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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계기에 대한 小考
삶의 계기에 대한 小考
  • 박동기 신라대 박사·경제경영연구소
  • 승인 2017.05.1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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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목적과 목표가 있을 것이다. 학문탐구에 대한 욕구, 더 나은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혹은 호기심과 현실적 대안의 부재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인고의 시간을 지나 연구자로서의 모양이 조금씩 갖추어지면서 학자의 본질적인 소양 또한 조금씩 깨닫게 된다. 읽었던 논문의 수가 늘어가고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아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하면 글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조금씩 펼칠 수 있게 되며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자로서 활동하게 됐을 때 나의 부족함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 박동기 신라대 박사·경제경영연구소

대학원생 시절 교수님께서 학문을 하는 것은 커다란 구의 가운데에서 가느다란 선을 그으며 구의 바깥을 향해 전진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구의 가장자리를 마침내 뚫고 나왔을 때 비로소 학문과 지식이라는 거대한 구의 모양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사학위자로서 공인된 학자 혹은 연구자가 되는 것은 무한한 공간 속에 있는 지식의 구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듯 연구자 혹은 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른둘이 되던 해 나는 6년 남짓 다니던 직장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지막으로 받았던 급여 명세서에는 180만원에 조금 미치지 못한 금액이 적혀 있었고 우연하게 알게 된 부서장의 연봉은 퇴사에 대한 확신을 더해 주었다. 사실, 이러한 결정은 더 나은 삶을 위한다기보단 결혼을 앞둔 시점에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생계의 유지가 더 큰 이유였다. 그해 나는 박사학위를 위한 마지막 세미나가 예정돼 있었고 그렇게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거듭되는 해운항만시장의 불황은 나에게 고통스러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예상보다 길었다. 임기제 공무원, 중소기업, 대기업, 2년제 대학교원, 공공기관…. 셀 수 없을 만큼의 서류전형과 거듭되는 면접 실패는 육체와 정신마저 지치게 만드는 가혹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내가 둘째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이력서의 학력과 논문의 실적을 지울 마음을 먹었다. 연구자, 학자로서의 희망과 목적은 남편과 아버지가 짊어져야 할 거대한 사명감 앞에서는 그저 화려할 뿐인 모래성과 같은 것이었다.

20대의 젊은 시절을 직장과 대학원을 오가며 미련할 만큼 버텨서 얻어낸 그 결실을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지울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했지만 어쩌면 커다란 세상의 소용돌이를 극복하기에는 한참은 모자랐을 나의 미력한 노력을 그제서라도 깨닫게 된 것에 대한 다행스러움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던 중 우연하게 한국연구재단의 사업을 신청하게 됐고 많은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인지 기적처럼 나에게 작은 기회가 주어지게 됐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처음 연구비를 수령하던 그때 딸아이는 웃고 있었고 나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 젊은 연구자들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학령인구의 감소로 인한 대학의 위기는 이미 자리를 잡은 교원보다 시간강사, 계약직 연구자들과 같은 이들에게 근심을 넘어 좌절과 고통으로 다가왔다. 더욱이 지방 대학원 출신 박사들이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학자로 거듭나기 위해 도전할 때마다 겪게 되는 현실의 벽과 도저히 극복 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로 인해 때로는 그렇게나 많은 시간과 노력 속에 얻었던 박사학위가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뜨겁고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연구자들은 시기의 운이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현재의 젊은 세대가 겪고 있는 구직 경쟁은 亂으로 표현될 정도니 말이다.

메마른 땅에 어렵게 피어난 민들레가 더 아름다운 것은 그리고 그 꽃이 피우는 씨앗의 영롱함은 탄생의 신비를 넘어 거친 환경 속에서 탄생한 투쟁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탄생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씨앗에게 주어진 단 한 방울의 빗물에서 시작 됐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계기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는 때가 아니더라도 잠시 포기했었더라도 다시금 힘을 낼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것은 이처럼 혹독한 삶 속에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어둠이 짙을수록 가느다란 빛의 줄기는 찬란하다. 수없이 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경제적 궁핍 속에서 나는 그 빛을 찾았고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 꽃봉오리를 준비하려 한다. 꽃이 피어나고 또 다른 결실을 대지에 뿌릴 때 나에게 주어졌던 소중한 한 방울의 빗물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박동기 신라대 박사·경제경영연구소
부경대에서 국제통상 항만물류전공 경영학 박사를 했다. 항만물류 시장구조, 컨테이너 야드 및 육상운송 그리고 차량운전자의 집단행동에 관한 논문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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