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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는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적 전환에 어떻게 영향 미쳤을까?
유교는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적 전환에 어떻게 영향 미쳤을까?
  • 이황직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사회학
  • 승인 2017.05.08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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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군자들의 행진: 유교인의 건국운동과 민주화운동』 이황직 지음 | 아카넷 | 696쪽 | 28,000원

 

이 책은 사회 구성원이 유교적 가치와 언어에 익숙해 있던 1960년대까지 유교가 한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근대적 전환에 다중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과정의 특수성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960년 4·19 청년·학생들의 대시위를 시민혁명으로 완수하는 데 4·25 교수단 데모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교수단 데모의 기획·실행의 핵심에 유교 계열 지식인들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고려대 이상은, 연세대 권오돈, 그리고 성균관대의 조윤제·임창순은 모두 유교인이었고, 청주대의 이정규와 건국대의 한태수 역시 성균관대 교수 출신으로서 유교계와 아나키스트가 주동이 된 1947년 한국혁명위원회(미군정 대신 임시정부 주도의 정부 수립 혁명 시도)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필자는 4·25 교수단 데모를 지식인의 역사적 책무에 대한 일회적인 반응이 아니라 근현대 유교사의 전통에 이어진 의미 있는 집합행동으로 분석했다. 이를 단서로 구한말 의병전쟁부터 일제하 파리장서운동 그리고 196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까지 유교계 정치운동사를 역사적으로 ‘복원’한 연구 작업의 결과물이 이 책이다. 

儒敎界 정치운동사 역사적으로 ‘복원’
 
책의 제목 ‘군자들의 행진’은 마이클 왈쩌가 청교도주의를 17세기 영국 시민혁명을 이끈 급진 정치학의 기원으로 분석한 저술인 『성자들의 혁명』에 대응한 것으로, 유교 이상과 유교인의 분투가 한국 근현대 정치에 미친 영향을 강조하기 위해 붙여졌다. 유교인들이 엄혹했던 식민지 시기와 혼란으로 점철됐던 해방 정국 그리고 부정으로 얼룩졌던 독재정권 기간을 견뎌내고 저항했던 힘을 이 책은 유교의 비판적 정치 이상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무감, 곧 세속의 고난을 초월해 천명으로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해야 한다는 ‘군자’의 이상에서 찾았다. 

유교사 및 근현대사 서술에서 망각됐던 이들의 행적을 복원하는 작업은 착수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다. 세간의 유교에 대한 인식은 부정 일색이었다. 유교는 조선 국망의 원인으로 지목돼 식민지 시기 내내 비판 받았고 해방 이후에는 변화를 거부하고 소멸돼 가는 전통 종교의 하나로 인식됐다. 그런데 이는 절반만큼만 사실이다. 國亡 전후 일제의 침략에 맞서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집단은 정통 유림 세력이었다. 일제의 이른바 ‘대토벌’에 의해 사상자만 수만에 이르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의병 학맥의 후예들과 개신 유림들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통해 재집결하여 의기를 드높였다. 그리고 파리장서운동 생존자와 그 후예들은 심산 김창숙과 위당 정인보를 중심으로 유도회총본부로 결집해 해방 정국에서 자주적 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의 중추 세력으로 활약했다. 의암 류인석, 면우 곽종석, 지산 김복한 등 구한말 의병전쟁과 일제하 독립운동 참여 세력의 후손과 학파 유림들 대부분이 참여한 유도회총본부는 유교 정치 이상의 실현과 유교계의 근대적 전환을 위해 분투했다. 여기에는 중국 망명 독립운동 시기 이회영을 따랐던 아나키스트 세력들도 결합했다. 해방정국에서 유교계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세력 중 하나로서, 특히 백범 김구를 후원해 반탁운동과 임시정부봉대운동의 추축으로 활약했다. 

해방정국 유교계의 정치운동은 우파와 중도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당시 명륜학원 출신의 청년 유림들과 일제하 비임정 계열 독립운동 참여 원로 유림들은 대동회와 전국유교연맹을 각각 결성해 좌파의 통일국가수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책은 구한말에서 해방 정국까지 유교계의 민족운동과 정치운동의 계통을 총괄 정리한 관계도를 실어, 독자들이 유교 정치운동의 역사적 연속성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쉽게 제시했다.

