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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 … 미국에서 완성된 미니멀리즘 건축의 거장
“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 … 미국에서 완성된 미니멀리즘 건축의 거장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5.22 1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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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8. 미스 반 데어 로에
▲ 미스 반 데어 노에 (사진출처:http://www.bauhaus-movement.com/designer/mies-van-der-rohe.html)

‘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독일어: Staatliches Bauhaus)’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건너간 것이 아니라 옮겨갔다. 미국으로 건너간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지핀 불씨를 조금도 꺼트리지 않고 고스란히 살려내 오히려 미국에서 꽃을 피웠다. 미국에서 활짝 핀 바우하우스는 단순히 그곳에만 머물지 않고 전 세계로 확산됐다. 독일 망명 지식인들의 망명경로를 세밀히 관찰하다 보면 정치 사회적 사건 및 개개인이 처했던 숙명도 중요하지만, 그들로 인한 문화교류 역시 대단히 중요한 사항임을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문화 예술계, 더 나아가 학계다. 점잖이 말할 때는 문화교류지만, 독일 망명 지식인으로 인해 미국은 새로운 문화 창조의 터전을 닦았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 에리히 멘델존(Erich Mendelsohn, 1887~1953), 에른스트 마이(Ernst May, 1886~1970)는 우선 떠오르는 나치 집권으로 인해 독일을 떠난 저명한 망명객들이다. 이들 중 바우하우스와 직접 관련이 있는 발터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으로 망명한 다음 독일에서보다도 더 유명세를 떨치며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우하우스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전했다고 통상 말한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바우하우스가 폐교를 당했고, 미국에서 ‘New Bauhaus’가 설립됐으니 바이마르-데사우-베를린 校舍에 이어 명실 공히 바우하우스가 미국으로 이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바우하우스를 논할 때는 바이마르-데사우-시카고 3기를 말하기도 하는데 앞의 1-2기가 독일이고 뒤의 3기가 미국이다.

동쪽과 서쪽을 선택한 바우하우스 교장들의 운명

▲ 현대의 경관을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 시그램 빌딩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세 명의 교장이 있었다. 창설자이자 초대 교장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제3대이자 마지막 교장인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두 교장뿐만 아니라 데사우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에서 가르친 수많은 선생들 및 이에 관련된 인물들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다만 제2대 교장인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 1889~1954)만이 바우하우스 주류 팀들과는 다른 방향을 걸었다. 게다가 그는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에 비해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세계적인 유명세도 쌓지 못했다. 이에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언급하기 이전에 한네스 마이어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한다. 그를 보충하듯 살펴봄으로써 1933년 이후 바우하우스가 맞게 되는 명암의 역사와 바우하우스의 본질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두 사람은 서쪽으로 갔고, 한네스 마이어는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간 두 사람은 세계적인 거장이 됐고, 동쪽으로 간 한 사람은 평범한 망명객의 역사를 걸었다. 미국으로 간 바우하우스는 세계적인 명품으로 탈바꿈했고, 동쪽으로 간 바우하우스는 역사의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바우하우스 인물들을 열거할 때 한네스 마이어는 보통 ‘무명의 바우하우스-교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는 너무 공산주의적이었고, 다른 두 교장은 너무 중산 계급적 이었다. 중산계급이란 일반적으로 서양에서 ‘시민’으로 표기되는 말로, 아주 갑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부를 지니고 있는 부유층의 시민들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되돌아보면 1933년 이후 바우하우스는 찬란한 역사뿐만 아니라 어두운 역사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어느 토양에서 바우하우스가 뿌리를 내리며 발전할 수 있었는지도 새로운 관심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독일 망명 지식인으로 인한 세기의 풍경에 나타난 재미있는 현상중의 하나다.

