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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생각, 부재에서 열리는 급진적 가능성의 세계
자살생각, 부재에서 열리는 급진적 가능성의 세계
  • 노상선 한림대 대학원 심리학과 박사과정수료
  • 승인 2017.04.26 22: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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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학술에세이 우수상(요약)

국내에 생사학연구소가 설립되고 대중매체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로 다루는 등, 죽음에 대한 다양한 담론의 장이 양지에 마련되고 있는 지금도 ‘자살’이란 두 글자만은 여전히 가슴 한편을 무겁게 한다.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자살을 고려하는 이가 삶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까?

자살의 대인관계 이론에 따르면, 개인은 소속감이 좌절되고 타인에게 짐이 된다고 느낄 때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소속감의 좌절이란 어디 기댈 곳이 없고 자신도 타인을 돌보지 않는 상호 돌봄의 결여와 혼자라는 외로움을, 타인에게 짐이 된다는 느낌은 자기증오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골칫거리인 것 같은 느낌을 반영하는 개념이다. 자살의 위험요인으로 밝혀진, 자살행동의 경로에서 자기 죽음을 고려하는 첫 지점인 자살생각은, 자살의 위험요인으로서만 의미 있는 것일까? 

자살 자체도 윤리적 잣대를 댈 만한 것이 못되지만, 자살생각을 자살의 위험요인으로만 볼 경우, 자살에 대한 낙인이 자살생각에도 그대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그 낙인은 자신을 비난할 근거가 되어 당사자의 마음을 짓누르고 입엔 재갈을 물릴 것이다. 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로 자살생각은 더 자주 떠오르고, 자신만 하는 불행한 경험이라는 인식 속에 고립감은 더 깊어질 수 있다. 

우울이나 분노처럼 흔히 부정적으로 보이는 내적 경험이, 실은 유기체의 생존을 위해 발전한 적응적 진화의 산물인 경우가 종종 있다. 자비로운 마음 훈련을 개발한 길버트가 자기비판을 안전전략으로 개념화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발로우는 감정, 생각과 같은 내적 경험에 대한 해석의 유연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이 경험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경직되고 편향된 해석이 고통의 근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살생각 또한 이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자살생각이 자살의 위험요인이라는 상식적인 해석을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대안적 해석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전전략으로서의 자살생각은 어떨까.  는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정주사가 막막할 때마다 자살을 생각하게 된 과정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막상 죽자고 들면 죽을 수가 없고, 다만 죽자고 든 것만이 마치 염불이나 기도처럼 위안과 단념을 시켜준다. 이러한 묘리를 체득한 정주사는 그래서 이제는 죽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의 행티가 되어버렸던 것이다.”(천정환, 자살론: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 문학동네, 2013)

인간중심적 상담이론에 기대 자살생각을 유기체의 적극적인 저항으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기실현 경향성과 내면화된 타인의 가치가 어우러져 형성된 자기개념과 유기체적 경험의 어긋남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저항 말이다. 죽음은 한 개인의 삶을 강력하게 규정해온 타인의 가치와 사회적 규범이 의미를 상실하고 해체되는 지점이다. 가치의 부재를 대면하고서야 열리는 가능성의 세계, 그것이 자살생각이 지향하는 바 중 하나가 아닐까.

부재와 무능의 급진성은 철학자 김영민이 여러모로 논의해 온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부재란 “마치 영혼의 진공청소와 같은 어느 순간, 내가 의지하던 그 세속의 먼지들이 단숨에 없어지는 어느 순간, 마치 비가 그치고서야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이 오직 그(부재) 속에서만 가능해지는 인문의 진실이 움트는 곳이다.” 지금까지 삶이 의탁하고 있던 모든 틀이 무너지는 죽음이라는 부재는, 그래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이 움트는 터가 될 수 있다. 나비의 날갯짓은 고치 속 죽음과 같은 시간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고독의 시간이 열어주는 세계는 애벌레와 나비의 차이만큼 급진적이다.

그렇다면 자기개념 혹은 정체성에 깊숙이 파고들어 있는 가치와 규범에 의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의 지배적 가치체계가 한 개인이 자살에 이르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며 그 이유를 짐작해보자.

