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한계 뛰어넘는 '상상력'은 결함이 아닌 '탁월성'이다
"지성의 한계 뛰어넘는 '상상력'은 결함이 아닌 '탁월성'이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5.08 1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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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_ 4강. 박기순 충북대 교수의 ‘스피노자의 모더니티’

문화의 안과 밖 시즌 4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이 점점 知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혜능과 동아시아 불교, 루터·칼뱅과 종교개혁, 그리고 선과 일본 불교의 성격을 다룬 데 이어 지난 4월 22일(토) 진행된 4강은 서구 비판사상의 기원으로도 평가받는 ‘스피노자’에 주목했다. 박기순 충북대 교수(철학과)의 ‘스피노자의 모더니티’ 강연이었다.
강연을 맡은 박기순 교수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프랑스 파리 제4대학에서 「스피노자에서 존재의 역사성과 기호의 정치」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충북대 철학과 교수이자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으로 있다. 공저서로 『서양근대윤리학』, 『서양근대미학』, 『현대 프랑스 철학사』 등이 있고 그밖에 질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철학』,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 등을 번역했다.
강연으로서는 조금 방대한 분량이어서 전체 논의를 축약하기보다는, 강연의 핵심으로 읽히는 「인게니움,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모더니티」 부분을 요약한다.

자료·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자유인의 인게니움

스피노자는 세계 형성의 구체적인 개체-주체들을 인게니움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게니움은 복합체로서의 개체가 갖는 개체성을 정서적 차원에서 지시하는 개념이다. 물체는 다른 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운동의 변이를 겪는다. 인간의 경우, 이 운동의 변이가 심리적-생리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감정들이다. 물체가 다른 물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것들과 결합을 통해 복합체로 구성되듯이, 우리가 다른 개체들과 만나면서 겪고 갖게 되는 감정들은 특정한 정서적 개체성으로 응고된다. 인게니움은 바로 이 정서적 개체성을 지시한다. 그것은 ‘기질’ 혹은 ‘性情’으로 번역될 수도 있고, 개체에 고유한 ‘사유방식(mentality)’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인게니움 개념은 이미 스피노자 이전에 고전 문헌들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것이었다. 거기에서 이 용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어원(in+gigno)이 보여주듯이 그것은 본래적 성질이나 성향을 의미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본성(natura)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둘째, 인게니움은 이 자연적 기질 가운데 특별히 탁월한 능력을 지시하기도 했다. 이 탁월한 능력은 정신적 탁월성, 예를 들면 지능이나 창조성을 의미하거나 신체의 숙련성을 지시하기도 했다.

스피노자는 이 고전적 용법을 수용하지만, 이 개념에 대한 그의 사용은 무엇보다도 인게니움의 다양성에 대한 강조를 보여준다. 스피노자의 이해에 따르면, 개체는 외부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게니움에는 한 개체의 역사, 그의 삶의 궤적이 응축돼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인게니움은 개체의 고유성을 표현하며 그만큼 다양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상이한 세계관과 가치관을 갖는 것은 그들의 인게니움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게니움은 이렇게 다양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다른 구별도 도입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인게니움은 ‘조야하고’(rude) 또 어떤 인게니움은 ‘자유롭다’(liberum). 이 차이는 노예와 자유인을 나누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의 인식 이론을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우리 신체이다. 쉽게 말해 우리 정신은 우리 신체를 인식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저런 사물을 인식한다고 말할 때, 실제로 그것은 우리 정신이 그 외부 사물 자체가 아니라 우리 신체가 그 외부 사물과 맺는 관계, 그것이 우리 신체에 가한 작용 방식과 결과를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의 인식이 우리 신체를 표현한다고 해서, 이러한 인식이 반드시 주관적이고 부적합한 것은 아니다. 우리 신체가 외부 사물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그것에 의해 어떤 신체로 구성되는가에 따라, 그 신체를 표현하는 우리의 인식은 적합한 것일 수도 있고 부적합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차이가 곧 조야한 정신(ingenium)과 자유로운 정신의 차이다.

조야한 정신이 외부의 상황과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정신이라면, 반대로 자유로운 정신은 외부로의 자신의 표현이 지배가 되지 않고, 외부로부터의 수용이 종속을 의미하지 않는 그러한 정신을 지시한다. 어떻게 그러한 경우가 가능할 수 있는가?

서핑을 즐기는 사람의 자유로움은 그의 신체가 파도라는 물체의 운동과 합치할 수 있는 데서 나온다. 그의 몸이 뻣뻣하게 자신을 주장할 때, 그는 파도의 운동에 의해 넘어질 수밖에 없다. 그는 파도와 합치함으로써 파도와의 만남을 자유로이 즐기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공통성의 토대 위에서 정립되는 이 자유는, 사물들을 분할하거나 배제하고 위계적 가치를 부여하는 대신, 그것들을 동등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보게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자유는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이 확립했던 세계, 물체와 정신의 동일성과 동등성이라는 논제를 통해 그가 확립했던 평등한 존재들의 세계를 드러내고 탐험한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로운 정신이 사물들 사이의 공통성을 보다 많이 인식할수록 우리는 신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공통성의 탐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사물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정신이 이 공통성 혹은 보편성을 발견하는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과학, 예술, 정치가 그것이다. 이것은 사물들의 새로운 공통적 질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해보임으로써 신의 본성의 풍부함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들 활동은 또 다른 공점을 갖는다. 그것은 이 지적 활동에는 상상력이 항상 결합돼 있다는 점이다. 인게니움의 고유성은 바로 여기에서 드러난다.