1928년 발터 그로피우스는 자기보다는 6살 연하인 한네스 마이어를 후임 교장으로 앉혔다. 바우하우스를 새로 정비하려는 의도였다. 원래는 네덜란드 건축가인 마르트 슈탐(Mart Stam, 1899~1986)을 초빙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네스 마이어를 후계자로 점찍은 이유는 업적이 별로 없기는 하지만 1920년대의 유명한 기능주의 건축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건축가로서의 성장과정을 볼 때 ‘예술가란 수공업을 배우고 익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이상에 딱 부합하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마이어는 건축가의 아들로 태어나 도제 교육을 받은 미장이이자 석공(석수장이)이었다. 교장으로 앉히기 1년 전인 1927년부터 바우하우스의 선생으로 초빙된 한네스 마이어는 공방마이스터 長으로 ‘직공마이스터(Werkmeister)’와 ‘형태마이스터(Formmeister)’를 이상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다. 당시 바우하우스는 예술가와 공예가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사이에 놓인 위계질서나 차별을 두지 않다는 의미에서 교수 대신 마이스터(Meister)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한네스 마이어는 그로피우스가 원했던 바우하우스의 교과과정이나 공방을 잘 이끌었지만 그 둘 사이에 놓인 미학적인 관점이나 정치적인 견해는 분명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마이어는 그로피우스의 교육방향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방침을 관철시키려 했고, 좌파 신봉자인 마이어 주위에는 공산주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 일리노이공대의 크라운홀. (사진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

‘신건축(Neues Bauen)’의 대표자인 한네스 마이어는 교장이 되자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기술 분야를 최고로 강화했다. 또한 정치적 색깔을 반영하듯 바우하우스는 ‘민족을 위해(f?r das Volk)’, 즉 ‘가난한 자들을 위한 공방 교육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호화(물품)수요 대신에 민족수요! (Volksbedarf statt Luxusbedarf!)”가 학교의 구호였다. 이에 따라 바우하우스 교육 이념은 값비싼 호화물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일반 대중이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저렴한 가격의 보증된 물품을 만들어내는 교육을 시켰다.

하지만 시대 정세는 그가 원하는 극단적인 사회민주주의나 공산주의가 아니라, 서서히 극우로 흘러가고 있었다. 1930년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데사우 지역은 극우 정당인 나치가 집권했다. 그러자 나치는 바우하우스를 ‘빨갱이 간부양성소’로 지목했고, 정권장악 즉시 마이어는 교장 직에서 파면 당했다. 파면 이면에는 나치만의 결정이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교육을 너무 정치적인 이념에 따라 운영하면 학교가 손해를 보는 것은 너무나 빤한 상황이고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학교를 보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학교 창업주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데사우 시장과 협의해서 한네스 마이어를 파면시켰던 것이다. 그의 후임이 미스 반 데어 로에였다. 그 역시 그로티우스가 데사우 시장에게 천거한 인물이었다.

한네스 마이어는 1930년 소련 모스크바로 가서 대학교 교수가 됐다. 망명객의 선발대가 된 셈이다. 몇 명의 제자들과 조교들이 그를 따라 갔다. 부인과 아들은 그 다음해에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망명 후 소련의 발전계획 일환인 ‘대-모스크바’를 설계했다. 1933년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마이어는 소련당국으로부터 감시 대상자의 리스트에 올랐다. 결국에는 모스크바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대숙청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1936년 스위스의 고향 바젤로 돌아왔다(스탈린에 의해 추방됐다는 일설도 있다). 하지만 독일 출신인 부인은 스위스에서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아들과 함께 모스크바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마이어의 아내는 수많은 다른 외국인들처럼 1938년 체포돼 재판도 없이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했다. 1927년생인 아들은 살아남아 그곳에서 자라고 1993년에 가서야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을 알게 됐다.  

한네스 마이어는 내전으로 어수선한 스페인 땅을 도보로 도주해 멕시코로 망명했다. 멕시코는 다수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망명지였다. 1938년부터 1949년까지 멕시코의 도시계획과 건축 담당 학교에서 강사를 했고, 1939년에는 신설된 ‘도시건설 연구소’ 소장이 되어 ‘멕시코시티(Mexico City)’ 계획에 참여했다. 1942년에는 출판사를 창업하는 등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이어갔지만 멕시코 관청과 충돌을 일으키자 1949년 말 스위스로 돌아가 1954년 고향에서 영면했다. 한네스 마이어는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와는 다른 어둠 컴컴한 망명의 길을 걸었고,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 결코 주목받을 만한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이에 반해 미국으로 망명한 두 거장은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했다.

