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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의 예술과 철학이 남긴 현재적 유산은 무엇인가?
아도르노의 예술과 철학이 남긴 현재적 유산은 무엇인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22 15: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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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6강. 문광훈 충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의 ‘아도르노와 비판 이론’

지난 5월 6일(토) 여섯 번째 강연은 문광훈 충북대 교수(독어독문학과)의 ‘아도르노와 비판이론’으로 진행됐다. 문 교수는 이날 프린트물 90쪽이 넘는 분량을 과시할 정도로 아도르노를 깊이 응시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아도르노는 독일의 사회학자, 철학자, 피아니스트, 음악학자 그리고 작곡가였다. 그는 호르크하이머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학파 혹은 비판이론의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서구 비판이론의 대부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독문학’ 전공자인 문 교수는 이를 의식해서인지 깊고 또 깊게 아도르노의 비판이론을 읽어내는 데 집중했지만, 논의는 ‘심미적 이성과 예술’이란 자신의 테제 속으로 아도르노를 끌어들이는 모양새로 비쳐졌다. 현대사회의 불안성을 진단한 뒤, 심미적 이성의 비판적 잠재력을 분석하고, 이어 예술의 합리성을 거쳐 예술의 유토피아를 논의를 집중시켰다. 관련 부분을 발췌했다.

자료·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후기 자본주의의 조건에서는 결국 어설픈 교양(Halbbildung)이 객관적 정신으로 된다.”(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이후의 미학적 탐구와 그 실천은 어떻게 가능한가. 『심미적 이론』의 마지막에서 아도르노는 ‘심미적 행동’, ‘심미적 행동 방식’, ‘지배적 합리성’, ‘미메시스적 행동 방식’, ‘미메시스적 능력’과 같은 개념을 되풀이해 적으면서 오늘날의 미학이 무엇인지, 현대의 미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강조한다. 이 모든 것은 어디로 수렴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의 학문적 스펙트럼이 다채로운 만큼,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나의 결론은 아마도 다른 연구자들의 해석과 구분될 것이다.

나는 세 가지―첫째, 사고의 자기성찰적 면모, 둘째, 현실 비판의 급진성, 그리고 셋째, 심미적인 것의 윤리적 방식을 말하고 싶다. 이 세 가지가 아도르노의 예술과 철학이 남긴 현재적 유산이라고 본다. 이 세 가지를 아도르노의 텍스트 안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것은 새로운 개인과 사회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이 것을 세 가지-'전율의 능력'과 '생기의 복원' 그리고 '윤리적 실천의 행복한 길'로서의 심미적 방법으로 나눠 살펴보자

‘전율’의 능력

이 글의 맨 처음에 나는 이율배반에 대한 자의식이 아도르노의 사고에서 핵심적이며, 이 이율배반은 그의 학문에서뿐만 아니라 사실은 오늘날 사회의 가장 중요한 특성의 하나라고 언급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 인식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잘 안다. 현대적 현상의 거의 모든 것에는 착잡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하다.

그러나 이 같은 불편함과 당혹스러움을 아도르노는 외면하거나 타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런 혼란은 비판에서 불가결하다고 보았다. “차이와 비판에서 혼란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정당하게 여겨선 안 된다.” 불편함 대신 고통을 인위적으로 잊게 하고 손쉬운 즐거움을 주는 것이 바로 문화산업이었다. 문화산업은 값싼 위로를 통해 저항 의식을 꺾고 현실의 도피를 장려한다. 이것은 거짓 해방이다. 필요한 것은 부정성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부정적 사유의 재장전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철학과 예술의 주된 과제는 정신의 자기 분별력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있다. 혼란스러움과 당혹은 지금의 현실 인식에서 불가피하다. 아도르노가 ‘전율의 능력’을 강조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결국 심미적 태도는, 마치 맨 처음의 심미적 이미지가 소름 끼치게 하는 것처럼, 전율하는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뒤에 주관성으로 불리는 것은 전율의 눈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자, 동시에 전율 자체의 전개다. 주체는 전체적 속박에 대한 반응으로서 전율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살아 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 반응으로 주체는 속박을 초월한다. 전율 없는 의식은 사물화된 의식이다.”

주체는 전율의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또 전율을 심미적 경험에서 직접 겪음으로써 ‘전율의 눈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법을 배운다. 말하자면 사회화 과정에서 부과되는 반복 강제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익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전율의 능력은 삶의 능력―참으로 살아 있고 살아가는 것을 증거하는 능력이 된다. “전율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살아 있지 못하다.” “전율 없는 의식은 사물화된 의식이다.”

예술은 전율의 감수성으로 삶의 사물화에 반란을 꾀하고, 이 반란으로부터 자신의 진실을 입증한다.

