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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차기 서차기 책도 잘도 하우다예’
‘동차기 서차기 책도 잘도 하우다예’
  • 이연도 중앙대 교양대학·철학
  • 승인 2017.05.22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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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대학·철학
▲ 이연도 중앙대 교수

‘남해의 봄날’이라는 출판사가 있다. 이름만 들어도 시적 이미지가 절로 떠오르는 이 출판사는 경남 통영에 있는 지역출판사다. 올해 2월 이미경 작가의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란 그림과 산문이 곁들어진 책을 출간해 주목을 받았다.

“해가 저물고 동네가 어두워져도, 가게 앞은 전봇대 가로등 불빛으로 환하게 밝아, 저녁 먹고 나온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 한바탕 놀아대는 신나는 놀이터가 됐다. 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신발 감추기 등을 하며, 맘껏 뛰어놀고 머리 맞대고 달고나 해 먹던 최고의 놀이공간. 유년 시절 가장 즐거운 기억이 구멍가게에 숨어있다.” 1997년부터 ‘퇴촌 관음리 가게’를 시작으로 전국의 구멍가게를 찾아다니며 그린 펜화는 1970~80년대 과거의 기억을 잔잔하게 떠오르게 한다. 4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며 뚝심 있게 살아온 주인의 모습이 느껴지는 그림을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삼양슈퍼’, ‘금성상회’, ‘문화마트’, 어떤 가게는 간판도 없이 그저 ‘감나무가게’로 불렸다. 구멍가게 그림엔 꼭 나무가 있는데, 자목련, 백목련, 벚나무, 매화나무가 흐드러진 풍경 속의 가게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을 가슴 뭉클하게 보여준다. 거기에 ‘GS마트’니, ‘세븐일레븐’같은 대형 마트의 체인점 간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 동네를 대표하는 나무가 있고, 그 그늘엔 지나가는 사람들 누구나 앉아 쉴 수 있는 평상이 있었다. 우리는 그 때보다 행복해졌을까.

출판의 위기는 오래전부터 예고돼 왔다. 문화 다양성을 지키는 보루로 출판을 얘기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디지털 기술 앞에 종이매체의 앞날은 녹록치 않다. 특히 지역출판은 그 위기의 최전선에 놓여있다. 모든 자본과 시장이 서울에 집중돼 있는 한국 현실에서 지역을 지키며 현장의 기록과 문화를 묵묵히 담당해 온 지역출판사는 우리 시대 사라져 가는 ‘구멍가게’의 모습과 흡사하다.

아이들이 저녁 먹고 함께 뛰놀던 시끌벅적한 마당이 사라진 지역에 생기가 없듯, 지역의 문화를 기록하는 출판사가 사라진 곳에 창조의 기운이 움틀 순 없다. 삼년 가뭄에 바짝 마른 대지와 같이 힘든 지역출판의 현실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텨온 지역출판사와 지역문화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실험이 이번 주 제주에서 시작된다.

25일부터 제주에선 제1회 ‘대한민국지역도서전’을 개최한다. 제주 방언 ‘동차기 서차기 책도 잘도 하우다예(동네방네 책도 많네요)’를 슬로건으로 한 이번 도서전엔 ‘남해의 봄날’을 비롯해 ‘전라도닷컴’·‘심미안’(광주), ‘산지니’·‘해성’(부산), ‘해리’(고창), ‘학이사’(대구), ‘월간토마토’(대전), ‘사이다’(수원), ‘직지’(청주), ‘펄북스’(진주), ‘각’(제주)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출판사들이 참여한다. 일본의 ‘북인돗토리’지역도서전이 지난 1995년부터 진행돼 온 것과 비교하면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번 행사가 지역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불러올 것이란 기대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리는 전국 규모의 지역도서전인 만큼, 모든 것이 새로운데 특히 다음 스토리펀딩을 통해 모금한 1천명의 후원금으로 마련한 ‘千人賞’이 눈길을 끈다. 지역도서전이 출판인만의 잔치가 아니라, 독자와 함께 진행하는 행사라는 상징일 것이다.
 
지역출판의 발전은 현지 대학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부산의 ‘산지니’ 출판사가 작년부터 내놓기 시작한 ‘중국현대철학’ 번역시리즈는 지역 대학의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학과 현지 출판사, 지방자치단체 간의 공동 기획, 집필, 판매가 선순환으로 이루어질 때 지역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출판전문가 한기호는 이제 본격적인 ‘하이콘텍스트(High-Context)’의 시대가 시작됐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인간의 삶’ 같은 큰 주제보다는, 큰 주제를 잘게 쪼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두 가지에 집중하고, 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는 시대라는 것이다(『하이콘텍스트 시대의 책과 인간』, 북바이북, 2017). 이런 시대는 다양성과 개성을 근거로 한 지역출판사에 새로운 기회일 것이다. 처음 개최되는 ‘대한민국지역도서전’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이연도 중앙대 교양대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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