듯 그렇게 20년 시간의 사투를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도 그에게 스승의 평전을 집필하라고 짐을 지우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가 금아의 문학세계에 매료되지 않고서는, 좀더 나아가 스승이 품었던 내면세계에 매혹당하지 않았다면, 이번 평전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금아의 그 무엇이 저자를 사로잡았을까.

 

“그는 ‘고상한 사유와 평범한 생활’(워즈워스)이라는 삶의 수칙이 있었다. 나라를 잃었다가 해방 이후 분단된 척박한 민족의 현실, 그리고 개인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순수한 동심’, ‘고매한 서정성’, ‘위대한 정신’을 간직하고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며 살았다. 한국문학사에서 매우 희귀한 일이다. 우리는 피천득의 시 문집의 제목이었던 ‘산호’와 ‘진주’를 흔히 그의 삶과 문학의 요체로 본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 같다. 피천득의 기나긴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는 결국 ‘지혜’이기 때문이다.”

산호와 진주를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잠수복, 스노쿨, 산소통으로 무장하고 깊은 바다로 들어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금아 문학의 간결성과 서정성의 표면 아래 숨겨진 심층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깊고 넓게 사유하며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금아 문학의 아름다운 노래 속에서 시대와 민족의 고뇌를 보고 신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여기서 저자가 명명한 독법이 흥미롭다. 그는 금아의 시와 수필을 서정문학의 정수로 본다. “서정의 목적은 독자들의 공감이며 주변부 타자들에 대한 ‘공감적 상상력’이다. 서정의 결과는 독자를 위로해 비루한 시대에 우리네 삶을 치유하는 능력이다.” 저자가 제시한 ‘공감적 상상력’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열쇠말로, 금아 문학세계의 심층으로 안내하는 지도가 된다.  

모든 평전은 평전의 주체와 관찰 서술자의 은밀한 욕망이 만나는 접점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스승에게 매료된, 현직에서 은퇴한 영문학자는 왜 이 평전을 썼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이 평전을 쓰기 시작했냐고.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게 대답한다. “모든 읽기는 자신과 잘 맞는 시인, 작가를 찾는 과정이다. 결국 나는 나의 삶과 문학의 표본을 피천득에게서 찾았던가? 그렇다. 피천득 선생님은 내 삶의 스승이며 내 문학의 영웅이다. 모든 글쓰기는 ‘자서전적’이라는 말도 있다. 모든 비평은 독자나 평론가 자신의 욕망과 이념을 투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결국 이 평전은 필자 자신의 평전이기도 하다.”  

평전의 형식도 눈여겨볼만 하다. 이 평전은, 저자가 밝혔듯,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의 『영국시인전(The Lives of English Poets)』을 염두에 두고 그 체계를 따랐다. 생애-사상-작품론 분석 및 비평 3부로 구성된 존슨의 평전 형식을 가져와 3부 구성 방식을 짰다. 물론 정 교수는 생애-문학-사상으로 구성을 조금 변경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한 게 읽기엔 편해보인다. 대부분의 평전이 텍스트 전개의 시간축을 따라 읽어가야 하는 것과 달리, 이 평전은 독자가 원하는 부분부터 자유롭게 읽어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그러나 생애-문학-사상을 각각 독립시키기보다 시간축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생애와 문학, 사상이 서로 연결되고 증폭되고 심화하는 과정을 좇아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저자에 의하면, 피천득에게 문학적 영향을 끼친 이들은 도연명, 황진이, 셰익스피어다. 특히 도연명의 전원에 내포된 理想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금아는 도연명의 『歸田園居』를 번역하기도 했다. “젊어서부터 속세에 맞는 바 없고 / 성품은 본래 산을 사랑하였다 / 도시에 잘못 떨어져 / 삼십 년이 가버렸다 ……”(「전원으로 돌아와서」 제1수) 평전 앞머리 추천사를 쓴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 대목을 가리켜, “정 교수가 인용하는 「전원으로 돌아와서―제1수」라는 제목의 피 선생의 번역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린다. 물론 선생이 오래 사셨던 곳이 전원은 아니었지만, 마음으로 그리워하던 삶의 방식이 그러한 것이었다”라고 읽어냈다.

기존 평가와 달리 ‘최소저항주의 글쓰기’ 면모 읽어내

이 평전에 새로움이 있다면 무엇일까. 금아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넘어서는, 혹은 해석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이번 평전에 담겼을까. 원로 평론가 김우창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피 선생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 탐구·탐색하는 일이 정정호 교수의 평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건 틀림없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대목. “신변적 소재론에 갇혀있는 피천득 수필은 ‘개인적 안락한 울타리를 넘어서 사회적, 현실적 문제에 진지한 관심’과 ‘지성인으로서의 심오의 사상’이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언뜻 보기에는 맞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피천득 수필 표면에 속아 넘어가 수필의 단순성과 서정성에 숨겨진 정치적 무의식을 간과하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지적은 유의미하게 읽힌다. 

분명 이러한 해석은 금아 스스로가 밝힌 ‘문학의 뿌리’를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내 문학의 뿌리』(2005)에서 금아가 언급한 대목을 보면, 20세가 되던 해인 1930년에 짤막한 시를 써서 <신동아>에 발표했고, 그 이후로도 몇 년 동안 시를 써서 신문 잡지에 발표하다가 중단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것은 솔직히 말해서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내 나름의 소극적 저항이었다. 그때의 내 심정은, 나라를 일제하에 빼앗겼는데 시는 써서 무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해방이 되던 때까지 나는 절필을 하였고, 금강산 등지에 은거하면서 佛子가 되려고도 했다.”

저자는 이 대목에 착안, 금아가 젊은 시절 예이츠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 훗날 자신을 가리켜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싸우지 못함을 한탄했으며, 훌륭한 시인은 반독재, 반제국주의에 앞장서야 한다고 대담에서 말했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즉, ‘삶 속에서의 소극적 저항’이라는 글쓰기의 심층이 금아 문학에 깊게 놓여있다는 사실을 복권해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금아가 말한 ‘진주’는 역사의 깊은 바닥에서 상처입고 자라나는, 한나 아렌트가 어디선가 지적했던 바로 그 ‘진주’의 의미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정정호 교수의 『피천득 평전』은 그런 진주 캐기로 가는 한 개 징검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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