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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폐교당한 바우하우스 창설자 … 망명 후 세계적인 명성 획득
나치에 폐교당한 바우하우스 창설자 … 망명 후 세계적인 명성 획득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5.08 15:1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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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7. 발터 그로피우스
▲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발터 그로피우스. 이 사진은 1919년 루이스 헬드(Louis Held)가 촬영했다. 바우하우스 창립 직후 바이마르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출처=https://ko.wikipedia.org/wiki/발터_그로피우스

바우하우스. 귀에 익은 이름이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 ‘○○동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펜션’, ‘H대 앞 애견카페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 가구’, ‘바우하우스 문화센터’, ‘바우하우스 오디오장식장’ 등 일상생활에서 쉽게 부딪치는 간판과 건물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학문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나 서양 예술사 혹은 건축사 등을 다룰 때면 심심치 않게 바우하우스가 등장한다. 귀에 익은듯하고 가까운 데 있는 것 같은 것이 바우하우스다. 초현실주의니 야수파나 미래파 정도의 높아 보이는 개념이라면 잔뜩 긴장하고 한 번 집중해 보겠는데, 질문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모르는 것이 바우하우스다. 그런데 정작 진지하게 ‘바우하우스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닥치면, 글쎄 좀 머쓱해진다.

‘바우하우스’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바우하우스(Bauhaus)는 독일어의 ‘바우(Bau)’와 ‘하우스(Haus)’의 합성명사로 직역을 하면 ‘건축 집’ 혹은 ‘지은 집’이라는 뜻이다. 독일어의 ‘비어(Bier)’와 ‘하우스(Haus)’가 합쳐서 ‘비어하우스(Bierhaus)’가 된 것을 연상하면 쉽게 풀리는 단어다. 비어하우스가 맥주를 마시는 집이듯이, 바우하우스는 ‘건축’과 연관된 혹은 ‘짓는 것’과 관련된 ‘집’이라는 뜻이다. 어원적으로는 그렇지만 바우하우스란 건축의 형태나 내용을 의미하기보다는 1919년부터 1933년까지 독일에 실재했던 디자인, 건축, 응용 예술을 가르친 학교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바우하우스는 단순히 한 학교의 이름을 뛰어 넘어 독일 망명 지식인 역사와는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술사와 건축사, 그리고 디자인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실제적으로 오늘날의 건축이나 교육, 디자인 시장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됐다. 바이마르는 독일의 시성 괴테와 쉴러가 활동하고 만년을 보낸 곳이고, 근대의 역사에서는 바이마르 헌법으로 유명한 곳이다. 학교를 창설한 사람은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였다. 바우하우스라는 명칭만큼이나 발터 그로피우스 역시 예술사나 건축사에서 쉬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와 함께 현대건축의 3대 창시자로 불린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오늘날에도 아헨 공대로 유명한 독일의 아헨 출신으로 미국 시카고에서 생을 마감했고, 르 코르뷔지에는 스위스 출신으로 30대부터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한 프랑스인이었다. 그로피우스는 건축뿐만 아니라 모던 디자인을 완성한 인물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우하우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모던 디자인 완성한 예술가, 그리고 ‘베렌스’ 사무실의 인연

▲ 그로피우스의 데사우 바우하우스

1919년 바이마르에 설립된 바우하우스는 1925년까지 바이마르에, 그러한 다음 데사우로 이전해 1932년까지 데사우에 교사가 있었다. 그 후 베를린으로 장소를 옮겼지만 1933년 곧바로 나치정권에 폐교 당했다. 이처럼 독일에서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14년의 짧은 기간이었다. 학교가 폐교된 후 설립자인 그로피우스는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14년에 걸친 바우하우스 역사를 보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이 시대적 배경이다. 바우하우스가 설립된 1919년은 1918년 11월 혁명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막 수립된 때이고, 1933년은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며 히틀러 제3제국이 깃발을 꼽던 해다. 즉 바우하우스 역사는 바이마르공화국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더구나 바이마르 헌법과 연관된 바이마르에서 개교해, 히틀러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베를린에서 폐교를 당한 것은 상징이라기보다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의 역사는 미술사의 역사와 시대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1883년 베를린의 건축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삼촌도 건축가였고, 아버지도 건축가였다. 할아버지는 유명한 화가로 독일의 저명한 건축가들과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1903년 뮌헨공대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했고, 1906년 베를린 샬로텐부르크공대로 전학했다. 1908년 디플롬(Diplom) 학위도 없이 베를린의 건축가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 1868~1940) 사무실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독일 대학에서 기술 계통의 학과나 경제학과 등은 디플롬(Diplom) 학위로 학사과정을 마무리하는데, 건축학과의 경우 디플롬은 건축가 자격증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페터 베렌스는 ‘아에게(AEG)’사의 수석디자이너였다. ‘아에게(AEG)’는 전자 및 전기기기 제조업체로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보유한 전구 특허권 사용 허가를 받아 에밀 라테나우가 베를린에 세운 독일기업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이전한 이 회사는 오늘날 한국에도 잘 알려진 독일의 저명한 전기기기 회사다.

