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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공포에 누가 저항 하는가: 수용소 사회의 바깥을 향하여
거대한 공포에 누가 저항 하는가: 수용소 사회의 바깥을 향하여
  • 박홍근 고려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 승인 2017.04.26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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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학술에세이 최우수상(요약)

우리 사회는 동일성의 과잉, 동일성의 자기복제로 이루어진 사회다. 경이롭기만 했던 자연에 대항해 19세기에 출현한 현대성(modernity)은 알 수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 분류하고 계산 가능하도록 만드는 작업, 즉 미지의 타자를 먹어치워 소화시키는 동일화의 메커니즘을 추동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모든 국가에게 사회구조를 특징짓는 정보, 생산, 의사소통 시스템을 모두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출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국제적 수준에서 동일한 기준에 의해 무엇이든 대량으로 생산, 소비, 교환 될 수 있는 무차별 자유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지지자들은 일단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벌어진 일은 시스템을 약간 손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통제 가능하다고 믿고 있으며, 실질적인 위험이 초래됐을 때 끔찍한 재앙으로 다가올 가능성을 애써 무시해 버린다. 

2008년 금융위기는 파국의 문턱에 실제 한 발짝 더 다가갔던 사건이었다.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돼 이듬해 세계 금융위기로 번진 사태의 핵심은 전문가들이 정교한 수학공식을 사용해 만든 ‘파생상품’의 부도였다. 파생상품은 성격이 상이한 각종 부채를 한 데 버무려 증권화 한 상품으로 위험을 숫자로 상품화한 것이다. 개인부채든 지방정부의 부채든 상관없이 상품화 되어 전 세계를 돌고 돌던 파생상품은 미국 부동산시장의 경색으로 부동산대출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이 급증하면서 순식간에 부도수표로 전락해버렸다. 금융위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거래되던 파생상품 규모가 세계 GDP의 10배에 달하는 약 600백조 달러였다. 이처럼 금융 시장은 어느 상품시장보다 단일한 글로벌 시스템 하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미국에서 터진 폭탄은 2008년 전 세계 경제를 휘청거리게 만들 수 있었다. 

결국 현대성의 자기면역(전문가) 시스템은 오히려 위험을 승인하며 부추긴다. 전문가들은 현대성의 불확실성이 이제 누구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커지도록 내버려 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회로 하여금 이 불확실성을 시장기회로 이용하여 위험사업을 통한 이윤을 창출하라고 유혹한다. 전문가들에게 위험이란 산업의 측면에서만 판별되며 바로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 현대성의 위기를 촉발시키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다. 현대성의 위험은 현대성이 스스로 과학지식과 함께 ‘의도적으로’ 초래한다는 데 있다.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이윤을 남긴다. 이 말은 위험수위가 전문가에 의해 조절된다는 것이며, 그들은 마치 위험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위험산업’을 가능케 하는데 일조한다. 전문가들은 위험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이윤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위험을 문제 삼지 않으며 위험생산 시스템 자체를 중단시킨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에 의해 부정된 위험은 없는 것으로 치부되지만, 그것은 미지의 거대한 불안으로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로 인해 오늘날 중간계급은 극도의 박탈 불안의 시달린다. 시스템 안에서 세계 규모로 유동하는 위기가 언제 가시화 되어 나를 덮칠지 알 수 없는데다가, 안다고 하더라도 개인 차원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중간계급은 이러한 불확실성을 어떻게든 가시화하기를 원한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주술적인 사고의 발로다. 우리는 내가 있는 ‘여기’가 아니라 ‘저곳’에 있는 것이야말로 재앙이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불확실성을 가시화하고 확실한 무엇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소비상품 중 하나는 하청노동자의 죽음이다. 

