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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함께 한 '영원한 청춘' … 5월정신으로 통일문학 일궈
시대와 함께 한 '영원한 청춘' … 5월정신으로 통일문학 일궈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17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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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 일본 주오대에서 ‘문병란과 광주’ 특강

본 주오대(中央大) 정책문화종합연구소의 객원연구원이기도 한 김정훈 전남과학대 교수(일본근대문학)가 오는 23일부터 이틀간 일본 주오대에서 문병란 시인과 관련한 특강과 연구보고를 잇따라 진행한다. 

23일에는 주오대 정책문화종합연구소 회의실에서 「문병란 문학과 한국사회」를 주제로 연구보고를 하며, 다음날인 24일에는  ‘문병란 시인 추모사업’ 한·일 공동 추진을 위해 「문병란과 광주」를 주제로 특강에 나선다. 김 교수의 이번 주오대 방문은 2009년, 2010년, 2013년 연구발표와 특강에 이어 네 번째다. 10여년 전부터 주오대 법학부 히로오카 모리호 교수와 연구교류를 진행해 온 김 교수는 2014년부터 문병란 시집번역과 평전집필 등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 제목은 ‘동아시아 문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교연구’다. 문병란 연구는 그 일환이다. 

김 교수는 23일의 연구보고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전남대 5·18연구소, 2015)에 게재했던 논문「문병란 시와 작가정신」 가운데 ‘문병란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내용을 중심으로 발표한다. 24일 특강에서는 문병란의 자전에세이 『나의 삶 나의 시』도 일본 대학생들에게 소개할 예정이다. 다음은 김 교수가 일본 주오대에서 발표할 주요 내용이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자유, 인권, 민주의 가치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시인 문병란(1934~2015). 시인 김준태가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를 무진장 간직한’ ‘영원한 청춘시인’이라고 호명했던 시인.

권력이 민중을 탄압하던 암울한 시대에 소명의식을 지닌 작가로서 앙가주망의 기치 하에 문필활동을 전개하며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던 그를 한국사회 내부가 아닌 바깥 세계에서는 어떻게 바라봤을까.

문병란은 한국 민주화의 토대를 이룬 ‘6월 민주항쟁’ 후, <뉴욕타임즈> 특집판(1987년 7월 31일자)에 고은, 김지하에 이어 ‘화염병 대신에 시를 던진 한국의 저항시인’으로 보도됐다. <동아일보>(1987년 8월 18일자)는 그 기사를 공개하며 “지난달 31일, <뉴욕타임즈>는 「화염병 대신에 시(詩)를 던진 한국시인들」을 소개했다. 高銀, 金芝河, 文炳蘭, 鄭喜成, 양성우 등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민중시인’들이 한국의 민주화를 선도해 왔다는 평가다”라고 언급했다.

한편 그는 참된 교육자의 표상이다. 교육현장에서 불의와는 일절 타협하지 않았고 직위나 출세를 지향하지 않았으며 양심에 따르는 일이라면 고행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조선대 박철웅 일가의 비민주적 노선에 실망해 교수직을 박차고 나와 고등학교 교사, 거리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88년 민주화가 찾아와 그들 일가가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나자 주변의 요청으로 조선대 국어국문학과에 복직한 일은 내외에 알려져 있다. 대학교수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고등학교 교사에서 학원 강사로의 신분 하락을 염두에 두지 않고, 신념과 소신을 굽히지 않은 교육철학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증언을 통해 회자되고 있다.  

대학 비리에 분노해 교수직 박차고 거리의 교사로 

그러한 투철한 소신과 불의와는 일절 타협하지 않는 강렬한 의식은 5월정신과도 맞닿아 있기에 간과할 수 없다. 문병란은 1980년 당시 ‘광주사태(5·18민중항쟁) 배후조종자’로 지명 수배돼 여수의 제자 집에서 1개월 정도 은둔생활을 했다. 하지만 6월 28일 직접 경찰에 출두해 투옥됐다. 그리고 9월 중순에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1977년 시집 『죽순밭에서』가 독재 권력에 의해 판금되자 문공부에 25페이지의 항의서를 제출해 파문을 일으킨 사건에 이어, 1980년 시집 『벼들의 속삭임』이 계엄사에 의해 압수, 불온서적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81년 『땅의 연가』도 판금 당하는 등 숱한 탄압을 받았다. “반독재 저항문학에 몰두하면서 시집판금조치를 당하고 불온서적으로 지목되는 과정 속에 광주민주화운동 배후조종자로 수배, 투옥되는 등 문학적 불운의 과정 모두가 시인의 젊은 날의 초상”(허형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정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5·18민중항쟁의 정당성, 그 진상과 역사적 의의를 알리는 각종 행사, 강연, 방송, 칼럼, 추모시 등을 통해 줄기차게 실천운동과 문필활동을 전개했다. 

