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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절망적 상황이 해소되는 ‘기회의 평등’을 기대하고 싶다
개인의 절망적 상황이 해소되는 ‘기회의 평등’을 기대하고 싶다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 승인 2017.05.22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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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7.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장미가 피어나고, 장미대선도 치렀다. 마침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왔다. 누가 신록의 5월을 사랑하지 않으랴. 긴 겨울을 이겨낸 인동초의 현란한 꽃잎들 앞에서 마음 흔들리지 않을 사람 있으랴. 풀 속의 낮달맞이꽃 앞에서 무릎을 꿇고 들여다보지 않을 수 있으랴. 병꽃나무의 늘어진 꽃송이들은 과거급제한 이의 모자에 꽂힌 화려한 어사화 다름 아니지.

5월을 노래한 시인들은 너무도 많다. 「로렐라이」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5월을 감탄해 마지않은 시인들 중 하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꽃봉오리 벌어질 때/ 나의 마음속에서도/ 사랑의 꽃이 피었어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 모든 새들 노래할 때/ 나의 불타는 마음을/ 사랑하는 이에게 고백했어라.(김광규 역)

그가 젊어서 발표한 『노래의 책』에 들어있는 수많은 사랑의 시들을 배웠을 때, 그러니까 옛날에 내가 아직 대학 초년생일 때, 사랑 같은 것을 폄하했던 건방진 나는 하이네를 지나치기로 작정해 버렸다. 어렴풋이 자유 같은 개념에 취한 풋내기 문학도에게 문학은 사랑 따위가 아니라 막연하게나마 무엇인가 저항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서 이른바 ‘열공(열심히 공부함)’을 할 때서야 하이네가 쓴 많은 다른 시들은 전혀 다른 성격임을 알게 됐다.

침침한 두 눈엔 눈물조차 말랐구나/ 베틀에 앉아서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짜노라/ 우리는 그 안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으리/ 우리는 베를 짠다, 베를 짠다! (필자 역)

「슐레지엔의 직조공들」의 첫번째 연이다. 이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에게 또 한 겹의 저주를, 가난한 자들을 도외시하고 오직 부자들의 권익만을 보호하는 왕에게 또 한 겹의 저주를, 그리하여 오욕과 치욕만이 번성하는 조국에다 또 한 겹의 저주를 퍼붓는다. 젊은이의 가슴에 불타는 순수한 사랑을 노래했던 그 시인이 절절한 마음으로 노동자의 봉기에 참여하는 독설가로 변모한 것이다.

실제로 1844년 슐레지엔 지방에서는 직조공들의 봉기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자 기계화로 값싼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공장주들은 수많은 직조공들을 해고했고, 배고픈 직조공들은 공장주들에게 몰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진압과정을 설명해서 무엇하리. 위정자들을 공격하기는커녕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문재인 대통령 격려사) 일어섰을 뿐임에도 무자비하게 총칼에 짓밟힌 광주의 5월을 겪은 우리가.

무엇이 이 시인을 서정시를 버리고 참여시를 쓰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게 나라냐’라는 탄식 때문 아니었겠는가. 시인이 시를 쓸 수 없게 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독일은 연방으로 탄생했지만 개개 왕국과 공국이 유지되었고, 프랑스는 물론 나폴리와 에스파냐가 옛 왕가의 복위를 맞았을 정도로 유럽은 반동보수의 시대로 들어갔다. 1848년 프랑스의 2월혁명을 도화선으로 다시 유럽에 혁명의 기운이 살아나기까지, 문화는 다시 왕궁의 시녀역할에 머물게 되었다. 새 시대를 요청하는 젊은 목소리들은 탄압됐고, 하이네 또한 당국의 분서처분 대상자들에 포함됐던 것이다. ‘책들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에는 인간들도 불태우는 법이다.’(1821)라던 그는 망명 아닌 망명으로 나머지 평생을 파리에 가서 살면서 짝사랑 조국애로 애태우는 시들을 노래해야 했다.

우리나라에도 문화 예술을 탄압하는 블랙리스트의 시대가 저물었다. 시인은 마음 놓고 사랑의 시를 읊어도 될 것이라 믿는다. 실제로 시민들은 원하는 노래를 원하는 장소에서 불러도 된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말이다. 물론 그것이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하는 일이었다는 사실에는 여전히 분개하지만, 최소한 더 이상은 제나라의 군인들이 총칼로 시민들을 짓밟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권력자의 마음을 살피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나라가 된 것이라 믿는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련다는 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선언이다. 기회의 평등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존 스튜워트 밀이 주장한 자유경쟁원리는 ‘기회는 평등하게 주되 결과마저 평등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다’는 복잡 애매한 말로 끝나기 때문이다. 실천적 개혁프로그램에 있어 기회평등을 이루어 내는 일은 개인의 에너지를 발휘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해소하는 일이 전제돼야만 한다.

개인의 절망적인 상황 해소란 결코 녹록치 않은 과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개인보다는 전체에, 특히 힘 있는 다수에 방점이 찍히다 보니, 힘없는 소수는 보호는커녕 백안시 된다. 과거의 왕족과 양반 대신에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필연적으로 서열과 계급이 생겨난다. 여전히 그러하다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이 왔더라도 사랑 노래만을 부르기는 어려우리라.

마침 아파트가 새 단장을 하려고 아름다운 페인트 색칠을 준비 중이다. 출입구마다 푸르스름 계열과 누르스름 계열의 두 가지 최종 안을 이미지로 올려두고 찬성 쪽에 꼬마 스티커를 붙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외벽에는 벌써 스파이더맨 여럿이 물줄기를 쏘아대며 줄에 매달려 있다. 페인트칠에 앞서 먼저 불순물을 제거하는 ‘세척’이라는 공정이란다. 나라도 새 단장을 하려면 오염된 구석부터 씻어내야 하리라. 기회에서부터 평등을 저해해왔던 개인의 절망적 상황을 해소하는 그 일을 새 정부에 기대한다.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월이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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