유서를 통해 자살자들의 심리를 분석한, 박형민이 제시한 자살 과정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첫째, 자살자들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실패로 인식했다는 점이며, 둘째, ‘최악’인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차악’인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자살자들이 상황을 자신의 실패로 인식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오직 개인의 문제일까. 노력하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유포하는 사회라면 어떤가? 자연스럽게 실패는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 된다. 차악인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떤가? 상황을 극복할 더 나은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이해하는 데 보드리야르의 ‘저지’라는 개념이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 부적응자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 장애를 진단하고 치료를 통해 체계 적응적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 이는 저지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정선의 카지노는 가만히 둔 채 그 안에 중독관리센터를 만들어 개인의 관리에 집중하는 것, 이 센터를 사행산업의 주체가 연간 148억 원을 들여 운영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도박중독으로 인한 자살은 그저 개인의 문제일 뿐이라는, 도박에 취약한 개인만 잘 관리하면 된다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퍼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을 관리하는 것 외 다른 대안은 없으니 카지노를 없애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말이다.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의 목적은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생명존중문화를 조성’하는 데 있다. 하지만, 정작 국가의 핵심 정책은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사회안전망 확보보다는 경제성장과 국가경쟁력 향상에 중점을 두고 있다. 생명존중문화란 자살 위험이 높은 사람들을 골라내어 그들에게 생명을 존중할 것을 강요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생명에 대한 존중을 담아 펼칠 때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 나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 그것은 다름 아닌 중요한 타인을 통해 전달받은 이 사회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자살예방 정책은 체계의 유지를 위해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고 믿게 하는 데 목적이 있어 보인다. 카지노를 운영하기 위해 존재하는 중독관리센터처럼.

자살생각은 자살의 위험요인이기도 하지만 생존을 위한 안전전략이기도 하다. 삶의 고비마다 자살을 생각하는 것으로 힘든 시간을 간신히 건너온 이들에겐 정말 그렇다. 나아가 자살생각에서 다른 삶에 대한 욕구를 읽어낼 수 있다면, 자살생각이 지향하는 바가 자살이라는 자기파괴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질서를 위한 내면화된 가치의 해체와 새로운 가치의 형성임을 안다면, 자살생각을 하는 개인은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살 방법을 고민하는 데 에너지를 쏟는 대신,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는 실마리 또한 얻게 될 수 있다.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이해. 어쩌면 이것이 상처로 비틀거리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사회적 지지의 주체적 제공을 통해 상호 돌봄을 회복하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상처투성이인 손을 맞잡고 아픔과 함께 아픔을 넘어가는 것, 이를 상처받은 자들의 ‘정치적 주체화의 연대’(김영민)로 보아도 좋을 것이고, ‘한을 풀어서 서로서로 간에 모둠의 삶을 추구하는’(송희복) 解恨相生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자살생각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개인은 자살을 향해 갈 수도, 자기를 찾고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손을 잡고 삶의 토대를 새롭게 조형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사회는 제도적 개선이 필요한 부분마저 모짝 심리문제로 둔갑시킨 채 정신의학적 자살예방에만 열을 올릴 수도, 자살을 생각하는 이들이 연대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렁그렁한 마음으로 이 세상 가장 외진 곳, 그 마지막 자리를 찾아 나선 이가 다시 삶을 향해 걷는 데 도움이 될까.

수상소감

당선 메시지를 받았을 때의 떨림이 아직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두근거렸던 때가 떠올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친구의 문자를 받고 쉬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인 밤이었습니다. 엎드려 이런저런 기사를 보다 불현듯 일어나 앉았습니다. 공모전 소식을 처음 접한 순간입니다. 주제가 ‘공존’임을 알았을 땐 심장이 힘차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1월 24일 새벽, 저는 끝내 잠들지 못했습니다.
자살생각이 ‘부재에서 열리는 가능성의 세계’와 만난 것은 설악산에 간, 몇 해 전 여름의 일입니다. 생각이 깊어져 이것으로 학위논문의 방향을 잡아갔지만, 어딘지 모를 불편감이 따라 다녔습니다. 이제야 생각해 보면, 양식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지나온 삶을 담는, 갈 길을 추동하는, 학술에세이라는 장을 마련해주신 <교수신문>과 네이버문화재단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부족한데도 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얼마 전, 선운사에 다녀왔습니다. 정읍으로 가는 기차에 오를 때만 해도 머릿속엔 동백꽃이 전부였습니다. 정읍 터미널에서 선운사로 가는 버스 안, 기사님께서 이것저것 물으시더군요. 그분과 나눈 대화 끝에 저는 예정에 없던 길을 걷고 짙은 안개 속으로 빨려들 듯 채석강까지 갔습니다.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가는 곳이 달라지는 저인데, 삶이라고 달랐을 리 없습니다. 제자의 흔들리는 걸음을 견디며 돌아갈 자리가 되어주시는 조용래 교수님, 기억에 남을 한 철을 같이 한 후배들, 오랜 친구 정란이, 꿋꿋하게 곁을 지켜주는 재은 씨,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예리하면서도 따뜻하게 비평해주신 박창수 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김영민 교수님께 특별한 감사를 전합니다. 남편은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교수님의 글에, 삶에 눈이 가도록 넌지시 작업해 둡니다. 그리하여 지금, 여기 제가 있습니다. 제 글도 자살을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노상선 한림대 대학원 심리학과 박사과정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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