5·18민중항쟁 배후조종자로 옥중 고초를 겪고 난 “그 이후 그의 시와 삶의 주제는 ‘5월 광주’가 된다”(백수인)라는 지적도 있는데, 문병란에게 5·18민중항쟁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문병란은 ‘광주항쟁의 역사적 현재성’이라는 제목을 붙여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5·18광주민중항쟁’은 70년대 유신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민주시대를 이룩하려는 정치적 민중봉기의 하나였다. 그 힘이 광주에서 그쳤고 전국으로 확산되지 못해 유신의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고 그 위에 민족적 민중적 민주정권을 수립하지 못하고 좌절했지만, 그 투쟁정신과 의의는 민족민중민주운동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지난 10년 80년대를 관류하는 역사의식 민족의식으로서 대표적인 투쟁정신과 자치추구의 원천이요 척도였다.”(<광주일보>, 1991년 5월)

시대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부당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며 민중시인으로서 반권력 투쟁의 저항시를 써온 문병란에게 5·18민중항쟁은 그의 인생에 큰 획을 그은 민족적 역사적 의미 바로 그 자체였다. 문병란은 직접 망월동 묘지를 찾아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희생자의 넋을 위무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돌아오는구나
돌아오는구나
그대들의 꽃다운 혼
못다한 사랑 못다한 꿈을 안고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부활의 노래로
맑은 사랑의 노래로
정녕 그대들 다시 돌아오는구나
―「부활의 노래」 중에서

1980년 5월 27일 미명, 전라남도 도청을 지키다가 순직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와 78년 노동운동으로 세상을 등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1982년 2월 망월동 묘역)에서 주례사를 시로 토해내며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리고 『땅의 연가』(1981), 『새벽의 서』(1983), 『동소산의 머슴새』(1984),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1985),  『무등산』(1986), 『못 다 핀 그날의 꽃들이여』(1987), 『화염병 파편 뒹구는 거리에서 나는 운다』(1989) 등을 통해 끊임없이5월정신을 되새겼다.  

5·18은 자주·민주·통일을 위한 민족운동

시인에게 시민 다수의 희생은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비극이었는데, 그에게 5·18민중항쟁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문병란은 일찍이 “5·18광주민중항쟁의 본질적 근원은 한반도의 민족모순인 외세와 분단에 있으며 계층적·지역적 불평등에서 연유됐다. 이 민족모순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익과 연결시킨 제국주의적 지배논리에 대한 근원적 저항에서 자주·민주·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는 민족운동의 결합” (<한국대학신보>, 1991년 5월 13일)이었다고 강조했다.

문병란의 평가는 외세에 의해 국토가 갈라져 분단시대를 맞이할 수밖에 없던 민족모순 앞에서 민중 저변의 목소리가 미국에 대한 분노로 확산하는 점을 의식한다. 그리고 당시 쿠데타정부의 폭압을 미국이 묵인한 점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인 시점을 견지한다. 그 시점에는 5·18민중항쟁 진압을 위해 군 20사단을 투입한 전두환 세력의 작전을 승인한 미국을 향한 분노의 시선이 투영돼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더구나 시인은 동서간의 갈등과 그 지역감정이 야기하는 시민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뼈저리게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문병란은 5·18민중항쟁을 전두환 군부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순한 항거가 아니라 外勢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친 이른바 ‘민족운동의 결합’으로 포착한 것이다.  

문병란은 5·18민중항쟁이 우연히 발생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외세와 분단에 의한 민족모순,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정치구조가 빚은 비극인 만큼 그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 한 5·18민중항쟁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외세의 간섭과 분단이 지속되고 계층적·지역적 불평등이 여전한데도, 5·18민중항쟁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을 그 누구보다 경계했다. 문병란이 통일문학을 지향하며 만년(2010년 5월 27일)에도 광주시 금남로 부활제에서 ‘5월이여 다시 부활하라’고 외쳤던 이유이기도 하다.

5월이여 다시 부활하라 
-5.18 민중 항쟁 30주년에 부침 

다시 5월입니다, 님이여
저더러 5월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무딘 입술로 5월을 찬미하라 하십니까
눈부신, 너무도 아름다운 찬란한 5월을
차마 어떻게 노래하라 하십니까.

그날의 핏자국 지워진 자리에
보상금 얼마와 바꾸어 버린
해골 앙상한 무덤만 남은 5월을
5월에서 통일로! 그날의 구호
민족통일의 그 맹세 저버리고
차거운 돌비만 남은 5월을
차마 어떻게 노래하라 하십니까.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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