아쉽게도, 유교계의 정치운동은 분단과 6·25전쟁을 거치며 중요 인물들의 사망과 납북으로 타격을 받았다. 특히, 이승만의 독재화에 김창숙 중심의 유교계가 저항한 까닭에 정권은 유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김창숙 축출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다. 1956년부터 전개된 이른바 ‘유림 분규(유도회 분규)’가 바로 그것이었다. 분열된 유교계는 지리멸렬해지며 본연의 종교성과 정치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4·25 교수단 데모를 계기로 되살아난 유교계 지식인의 네트워크는 김창숙과 권오돈을 중심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에 이른다. 이들은 4·19혁명 이후의 정국에서 진보 정치운동의 전면에 나섰지만 뒤이은 5·16군사정변 와중에 탄압을 받아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1965년 한일협정반대투쟁 시기 ‘재경유림단 성명’을 발표하는 등 이들의 네트워크는 계속 유지돼, 이른바 ‘재야’ 민주화운동에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는 데 이바지했다. 

형이상학적 논전의 수렁 우회해 경험적 접근 제시

이러한 필자의 역사적 논증 작업은 ‘전통과 근대’, ‘유교와 민주주의’ 등의 형이상학적 논전의 수렁을 우회해, 경험 수준에서 유교가 민주화운동 및 한국 근대화 전반에 미친 영향에 대해 경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다음과 같은 함의를 생산한다. 

첫째, 역사사회학과 사회이론 수준에서 ‘유교민주주의론’의 형이상학적 성격을 보완할 수 있는 경험적 근거를 제시한다. 그동안 동서양의 많은 학자들이 유교와 민주주의의 친화력 여부에 대해 치열한 찬반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 논쟁은 처음부터 형이상학적 수준 너머로 발전되기 어려웠다. 찬반 당사자들은 처음에는 서로의 저의에 의심을 품었고 다음 단계에서는 경험의 차이가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았다. 유교 문화권 국가의 불완전하거나 짧은 민주주의 역사는 경험적 차이를 완화시킬 유교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이론 형성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민주주의’ 일반 이론 대신 구체적 ‘민주화’에 주목한 이 책의 연구 결과는 유교와 민주주의에 대해 설득력 있는 경험적 논거를 제공한다. 

나아가, 이 책은 보수적 유교 사상이 한국 근대 형성에 미친 역설적 영향을 분석하는 새로운 논리를 제공한다. 일찍이 로버트 벨라가 말했듯이, ‘근대화는 언제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였다. 전통지향적인 유교는 기본적으로 변화를 거부했으므로 일반적으로 근대화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보수적이었던 척사유림 주도의 의병 세력은 국망 이후 근대 민족주의에 눈을 뜨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근대적 전환을 이뤘다. 해방 이후 그 후예들은 근대적 정치 제도 하에서 민본의 이상을 민주주의로 전유해 건국 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근대화론이 주도하는 담론의 틀 안에서는 이러한 유교의 진취적 측면이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사회 구성원이 유교적 가치와 언어에 익숙해 있던 1960년대까지 유교가 한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근대적 전환에 다중의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과정의 특수성을 분석하는 데 필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둘째, 이 책의 함의는 학술 영역을 넘어 유교 부흥의 방법 모색으로 이어진다. 유교인으로서 필자는 유교 정치 이상을 실천한 이 책의 주인공들의 삶을 널리 알려 유교가 한국 사회에 여전히 유효한 사상 자원임을 입증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유교의 미래는 밝지 않다. 이 책에서 나는 유교가 과거 국가종교의 환상에서 벗어나 시민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문중이나 학통의 차이를 넘어서, 필요한 것은 오직 ‘유교 시민’의 지향이다. 종교성을 갖는 유교인들이 공론장과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개입해 유교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는 자원이라는 것을 인식시킨다면, 유교는 죽은 전통이 아니라 살아 있는 종교로 거듭날 것이다. 

이황직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사회학
필자는 연세대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독 저서로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가 있고, 『한국의 사회개혁과 참여민주주의』, 『납북 민족지성의 삶과 정신』 등의 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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