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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실은 눈물에 있다.
삶의 진실은 눈물에 있다.
  • 나간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 승인 2017.05.2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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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나간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지금 광주는 5·18기념행사들로 가득하다. 규모가 큰 행사는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서 17일 저녁에 열리는 전야제, 18일 망월동의 기념식, 21일 시민의 날 행사, 27일의 부활제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밖에 개별 단체들의 행사가 있다. 행사위원회로부터 지원받는 행사가 대개 50사례를 넘어서고 있으나, 지원 없이 거행되는 행사들도 많을 것으로 추정한다.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학생 문화예술 및 종교단체, 5월단체, 지역단체들이 각각 독자적으로 1980년 5월의 기억을 재현한다.

행사의 내용은 다양하다. 사회운동단체들의 행사는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와 시위형태로 표현된다. 문화예술단체들은 공연과 전시 및 발표회를, 연구단체들은 학술대회나 세미나를 갖는다. 마을을 포함한 지역단체들은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이웃사랑의 집단행동을 기획한다.

광주에 특유한 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 등의 5월단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다양한 자선활동과 사회봉사를 실천한다. 5·18기념재단에서 주도하는 광주아시아포럼 및 광주인권상 등은 국제행사로서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 행사들은 대체로 5월 한 달 동안 이어진다.

이와 같이 많은 행사들이 장기간 지속되는 사례는 발견하기 어렵다. 1790년대 초의 프랑스혁명 기념제는 전국 각지의 혁명 전사들이 거리행진으로 파리에 집결해 거행됐고, 국가주도의 축제였으니까 그 규모나 지속기간 및 동원인력이 더 방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국내의 사례에서는 마산의 3·15기념행사가 비교적 다양한 활동을 여러 시일에 걸쳐 역사성 있게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5·18기념행사가 처음부터 이와 같이 다양한 활동으로 장기간 지속된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으로 전남대에 부임했던 1981년의 광주항쟁 1주기 추모제는 아프고 슬프고 초라했다. 경찰과 정보기관원 등이 망월동에 이르는 길목을 차단해 통제하니까, 일부 청년들은 산비탈을 넘고 숲을 헤쳐 숨어들어서 참여하기도 했다.

살아남은 자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 다수의 젊은이들은 무시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열사들이 잠든 망월묘역을 배회하곤 했다. 시내 거리에는 최루탄 연기 속에 끓어오르는 시민의 분노가 눈물의 바다를 이뤘다. 1984년 추모제 때 망월묘역이 처음으로 개방됐다. 서울에서 백기완, 김근태 님 등 활동가들이 참배해 통곡했다.

그 이후 5·18기념행사는 급속히 성장했다. 5·18항쟁의 정당성을 쟁취한 1988년 5월에는 도청 광장에 10만 민중이 운집하는 혁명축제가 됐다. 광주항쟁이 5월 27일에 장렬하게 무너진 이후 20년을 이어오며 거행된 재현행위는 초기엔 분노어린 저항과 투쟁의 형태로, 후기에는 감격의 축제로 그 형태가 변화돼 왔다. 이 5월운동의 역사에 김의기 학생열사로 시작하는 20여 열사의 눈물과 혼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2017년 망월동 기념식은 가장 감동적인 역사를 만들었다. 대통령이 현장에서 쏟아내는 연설에 1만여 참가자 거의 모두의 눈이 젖어들었다. 옆자리에 할머니의 통곡소리가 가슴에 울려왔다.

만 명이 넘는 참가자들을 함께 눈물짓게 하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삶과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는 여기에서 광주공동체가 최근의 우리 역사에서 보여준 고도의 집중성과 뜨거운 혁명성을 본다. 아마도 그것의 실체는 지난 세월 속에 내면에 쌓아 온 눈물의 결정이 아니겠는가. 모든 눈물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역시 삶의 진실은 눈물에 있는 것 같다.

 

 

나간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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