하청노동자는 ‘저곳’에 있는 재앙의 대표적 존재로 호출된다. 하청노동자의 죽음에 관한 기사는 죽음이 발생한 시간과 장소만 약간 바꿔서 매 해 의례처럼 보도되며, 우리는 이런 기사를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에 대한 불안 해소를 위해 강박적으로 소비한다. 지난해 5월 대대적으로 보도됐던 구의역에 스크린 도어 정비기사 사망 사고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2015년에는 강남역에서, 2014년에는 독산역에서, 2013년에는 성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하청노동자가 작업 중 사고로 사망했다. 불확실한 현대성의 대역으로서 눈에 보이는 위험이자 희생양으로서 하청노동자는 가시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죽어나가야 한다. 하청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보도될 때마다 그것이 특별한 죽음처럼 이야기되지만, 이러한 스캔들화의 이면에는 하청노동자의 죽음이 사실 스캔들이 아니라는 것, 주기적으로 일상화된 희생제의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개인과 가족에게 닥치는 위험은 오늘날 글로벌 시장이 야기하는 불확실성이며 국가는 이러한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지키기보다 오히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시장이 더욱 잘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한다. 대신 국가는 비경제적인 부분에서 공포를 창출해낸 뒤 이를 막기 위해서 자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러한 분야는 너무나 많다. 음식, 질병, 반사회적 범죄, 이주민 문제, 심지어 테러리즘까지 글로벌 시장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걸리는 모든 것을 문제화해서 그것이 오늘날 우리사회를 위협하는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위험을 국가만이 나서서 막을 수 있으므로 여전히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의 면피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로써 미셸 푸코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말한, 새로운 인종주의가 눈을 뜬다. 인종주의에 입각한 우등한 인종은 열등한 인종을 제거하려고 한다. 여기서 우등이나 열등을 나누는 기준은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열등한 집단은 하나의 집단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인종화’해 탄생한다. 피부색이나 외모에서 나타나는 차이가 아니라 경제적·문화적으로 형성되는 후천적 차이가 선천적 차이로 둔갑하게 된다. 국가는 ‘열등한 인종’의 희생을 과정에서 발생한 ‘부수적 피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 열등한 인종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고가 났을 때 피해자가 바로 열등한 인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 피해자가 우리가 아니라는 보장을 확답 받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으로 더욱 극심한 불안에 빠지고 끊임없이 안전을 갈구하며 우리 안의 ‘열등한 인종’을 만들기에 열중한다. 

만약 하청노동자와 ‘우리’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었을 때 대답은 명확하다. 사망한 하청노동자들은 단지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한 것이며, 우리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는 사실이 그것이다. 우리는 도시의 시민이 아니라, 수용소의 수감자로 살고 있다. 수용소에서 오늘 내가 살아남은 이유는 그저 우연히 내가 아닌 타인이 오늘 죽어나가게 됐기 때문일 뿐 다른 이유가 없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죽음들’은 국적이 없다. 그들은 시민이지만 시민으로 존재해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지는 자가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동안 우리는 하청노동자의 죽음을 그들의 죽음과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지만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우리’로 이분함으로써 하청노동자와 우리 사이의 ‘인종’을 강조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하청노동자를 관용하자고 말하면서도 그들과 우리가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에는 침묵하는 증거다. 

평등의 정치가 관용의 정치로 대리될 때 박해는 신화로 은폐된다. 하청노동자가 그리고 오직 하청노동자만이 위험 그 자체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편재한 위험을 망각하는 행위다. 우리가 왜 수용소 사회에 던져졌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글로벌 불확실성을 감당할 수 없는 개인과, 그 모습을 외면하는 국가라는 전제는 그 사이에 단절을 감추고 있다. 개인들의 연대가 그것이다. 수용소 사회는 환상이 아닌 오늘날 우리에게 도래한 실재이지만, 왜 개인의 자격으로서만 저항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자문할 때 우리는 각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한 間-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는 연대하는 힘이 아직 여전히 선택지의 하나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파국에 저항하는 새로운 힘이 될 수 있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의 위험은 징후들을 거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생제의를 고집하며 그들과 우리의 경계만을 고집한다면 하나의 삶만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수용소 사회에서 모두 ‘평등하게’ 박해받는 삶이 그것이다.

 

수상소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공존을 이야기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관용을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용은 이미 사회질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참아내는’ 것이다. 관용은 베푸는 자들과 받는 자들의 사회적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며 둘 사이의 평등을 거부한다. 관용에 의해 사회에 가까스로 편입된 이들은 사회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사회위기가 닥칠 때면 언제든 사회 밖으로 내쳐질 수 있도록 준비된 희생양인 셈이다. 공존이라는 주제를 통해 오늘날 배제자가 돼야만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왜 사회가 그들을 배제자로 낙인찍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지에 대한 사회적 조건을 살펴보고 싶었다. 바로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공존이란 말을 끊임없이 관용이란 말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성한 학술에세이가 매끄럽게 완결된 글이라기엔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에세이를 통해 많은 분들이 당연하게 여겼던 사회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큼 감사한 일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에세이 형식의 사회과학서들이 전공자를 넘어 대중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는 사실은 대중들이 사회에 대해 알고자 하는 갈증에 연구자들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학술에세이를 준비한 시간은 연구자들만 이해하는 경직된 글쓰기를 해왔던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다른 좋은 글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게 해 준 <교수신문>과 네이버문화재단, 그리고 심사위원들께 감사를 드린다. 

-박홍근 고려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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