생기의 복원

예술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자 하고, 소통 불가능한 것을 소통 가능한 무엇으로 변형시키면서 어떤 다른 것―손상되지 않고 지배되지 않는 것을 대변한다. 이것이 예술의 방식이고 심미적 사유의 방식이다. 예술은, 그리고 심미적 사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소통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할 수 있는 것으로 번역해냄으로써 사물화된 세계를 이겨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타파의 목적은 무엇일까.

앞에서 나는 새로운 주체와 사회를 언급했지만, 이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일상적인 목표가 없을까. 주체와 사회의 바른 형성을 하나로 잇는, 좀 더 소박한 실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의 생기를 복원하는’ 데 있지 않나 여겨진다. 예술의 목표는 무엇보다 돌처럼 굳어버린 삶과 작별하는 일이다. 즉 경직된 사고―사물화된 의식과의 거리 두기다. 사물화된 의식과 그 이데올로기적 현혹성을 타파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부정적 의식이고 비판 의식이며 반성 의식이다. 예술은 삶의 사물화와 주체의 타율화를 비판하면서 현실의 물신화를 돌아본다. 그러면서 더 나은 현실과 보다 건전한 세계를 꿈꾼다. 어떤 다른 것?‘저 너머’에 대한 의식은 이렇게 나온다.

결국 우리가 예술에서 배우고 심미적 경험에서 익혀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 주어진 삶을 삶답게, 그래서 생생하고 활기 있게 사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매일을 ‘늘 같은 상태(das Immergleiche)’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그래서 삶의 타고난 生氣를 복원하겠다는 의지다. 단 한 번뿐인 이 삶에서 타고난 생기를 잃지 않고 사는 것만큼, 타고난 생기를 잃지 않고 살려고 애쓰는 일만큼 인간에게 생의 소임이 있을 것인가. 주체의 개인적 해방이나 삶의 공동체적 화해도 바로 그런 나날의 생기로부터 생겨날 것이다. 이것은, 거듭 강조하건대, 아직 오지 않는 사회를 이뤄가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주체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새로운 주체와 좀 더 나은 사회에서 인류는 ‘조금 변해’ 있을 것이다. 예술 작품이란 ‘변화된 인류에 대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윤리적 실천의 행복한 길

예술의 무관심성-思無邪의 마음에는 알아차릴 수 없는 향수가 섞여 있다. 이 그리움과 갈망 없이 무엇을 추구할 수 있는가. 무엇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어도, 무엇이라고 확인하기는 힘들어도 예술에는 숨겨진 갈망이 자리한다. 이 갈망은 지금 여기와 저 너머, 나와 세계 사이에 자리한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은 현실과 그 너머 사이에 있다. 그렇다는 것은 내재성도 초월성도 확실히 고정될 수 없고, 고정시켜서도 안 된다는 뜻이 된다. 신학의 약속도 거듭되는 물음을 통과해야 비로소 진실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의 마지막에 이르러 “삶에 초월적인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는 것은 진정 살아 있는 것으로 경험될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예술에서의 반성적 운동은 강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자발적이고 자율적이다. 예술은 각각의 개별적 존재와 실존적 진실을 존중한다. 예술의 반성은 스스로 행해지는 것이기에 ‘즐거울’ 수 있고, 이 반성 속에서 더 나은 상태로 이행하기에 ‘윤리적’일 수 있다. 심미적 반성 속에서 우리는 윤리적 삶의 행복을 구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려움과 떨림이 수반된다.

긴장의 두려움과 떨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말하여, 자기비판의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이다. 자기성찰의 의지가 없다면, 예술은 거짓 위로가 되고, 철학은 그 자격을 상실할 것이다. 예술도 철학도 얼마나 자기로부터, 그러나 이 자기를 넘어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느냐에 대해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은 그 역사적 실패와 파국을 되짚어보면서 비로소 모색될 것이다. 예술에서 우리는 등가 교환의 사물화와 문화산업의 긍정 이데올로기를 넘어 지배되지 않은 어떤 것?훼손되지 않은 근원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아마도 자유는 사물화와 동일성의 이 같은 원리, 혹은 모든 환산화 메커니즘과 정당화의 강제 너머에 자리할 것이다. 삶의 참된 자유는 이윤과 환산과 도구의 세계 그 너머에 자리할 것이다. 이 자유의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어떤 다른 삶?‘다른 나’와 ‘다른 사람’, ‘다른 현실’과 ‘다른 미래’를 상상하고, 이 상상 속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선취해볼 수 있다. 그러한 시도는, 그것이 고통과 차별이 철폐되는 삶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정치적이고 윤리적이며 미학적인 탐색이다. 심미적 실천은 좀 더 나은 세계와 더 나은 관찰 그리고 더 나은 행동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정치윤리적 실천이다. 이것이 심미적인 것의 정치윤리적 잠재력이다. 심미적 방식은 인간이 자기 실존을 운용하는 특별한 종류의 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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