페터 베렌스는 ‘독일 공예가 연맹(DWB)’ 창립자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1차 세계대전 발발 전에는 아에게(AEG)사에서 포괄적이고도 광범위하게 회사 내의 조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아에게(AEG) 회사의 제품인 전화기, 선풍기, 주전자, 가로등 디자인으로 회사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창조해 냈고, 인쇄물을 포함해 공장 건물까지 디자인했다. 베렌스는 화가로 출발했지만 디자인에 관심을 돌렸고 결국에는 건축에 집중했다. 현대 건축의 길을 제시한 셈이다. 베렌스는 산업디자인의 원형이었고, ‘기업디자인(CD)’의 창시자다. 영국의 미술공예 운동에 맞섰고, 독일의 전통적인 공예가 정신과 기계생산을 조합시키는 방향을 재구성하며 독일 최초로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시도한 개척자적 인물이다.

그로피우스는 베렌스 사무실에서 실무를 배우고 익히며 후에 저명한 건축가가 되는 미스 반 데어 로에를 그곳에서 만나 사귀었다.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08년에서 1910년 기간 베렌스 사무실에서 일했다. 후일 또 한명의 저명한 건축가가 된 르 코르뷔지에도 1910년 시기 5개월간 페터 베렌스 사무실에서 일했다. 하지만 그로피우스와는 시간이 엇갈려 그 당시에는 서로 사귀지는 못했고, 후일에 가서야 같은 사무실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현대건축의 3대 개척자가 모두 페터 베렌스 사무실에서 일했고, 페터 베렌스에게 디자인과 건축을 배운 문하생이었다. 베렌스의 사무실이 현대 건축의 개척자를 키워낸 산실이었다.

약 2~3년간 페터 베렌스 사무실에서 근무한 다음, 1910년 그로피우스는 산업디자이너와 건축가로 개인 사무실을 연다. 이제 직원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작업을 위탁받기 시작한 것이다. 위탁물 중 하나가 1911년 아돌프 마이어와 공동으로 디자인한 알펠트에 위치한 파구스(Fagus) 공장이다. 그로피우스는 파구스 공장 벽체를 당시에는 새로운 재료인 강철과 유리로 대체시켰다. 이 작품은 ‘모던건축’ 혹은 ‘신건축’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며 1946년 문화재보호물로 지정됐고, 2011년 6월에는 공장부지 전체를 포함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910년에는 ‘아에게(AEG)’ 회장으로 당시 영향력 있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인 라테나우에게 ‘규격화된 부품들을 이용해 노동자 가족을 위한 조립식 숙소를 건축하는 회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로피우스는 1910년 예술가 후원자이자 예술품 수집상인 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를 통해 ‘독일 工藝家 연맹(DWB)’ 회원이 된다. 근본적인 사회 문제와 건축의 원리를 재검토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깨어있는 사람들은 미술공예교육에 대한 시급한 개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미술교육은 상아탑에 갇혀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고, ‘마이스터(Meister)’로 대표되는 공예가들은 먼 옛날 중세시대처럼 구태의연하게 가르치고 배우기만을 주장하며 도제들을 윽박지르고만 있었다. 학문의 자유와 고질화된 도제제도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할뿐더러 전혀 대처할 방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육만 탓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현실적으로 더 시급한 일은 독일의 기업인들을 설득해 더 좋은 디자인을 생산하고 장려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독일 공예가 연맹’이다.

▲ 그로피우스의 대표적인 뉴욕 PanAm 빌딩.

