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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론적 경험론을 이끄는 ‘근본 직관’ … 형이상학적 평면을 만드는 논리는 무엇일까?
초월론적 경험론을 이끄는 ‘근본 직관’ … 형이상학적 평면을 만드는 논리는 무엇일까?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22 15: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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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7강. 김상환 서울대 교수의 ‘들뢰즈와 철학의 귀환’

요즘 ‘귀환’이란 단어가 자주 호명되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의 면면을 분석한 국내 철학자들의 『스피노자의 귀환』에 이어, 지난 13일(토)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에서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4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일곱 번째 강연제목에도 ‘귀환’ 등장한다.
13일 진행된 김상환 교수의 강연 주제는 ‘들뢰즈와 철학의 귀환’이다.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1섹션 철학/사상 편의 일환이다. 김 교수는 서구의 양대 지적 전통인 경험론·관념론이라는 사고의 기초형태를 비판적으로 해명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패러다임 화두를 살펴보고 그것이 어떤 현재적 의미가 있는지 짚었다.
김 교수는 구조주의 전후의 현대 철학 사조를 동아시아의 문맥에서 재해석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2012년부터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 프로그램의 패러다임-독립연구단에서 과학과 인문 예술 융합의 기초가 될 새로운 지식 패러다임과 방법론을 모색하는 3년간의 연구를 이끌었다. 저서로는 『사물의 분류와 지식의 탄생』(함께 엮음), 『공자의 생활난』 등이 있고,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등을 번역했다.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를 중심 텍스트로 진행된 강연 원문은 200자원고지 270매가 넘는 분량이다. 마지막 장인 「종합의 도식: 역동적 태극문」을 발췌했다.

자료·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잠재적 다양체를 구성하는 점(완결된 규정)과 관계(상호적 규정)들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관계들을 뒷받침할 어떤 규정 가능한 요소들(미분소들, 계열들)이 있어야 한다. 초월론적 차원은 이 요소들이 대변하는 규정 가능성의 형성과 더불어 열리기 시작한다. 들뢰즈는 칸트에 의해 시작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핵심을 정확히 규정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논리치의 발견에서 찾는다. 규정과 미규정이라는 두 가지 가치와 구별되는 제3의 가치가 규정 가능성이다.

아이온의 직선 규정 가능성은 스토아가 발견한 ‘형이상학적 표면’이나 칸트가 발견한 초월론적 차원과 맞물리는 가치다. 표면은 물자체의 깊이와 현상계의 높이 사이를 지나는 초월론적 공간이다. 규정 가능성이라는 제3의 가치는 위상학적 상상력 속에서는 초월론적 공간과 맞물리지만, 시간론적 구도에서는 아이온의 시간과 맞물린다. 아이온의 시간이란 구조주의가 가리키는 공시적 시간에 해당하며, 통시적 시간인 크로노스의 시간과 대립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자연의 운동에 종속된 형이하학적 시간이며, 여기서는 ‘실존하는 현재’가 중심이 된다. 아이온의 시간은 내용이 없는, 따라서 순수 형식적인 형이상학적 시간이며, 여기서는 ‘내속하는 과거와 미래’가 중심이다. 아이온의 시간은 ‘현재가 없는 시간’ 혹은 ‘현재가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되는 시간’이다.

칸트 철학에는 이런 종류의 시간이 모두 등장한다. 하나는 감성적 직관의 형식에 해당하는 시간인데, 이것은 통시적인 크로노스의 시간과 같다. 다른 하나는 도식이라는 ‘시간의 형식’인데, 이것은 공시적인 아이온의 시간과 같다. 칸트가 도식을 선험적 개념에 부합하는 시간의 형식이라 정의할 때 아이온의 시간을 발견했다. 그것은 내용도, 시제도 없는 순수한 ‘텅 빈 시간의 형식’이다. 칸트의 초월론적 전회가 아직도 미완의 계획으로 남아 있다면, 이는 두 가지 시간성을 혼동했다는 데 가장 커다란 이유가 있다. 경험적인 것을 중심으로 초월론적인 것을 복제한 결과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유사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완성하는 길은 아이온의 시간 속에 있는 초월론적 평면의 고유한 특성들을 규명하면서 시작돼야 한다.