자유로운 상상력으로서의 인게니움

데카르트가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정신’이라는 용어는 인게니움인데, 그는 이 인게니움을 상상력의 도움을 받는 지성으로 규정한다. 데카르트의 경우 상상력은 단순한 보조적 역할로 제한된다. 이것은 데카르트와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학문’을 정립하려고 했던 비코가 데카르트를 비판하고 나섰던 중요한 이유가 된다. 비코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학문을 마찬가지로 인게니움을 토대로 정립한다. 그런데 이때 그에게 인게니움은 데카르트와는 다르게 상상력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인다. 인게니움은 그에게 풍부하고 창의적인 상상력 자체를 지시한다.

스피노자는 또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인게니움은 다양해서 아주 많은 것들을 꾸며낸다(fingere). 이 꾸며냄을 스피노자는 일반적으로 상상으로 규정하는데, 이때 상상은 부적합한 인식, 즉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조야한 정신에 의한 인식 방식을 지시한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상상을 ‘눈뜨고 꿈꾸는 것’ 혹은 ‘망상’과 동일화한다.

그런데 이 꾸며내는 일 즉 픽션은 반드시 부적합한 인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날개 달린 말을 상상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스피노자의 말대로 그 상상은 ‘자유로운 상상력(imaginandi facultas libera)’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상상은 사물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상은 자유로운 정신에게는 결함이 아니라 탁월성(virtus)으로 간주된다.

사실 과학, 예술, 정치는 이 자유로운 상상력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왜 우리의 지성은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우리 지성의 한계 때문이다.

첫째, 인간 지성이 사물들에 가질 수 있는 합리적 인식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추상적 보편성은 우리 삶에 필요한 구체적인 앎과 실천에 한계를 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 상상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성서는 도덕적 규칙들을 대중들에게 구체적으로 각인시키기 위해 ‘이야기들’을 꾸며낸다. 마찬가지로 과학자는 설명을 위해 가설을 세우거나 픽션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실제로 현실에서 그러한 것이 일어난 경우는 없지만, 원의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홉스와 스피노자는 한 끝은 고정되고 다른 끝은 회전하는 선분의 운동을 꾸며낸 바 있다.

둘째, 스피노자가 최고의 인식이라고 불렀던 개별 사물들에 대한 인식은, 가장 보편적 것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덜 보편적인 것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도달될 수 있다. 그런데 보다 구체적인 인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보편적인 것의 단순한 적용의 과정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보다 구체적인 경우들로 나아갈 때, 그 구체적인 경우들에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인식들에 벗어나는 것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이해는 이미 우리가 가진 보편적 체계에 대한 수정과 변경을 요청하게 된다. 그런데 이 새로운 체계의 구성에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체계는 이미 존재하는 인식 체계로부터의 연역적 확장에 의해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본성상 어떤 다른 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형이상학적 상상’을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다.

사실 스피노자 철학 체계 자체의 성립은 17세기의 근대가 이루어낸 과학적, 예술적, 정치적 혁신들과 이해들에 기초해 있다. 우리는 앞에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 특별히 자연에 대한 기하학적 이해가 어떻게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일부 스피노자 연구자들은 스피노자의 정치철학이 그의 존재론이나 인간학의 ‘적용’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철학 자체가 당시에 그가 맞닥뜨려야 했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성찰로부터 구성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협과 도전 속에 존재했던 네덜란드 공화국의 이념을 옹호하고자 했던 그의 열정, 마찬가지로 자유를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위계적 질서를 옹호했던 자신의 적대자들에 대항하여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고자 했던 그의 정치적 문제의식이, 그로 하여금 기존의 철학적 전제를 수정하고 변경하면서 새로운 철학을 구성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피노자 철학 체계가 당시의 과학적, 예술적, 정치적 혁신들과 성과들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동일한 자연학의 토대 위에 있었지만 데카르트는 스피노자와는 다른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정당화하는 철학에는 스피노자 철학 외에도 여러 다른 철학들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스피노자 형이상학의 구축은 스피노자의 탁월한 인게니움,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철학자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였던 ‘자기를 산출하는 작용적 원인’, ‘사물들의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신’, ‘신의 본성을 구성하는 물질성’, ‘필연적 법칙들에 따라 행위하는 신’, ‘신의 이해 가능성’ 등의 형이상학적 논제들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적 상상력, 그의 ‘날카로운 정신(ingeniiacumen)’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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