‘독일 공예가 연맹’은 1907년 뮌헨에서 결성됐고, 다름슈타트에 본부를 뒀다. 다름슈타트는 주지하다시피 아헨공대와 더불어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다름슈타트공대가 있는 곳이다. 이 단체는 구성원을 명시적으로 설명하듯이 ‘예술가, 건축가, 기업인, 전문가’들이 모여서 결성한 ‘경제문화’단체다. 경제와 문화가 연계한 산학협동의 효시인 셈이다. 이 연맹은 디자이너의 산업체 고용을 조정하고 공장제품의 개선을 위해 대중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미술과 공예와 산업의 상호연계 및 보조, 무역의 진흥, 독일 제품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 단체의 목적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이에 따라 실내장식, 가구 시리즈, 양탄자. 벽지, 디젤기관차, 철도 수송 비품 등을 디자인했다. 1914년에는 건물의 내부를 은폐하기보다는 전면유리를 사용해 내부를 훤히 드러내는 공장 모델 디자인을 출품하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하사관으로 참전했다. 심한부상을 당했고, 철십자 훈장을 받고, 1918년 11월 제대했다. 1915년에는 그 치명적인 여인,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였던 알마 쉰들러(1879~1964)와 결혼했고, 1920년에 이혼했다. 알마 말러는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미술, 음악, 문학 분야의 ‘팜 파탈(femme fatale)’로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 시인 프란츠 베르펠의 부인이었으며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 등 당대의 수많은 명사들과 염문을 퍼트린 여인이다. 선구적인 여인이란 칭송도 받고, 하수구 통이라는 비난도 난무했다. 세 번째 남편인 프란츠 베르펠과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해 또다시 망명 지식인 사회의 여인으로 끊임없는 화제를 뿌렸다. 알마 말러 베르펠의 경우는 ‘망명객의 여인’이라는 주제로 한 번쯤 다뤄 볼만하다.

세상의 위인들은 대부분 남자로 나타나지만 세상은 남녀가 반반으로 분포 돼있다. 남녀의 역할이 다를 수 있고, 세상의 이면에는 위인들을 있게 하는, 혹은 그들을 매혹시킨 (혹은 유혹한) 여인들이 있다. 단순히 정치 사회적친 문제뿐만 아니라 자녀를 비롯해 인간과 감정의 뒤엉킴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망명객의 여인’ 주제일 수가 있다.

1919년 그로티우스는 국립 바우하우스를 창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한다. 바우하우스 태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우선 조망할 필요가 있다. 1918년 9월 말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 패망했고, 11월 혁명으로 황제제국이 붕괴되며 공화국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진행은 모든 독일인들의 정치적 소망이었다. 이 당시 그로티우스는 전선에서 귀환했는데, 그의 조국 독일은 군사적 패망에 대한 독일인들의 참담함, 반란과 혁명, 배고픔과 궁핍, 사회와 민주에 대한 열망이 난무하고 있었다. 평화적인 혁명이 있었던 반면, 러시아 10월 혁명을 본보기로 삼는 극좌파들의 유혈 폭력도 거리를 휩쓸고 있었다. 의회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1919년 초까지 이러 저러한 무리들과 권력투쟁을 해야만 했다. 1919년초 공산주의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암살당했다. 그렇게 어수선했다.

낡은 구조를 무너뜨리고 적폐를 청산하려는 거대한 사회적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나타났다. 각 문화단체에서 지적인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고, 개혁프로그램이 발표됐다. 모두가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새로 시작하려고 했다. ‘11월 그룹 (Novembergruppe)’도 그런 단체의 하나였다. 11월은 혁명으로 황제제국이 붕괴된 시간이었다. 그로피우스는 군대에서 귀향하자마자 이 단체의 회원이 됐는데, ‘11월 그룹’은 혁명적인 사고로 뭉친 개혁 예술가 단체였다. 총 회원이 170여명이었는데, 리오넬 파이닝거, 바실리 칸딘스키, 파울 클레,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등 중요 예술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나치가 등장하자 ‘변종 예술가’로 지목되며 망명의 길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이 단체의 기본 목적은 교육, 박물관, 전시회 등에서의 예술경영 민주화와 예술가들의 국내 국제적 교류의 민주화였다. 예술분야에서 모던 운동을 확고히 하려는 의도였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정신은 각기 흩어져 있던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고, 공예가와 화가·조각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모든 기술을 결합시켜 협동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모든 창조 활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건축’이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공예를 순수미술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미술가와 공예가의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이 그로피우스의 생각이었다. ‘미술가는 지위가 상승된 공예가’이고, “미술가와 공예가 사이의 장벽을 이루는 계급구분을 없애고 새로운 공예가 길드를 조직하자!”는 것이 창립 모토였다. ‘공예 및 산업체 지도자들과의 지속적인 접촉을 확립하는 것’도 창립 선언문의 내용이었다. 교육의 실현은 경제적인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었다. 바우하우스는 제품과 디자인을 대중과 산업체에 판매함으로써 점차 공공보조금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이처럼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학교가 상아탑으로 국한돼 있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는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주기 위함이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건축 집’ 혹은 ‘지은 집’의 뜻을 지닌 바우하우스를 학교의 이름 및 이념으로 채택한 이유는 외견상 나타난 건축이나 집을 짓는다기보다는 교육의 이념을, 학생을 기르는 것을 건축하듯이 집을 짓듯이 하고자 함이었다. 씨를 뿌리고, 씨가 곧 결실로 열매를 맺는 책임 있는 교육을 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은 독일 중세의 ‘건축 장인 조합’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이념을 바탕으로 현대사회에서는 공예가의 기술을 건축프로젝트에 직접 결합시키는 훈련을 교육의 목표로 응용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바우하우스의 교육 장소는 배우고 익히는 교실이 아니라 작업하고 작품을 제작하는 工房이었다. 케케묵은 기술전달이 아니라 실용위주 마이스터 교육이었다.