이런 목적지로 가는 길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초월론적 장을 능동적인 의식의 장과 구별하는 일이다. 사르트르는 초월론적 장이 반성적 코기토 이전에, 자기를 의식하는 ‘나’ 이전에, 다시 말해서 통각의 등장 이전에 성립한다는 점을 밝히면서 이 문제에 결정적인 기여를 가져왔다. 초월론적 장은 미분화된 물자체의 깊이와 혼동되지 않는 것처럼 경험의 장과도, 그리고 거기에 속한 의식의 장과도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 비인격적이고 전-반성적인 초월론적 장이 ‘나’ 없는 지향성의 유희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았다. 자기의식적인 통각에 의해 통제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떤 의식의 흐름 속에서 형성되는 개체성의 영역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이 사르트르의 한계다. 초월론적 장은 비인격적인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개체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는 인격도, 반성도, 주체도, 개체도, 시제도 아직 없다. 있는 것은 어떤 독특성이나 특이성들, 전-개체적이고 비인격적인 점들뿐이다.

두 방향의 발생 여기서 다시 알의 비유로 돌아가자. 들뢰즈 철학에서 세계는 수정란처럼 세 층위로 이뤄져 있다. 먼저 수정란에서 태어난 닭은 일상적 경험의 질서(현상계)를 대변하고, 그래서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있다. 반면 닭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노른자는 현상계의 발생 근거인 초월론적 질서와 같고, 이것은 아이온의 시간 속에 있다. 마지막으로 원형질인 흰자는 강도적 질료인데, 이것이 초월론적 질서의 발생 원천이자 현상계 배후의 본체(누메나)에 해당한다.

주의해야 할 점은 강도적 질료가 한 종류가 아니라 두 종류라는 점이다. 하나는 초월론적 평면(잠재적 다양체)에 앞서 있고, 다른 하나는 그 평면 다음에 있다. 하나는 잠재적 다양체(의미, 문제, 점)를 생산하는 강도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체를 선택적으로 표현하는 순수 강도다. 즉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있던 강도는 아이온의 시간을 띠는 초월론적 평면을 낳는데, 이것이 동적 발생이라 불린다. 그러나 초월론적 평면에서 형성된 이념들은 다시 순수 강도에 의해 선택적으로 포섭되고, 여기서 이념들이 통시적 시간 속에서 현실화되는 정적 발생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발생은 양방향으로 이뤄진다. 발생은 원시적 강도에서 출발해 이념적 다양체의 생산으로 향하거나 이념적 다양체에서 출발해 순수 강도의 분화(개체화, 극화)로 향한다.

이렇게 방향이 반대인 두 가지 발생을 그림으로 표시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우리가 의지해왔던 2분적 태극문을 3분적 태극문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어느 유명 항공사의 마크를 닮은 역동적인 태극문을 생각해보자. 여기서 강도적 질료의 층위는 중앙에 위치한다. 중앙에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래쪽의 잠재성(이념적 다양체들)의 층위를 생산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아래쪽의 잠재성을 위쪽의 현실성의 층위로 뒤바꾸어놓는다. 이렇게 중앙에서 아래로, 그리고 다시 아래에서 중앙으로 향하는 양방향 운동에 의해 우리의 세 번째 도식은 프로펠러처럼 회전하게 된다.

세 가지 종합의 논리 강도가 중앙의 위치를 차지하는 이 역동적인 태극문은 종합의 도식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강도가 개입하는 두 가지 발생은 모두 세 가지 종합의 절차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즉 강도가 이념을 생산하는 절차도, 강도가 이념을 표현하는 절차도 모두 세 가지 종합의 논리를 따른다. 이 세 가지 종합의 과정이 우선 강도가 순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맨 처음에 있는 것은 순간적이고 비연속적인 자극으로서의 강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강도들이 첫 번째 종합에 의해 하나의 연속적인 계열을 이룬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것은 어떤 ‘짝지어진 차이’이다. 두 번째 종합에 의해 이질적인 계열들이 수렴하고, 여기서 생산되는 것은 ‘공명하는 차이’이다. 세 번째 종합에 의해 이질적인 계열들은 다시 발산하고, 이로 인한 강요된 운동에서 생산되는 것은 ‘긍정하는 차이’이다. 짝지어진 차이는 ‘거리’를 만들고, 공명하는 차이는 ‘계속되는 불일치’와 그로 인한 ‘깊이’를 낳으며, 긍정하는 차이는 ‘순수 강도’를 가져온다. 즉자적 차이에 해당하는 순수 강도는 ‘긍정’이라 불리는 세 번째 종합의 산물이다.