전통에서 모더니즘으로, 그리고 ‘마천루’

발터 그로피우스는 1937년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로 망명해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건축학 교수가 됐다. 그는 교수가 된 후 디자인 분야 교과과정을 완전히 개편했다. 자신의 원리에 충실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회사를 설립했고, 젊은 건축가들로 하여금 완전한 자유 속에 예술적 자아실현을 하도록 공동 작업을 도모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해 시카고에 있는 ‘아머공과대학’과 ‘일리노이공과대학교(IIT)’ 교수를 역임했다. 미국으로 이주 한 후 독일에서 혁명적으로 건물에 유리를 사용한 건축기법을 이용해 뉴욕과 시카고, 그리고 미국의 기타 도시들에 일련의 개인집들, 주택단지들, 관청들을 설계했다.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의 영향 없이는 오늘날 미국의 디자인이 어떠한 길을 갔을지 상상이 안 된다. 그로피우스는 미국 디자인의 틀을 잡아준 독일 출신 건축가였다. 그 바탕위에 미국 디자인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미국 건축술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고, 건축사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역시 미국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없이 오늘날 미국의 상징인 마천루를 상상할 수 없다. 미국은 독일 바이마르에서 발흥한 바우하우스 관련 망명 건축가들의 메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영향 없이 어떻게 오늘날의 미국 디자인이나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를 상상할 수 있을까? 미국으로는 대륙의 전통적인 건축술을 전수해주어서 고마웠고, 독일에서 온 망명객들에게는 그들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미국이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미국에서의 활약상을 조명하기 위해 독일 바우하우스 시절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한다.   

1930년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제3대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취임할 때는 전임자 한네스 마이어나 학교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와는 전혀 사회적 위치가 다른 상황이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미 독일 아방가르드 건축계의 저명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한낱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 학교를 선택했다고는 볼 수 없다. 수주를 받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금까지 현장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에 학문적인 분야에서 교직활동을 해보고 싶은 욕망에서 바우하우스 교장직을 수락한 것으로 보는 게 적절할 것 같다. 그로피우스나 데사우 시 당국은 바우하우스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과격화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미스 반 데어 로에처럼 권위를 지닌 사람이 안정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필요했다. 서로의 생각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원래 이름은 마리아 루트비히 미하엘 미스(Maria Ludwig Michael Mies)인데, 본인이 아버지의 성인 미스와 어머니의 성인 로에를 결합시켜 미스 ‘반 데어 로에’, 즉 ‘로에 가문의 미스’처럼 들리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그만큼 독특했고 자립심이 강한 모던 건축가였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건축사에서 건축을 기계문명의 매개체로 정리했다. 그러한 생각을 지니고 기계문명을 재현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의 건축술은 구조적 논리학의 표현이자 고전적 형태 속의 공간적 자유로 평가받는다. 그러한 원리를 위해 강철 모던 지지구조물(support structure, Tragstruktur)을 이용한 현대건축을 발전시켰다. 건축은 가용면적의 높은 가변성을 이용했고, 건축물 전면에는 넓은 면적의 유리를 설치했다.

건축물에 대한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한 건축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그렇게 당연하고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스타일로 발전하여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인 기술 혁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더 적은 것이 더 많다”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건축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대표자로도 유명하다(말년에 많은 명성과 부를 거머쥐긴 했지만 현대 도시를 삭막한 고층 빌딩으로 채우는 데 앞장선 주범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더 적은 것이 더 많다(Less is More)”라는 그의 말은 로버트 벤투리에 의해 “더 적은 것은 지루하다(Less is Bore)”고 비판받았다. 또한 그의 말년의 건축은 자기 복제를 계속해 건물들이 유사하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모던미니멀리즘은 건축뿐만 아니라 정신태도로까지 발전했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새로운 단순’으로 이해됐고, ‘유기건축(Organic architecture)’과 ‘해체주의(Deconstructivism)’ 건축의 반대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 크라운홀 설계모형을 앞에 두고 선 미스 반 데어 노에. ⓒ시카고역사박물관
(사진은 출처 =http://www.bauhaus-movement.com/designer/mies-van-der-rohe.html)