그로피우스는 원래 정치에 무관심했으나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고 살상하는 무의미한 전쟁을 겪고, 인간들의 우둔함을 보며 오직 급진적인 사회개혁만이 독일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좌파 이념이었고 결국에는 좌파에 동조하게 됐다. 교육에 있어서도 단순한 기계 생산보다는 工藝家 정신을 강조했고, 중세의 ‘건축 장인 조합’ 이념에 따라 소규모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에 따라 유토피아적 성향을 지닌 예술가들을 바우하우스 선생으로 초빙했다. 리오넬 파이닝거, 파울 클레, 라스츨로 모올리-나기, 요셉 알버스, 바실리 칸딘스키, 미스 반 데어 로에, 요하네스 이텐, 한네스 마이어 등이 바우하우스의 교수진이었다. 이들은 모던예술, 모던건축을 대표하는 자들로 20세기 독일풍경에서 망명 지식인들이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통해 기술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개성을 계발시키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었다. 모던교육 이념이었다.

교육이념이나 구성원에서 보듯이 바이마르공화국시절 바우하우스의 선생, 학생, 바우하우스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던 자들은 좌파 내지 세계주의자로 취급받았다. 설립 초창기부터 보수 우파 정당은 바우하우스를 눈에 가시로 여기며 거부했다. 정치적 재정적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에는 1925년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학교를 이전해야 했다. 데사우로 이전했지만 1931년 나치당이 의회를 장악하자 학교의 존폐가 위협 당했다. 코스모폴리탄, 세계주의적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는 反독일적이라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공산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 바우하우스를 볼셰비키로 몰아세웠다.

나치, 바우하우스를 볼셰비키로 몰아세워 … 1932년 문 닫아

1932년 9월 30일 데사우 바우하우스는 문을 닫았다. 나치가 들이닥쳐 창문을 깨부수고 서류와 기계 설비들을 길거리로 내던졌다. 베를린으로 이전했지만 곧바로 폐교 당했다. 전 독일이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치는 그로피우스가 창립한 아방가르드 건축 단체인 ‘고리(Ring)’를 ‘유대-볼셰비키 건축가들’ 모임으로, ‘바우하우스’를 ‘마르크스주의 교회’로 규정했다. 지식인이 수난 받는 순간이었다. 이념이 폭압으로 오도당하는 순간이었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로피우스는 ‘현대인’을 위한 ‘현대적’ 건물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현대건축의, 새로운 교육의 이정표가 되는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사람이다!

▲ 베렌스 사무실을 떠난 그로피우스는 동료 건축가인 아돌프 메이어와 함께 베를린에서 실제 건물을 건축했는데 독일 알펠트-안-더-라이네에 있는 ‘파구스 공장’이 그렇다.

1934년 영국을 경유해 193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건축학 교수를 역임하며 미국에 바우하우스 본질과 정신을 전파했다. 하버드대 대학원 센터, 맨해튼 Pan-Am 빌딩, 아테네 미국대사관을 설계했고, 서베를린의 그로피우스 도시를 설계했다. 바우하우스 이념은 건축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상업디자인, 공업디자인의 원조 역할을 자임했다. 독일에서 발흥해 미국에서 꽃을 피운 바우하우스는 한국에 상륙해 길거리를 수놓고 있다. 바우하우스 속에는 20세기 초의 피비린내 나는 유럽역사와 건축가들의 개혁의지가 숨 쉬고 있다. 그들의 고귀한 교육목표가 반짝이는 건물로 빛을 발하고 있다. 망명 지식인의 수난과 고통을 무심한 세월의 흐름 속에 잊은 듯이!
  
그로피우스는 1969년 7월 5일 보스턴에서 생을 마감했다. ‘베렌스’ 사무실 출신의 르 코르뷔지에는 1965년 8월 27일 프랑스 로크브륀카프마르탱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1969년 8월 17일 시카고에서 각각 타계했다. 건축사의 거인들은 생의 마감까지 거의 비슷한 시간대를 살았던 것이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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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JO 2019-01-16 08:06:25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