강도가 이념을 생산하는 것은―짝짓기와 공명에 이은―강요된 운동이 ‘긍정하는 차이’를 가져오지 못할 때다. 강요된 운동이 긍정에 성공하면 순수 강도가 생산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어떤 규정 가능성을 띤 아이온의 시간이 열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어떤 점진적 규정의 절차를 통해 이념이 발생한다. 이것은 숭고의 체험 속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그에 이은 반전에 견주어 볼 수 있다. 숭고는 자연의 거대한 크기를 감당하는 데 실패한 상상력이 감성의 한계를 넘어 부정적으로 현시되는 추상적 이념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분열적 코기토에 도달하는 국면이다. 그것은 인식 능력의 초월적 사용 속에서 ‘사유 속에 사유를 분만하는’ 생식적 코기토가 되기를 강요받는 단계다. 여기서 주체는 단지 규정 가능한 것으로 예감되는 어떤 무정형의 추상적 잠재력에 관계하기 위해 ‘이미지 없는 사유’로 빠져든다.

세 번째 종합이 성공해 순수 강도를 가져오면, 이 강도는 다시 이념을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강도가 잠재적 이념을 표현하는 과정은 역시 세 가지 종합의 단계를 밟는다. 먼저 짝짓기를 통해 잠재적 이념을 구성하는 점들이 육화되고, 이렇게 육화된 이상적인 점들은 연장이나 양적인 성질로 현실화된다. 다른 한편 공명을 통해 이념을 구성하는 관계들이 구체화되고, 그렇게 구체화된 관계들은 생물학적 種이나 질적 성질로 현실화된다. 마지막 강요된 운동을 통해 이념을 구성하는 미분적 요소들이 표현되지만, 그렇게 표현된 요소들은 뚜렷한 속성으로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다. 미시적인 어떤 것으로 남는 것이다.

이것이 잠재적 속성이 현실화되는 개체화의 단계들인데, 이것은 주체가 성립되는 단계들이기도 하다. 즉 짝짓기의 단계에서는 애벌레 주체가, 공명의 단계에서는 수동적인 자아가, 강요된 운동의 단계에서는 능동적인 ‘나’가 탄생한다. 애벌레 주체는 수축하는 응시와 상상의 주체이고, 수동적인 자아는 기억하는 주체이며, 능동적이 나는 순수 사유의 주체로서 이념들과 관계한다. 심리학적 체계에서 첫 번째 종합은 하비투스(습관)의 주체(이드)에 속하는 능력이고, 두 번째 종합은 므네모시네-에로스의 주체(나르키소스적인 자아)에 속하는 능력이며, 세 번째 종합은 타나토스의 주체(오이디푸스적인 나)에 속하는 능력이다. 이런 세 가지 수동적 종합은 시간이 구성되는 단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첫 번째 종합(응시와 상상)은 현재를 생산하고, 두 번째 종합은 순수 과거를 생산하며, 세 번째 종합은 미래를 생산한다.

『의미의 논리』에서는 초월론적 평면이 언어학적 구조로서 조직화되는 절차(분지화)가 중심 주제인데, 이것은 ‘이접적 종합(disjonction)’으로 설명된다. 그것은 서로 발산하는 이질적 계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종합이되 이항 대립적 질서로 전락할 위험을 지닌다. 그러나 이접적 종합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연접적 종합(conjonction)’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이질적 계열들이 서로 수렴하도록 하여 어떤 좌표를 생산하는 종합인데, 그렇게 생산된 좌표화는 어떤 닫힌 총체성으로 제한될 위험을 지닌다. 그러나 연접적 종합이 있기 위해서는 다시 선행의 조건이 따른다. 그것은 서로 다른 계열들이 먼저 생산돼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계열화를 가져오는 것은 이질적인 항들을 서로 엮고 압축하는 ‘연결적 종합(connection)’이고, 여기서의 위험은 계열화된 항들이 동질화될 가능성에 있다.

헤겔의 변증법이 언제나 정립, 반정립, 종합이라는 3단계의 리듬을 밟는 것처럼, 들뢰즈의 논리는 언제나 연결, 연접, 이접 혹은 연결, 이접, 공접이라는 3단계 종합의 리듬을 거친다. 연결적 종합은 항들을 압축해 단일한 계열들을 가져오고, 연접적 종합은 계열들 사이의 수렴과 좌표화를 생산하다. 그리고 마침내 이접적 종합은 계열들 사이의 발산과 탈-중심화를, 나아가 소통을 일으킨다. 발산적 거리를 지나는 소통을 가져와 도처에 끊임없는 분지화를 이뤄낸다. 이런 3단계 종합의 절차는 형이하학적 깊이에서 시작해 형이상학적 평면을 형성하면서 마무리된다. 그 마무리 단계가 바로 이접적 종합이고, 여기서 깊이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율적 진화의 논리를 갖춘 형이상학적 평면이 펼쳐진다. 언어학자들이 랑그니 구조니 하는 것은 바로 이 형이상학적 평면을 두고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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