1932년 데사우 바우하우스가 정치적인 이유로 문을 닫게 되자 베를린에서 개인 연구소를 열어 건축을 가르치려 했으나 정치적인 탄압이 심해 1933년 중순경 그나마도 문을 닫았다. 바우하우스는 사회주의에 편향돼 있고, 바우하우스가 지향하는 예술관이 일반적으로 거부당하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34년 제국문화재청 가입, 히틀러의 문화 창조 호소문 서명, 나치-복지부 가입 등의 전력 때문에 후일 기회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나치 스스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관이 그들 나치의 예술관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그를 멀리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압력을 가해 프로이센 예술원 자격을 박탈했다. 공개적으로 나치에게 거부당한 것이다. 1926년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공산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혁명 기념비를 제작했기 때문에 진작부터 나치와는 맞을 수 없는 건축가였다. 결국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건축 교육에 새혁신 … 현대의 경관이 된 ‘시그램 빌딩’ 설계

‘아머공과대학’에서 교수로서 우선 실행에 옮긴 일은 학생들의 교육을 새로 형상화한 일이었다. 형상화했다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이유는 흙을 빗어 사람 모양을 만들어 가듯이 학생들의 교육을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는 의미이다. ‘수공업적인 것’으로 출발해 ‘계획적인 것’을 거쳐 ‘이론적인 것’으로 발전시켰다. B.C. 1세기경 고대 로마의 기술자이자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의 ‘firmitas, utilitas, venustas(solid, useful, beautiful)’를 그대로 응용한 것이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져 있던 신대륙에 유럽 전통학문으로 충격을 가하던 순간이었고, 미국에서 새로운 불꽃이 점화되는 계기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독일 바우하우스 시절 동료 교사였던 독일 망명 건축가를 또 다시 선생으로 모셨다. 

1939년에는 시카고에 건축사무소를 개소했고, ‘아머공과대학’과 ‘일리노이공과대학교’의 합병으로 1년 후에는 ‘일리노이공대’ 신 캠퍼스 계획의 위임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강철 모던 지지구조물을 이용하고 유리를 사용한 건축물을 시카고에서 설계했다. 1946년에는 ‘일리노이공대’ 동문기념 홀을, 1952년에는 ‘일리노이공대’ 채플 홀을, 1956년에는 크라운 홀을 설계했다. 이 건물들은 미국에서 기념비적인 작품들로 손꼽히고 있다. 그 이외에도 캠퍼스 내의 여러 건물을 설계했다.

1946년 미스 반 데어 로에는 프로젝트 개발자인 허버트 그린월드(Herbert Greenwald, 1915~1959)와 친교하게 되는데, 그와 함께 현대 건축인 아파트들을 건축한다. 미스는 1969년 IBM 본사 설계를 마치고 8월 19일 시카고에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허버트 그린월드와 함께 6개의 대형 주택 고층아파트를 건축한다. 그중에서 유명한 것이 시카고 소재 1951년 작 ‘Lake Shore Drive 860/880 아파트’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이 건축에서 최초로 순수 철강 지지구조물을 이용했고, 외관은 유리로 구성했다. 이 방법은 후일의 고층건물 건축에 그대로 적용됐고, 새로운 고층건물 건축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게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독일에서 허가받지 못했던 설계를 미국에서 실현시켰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이다. ‘시그램 빌딩’은 1958년 작품으로 156.9 미터 높이에 미국 뉴욕에 위치한 마천루다. 영어 skyscraper로 표기되는 마천루는 일반적으로 150m 이상의 고층건물로 경제력의 상징이자 성장의 노력이다. 건축가나 소유주의 경제력과 성장지표가 건물자체로 대표되고 평가받는다. 그래서 마천루는 대도시에 빽빽이 밀집해 끊임없이 지어지고 있다. 

마천루는 모던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간주된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이후 미국의 마천루는 신기원을 맞이하며 더욱 발전을 한다. 한 독일 망명 지식인의 영향이, 독일에서 온 한 건축가가 전수한 이념이 미국의 상징물인 마천루가 되어 기술과 예술의 결합 속에 더 높이 더 아름답게 하늘로 구름 속으로 쉴 줄 모르고 솟아오르고 있다. 그 반짝이는 유리 건물로.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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