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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말살형과 역사에의 욕망: 공존의 권리를 역사화하기
기록말살형과 역사에의 욕망: 공존의 권리를 역사화하기
  • 문병준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 승인 2017.04.26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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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학술에세이 우수상(요약)

그리스와 이집트, 로마의 고대사회에는 ‘기록말살형(Damnatio Memoriae)’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 사람이 이 벌을 받게 되면 그에 관한 모든 기록은 문자와 이미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삭제됐다. 이것은 그의 생명을 빼앗아 존재하기를 그치게 만드는 형벌은 아니었지만 그가 죽은 이후 역사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고대인들에게 이는 위협적인 처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기록말살형은 오로지 당시의 지배층, 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형벌이었다. 처음부터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기회를 가지 못한 평민 혹은 노예들 애초에 모두가 기록말살형을 받은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기록말살형”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共存이라는 단어를 풀이하면 물론 함께 존재함이다. 그러나 함께 존재하기만 하면, 생명만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모두 공존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홀로코스트 등의 민족말살책이나 대규모의 세계대전의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이 함께 존재하기를 택하지 않았던 때가 과연 얼마나 있었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공존이라는 것은 단순히 약자를 살려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 제22조나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등이 말하는 ‘존엄’,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 등을 실현할 권리 등은 보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며, 설령 이에 해당하는 것들이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자신이 사회 속에서 타자들과 실질적으로 공존하고 있다고 여길지는 미지수다. ‘사회보장’,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따라 기본생계, 교육, 재생산권, 여가와 문화향유 등이 보장받는 자들은 그것만으로 사회 내에서 타자와 공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고실험을 통해 얼마든지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논증할 수 있다. 누군가가 진정으로 타자들과 공존하고 있는가는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이 자신이 공존상태임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현대의 주류적 권리 담론은 오로지 한 사람의 현세적 삶의 기간 내를 고려하고 있는데 이 글은 이 때문에 자신이 타자들과 공존상태에 있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특정하지 못하게 되고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공존의 권리를 위해 보장해야 하는 것들을 판단함에 있어 인간의 현세적 삶의 바깥으로 그 시야를 넓히며 그러한 공존의 권리 보장의 형식을 파악하기 위해 하이데거, 후쿠야마, 부르디외 세 사상가의 논의를 검토한다. 

존재의 역사성―하이데거 

현존재는 시간성을 갖고 그러하니 또한 역사적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죽음으로의 선구를 행하는 미래지향적(futural) 성격을 지닐 때 현존재가 본래적인 역사성을 갖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선구를 통해 죽음에 직면하여 부서짐을 경험하고 나서 다시 자신의 현재 위치로 돌아와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그는 본래적으로 역사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충족시킬 때야 비로소 그 현존재가 자기 시대의 그 순간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윌러(Michael Wheeler)는 한 사람이 역사로부터의 유산을 물려받은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것을 창조적인 전유를 통해서 그 유산과 본래적인(진정한) 관계를 맺을 때만 그 개인은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하이데거적 자유론을 도출해내기도 했다. 따라서 현존재의 본래적 역사성이 확보될 때만 그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자유롭다. 

역사의 종말 이후의 역사에의 욕망의 향방―후쿠야마

후쿠야마는 역사가 종말에 이르고 사람들의 삶이 점차 윤택해 질 것이라고 보면서도 그 때문에 자동적으로 인류가 최후의 인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패기와 우월욕망(Megalothymia) 그리고 대등욕망(Isothymia)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패기와 우월욕망은 정치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패기를 발현하고 성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타인을 자기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며, 그러한 지배의 제도화가 정치이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이러한 패기론이 중요한 이유는 역사가 종말을 고한 이 시점에서 인간들은 패기 때문에 바로 그 역사의 종말을, 새로운 건설의 목표가 되는 정치체계(와 경제체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견딜 수 없으리라고 파악했다는 것이다. 후쿠야마는 사실상 패기와 우월욕망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을 정치체계로 본 것이다. 정치체제의 가장 큰 특징은, 더 이상 그것의 변동이 없는 것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그것이 역사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패기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그 패기적 실천의 역사화다. 패기의 소유자이자 주체는 개인들이고 개인들은 패기를 잃고 최후의 인간이 되지 않는 이상 역사를 욕망하는 것이다. 

역사에의 욕망을 위한 공간 생성―부르디외

그런데 후쿠야마가 분석했듯 역사가 종말한 이후에도 인간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은 16세기 일본사회가 보여주었던 방식―가면극, 다도, 화도 같은 인공적인 실천의 장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패기와 우월욕망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는 바로 정확하게 이 점을 다룬 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취미와 취향의 영역과 같은 환상적 규범에 기반한 인위적 장 내에서의 경쟁이라는 것이 어떻게 패기적 우월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만큼 격렬하게 경쟁적일 수가 있는가? 이러한 장 안에서의 경쟁이 장의 역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장의 역사를 만드는 것은 명예와 권위를 지니고 있는 ‘칭호의 보유자’들과 그러한 주류적 위치를 점하지 못한 도전자들 사이의 투쟁이다. 장의 역사는 신기원을 이룬 자와 그들을 단순한 과거로 만들어버리고 자신이 신기원이 되려는 자 사이의 투쟁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장의 역사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문화-취미 경쟁은 모두 이러한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

자기 존재의 승인을 위한 역사에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개인의 역사화는 단순히 개인의 능력과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종언해서도 안 되고,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공간-장이 있어야 하며, 개인의 실천이 주입될 소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대의 진정한 문제는 개인들의 역량이 평균적으로 증대되는 것과는 별개로 개인들이 참여하고 투쟁해 나가면서 자기 존재의 역사화를 꾀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직업적 실천이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를 역사화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게 조직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다.  20세기의 포드, 21세기의 머스크 등은 브레히트의 시에 나오는 알렉산더나 시저처럼 다수의 타자들과 함께 역사를 만들고서는 그 역사를 독점한다. 나머지는 그 단 한사람의 영웅적 주체의 객체가 되어 역사에서 밀려나고 존재가 말살된다. 아이작슨 등에 의해 대표되는 대중적인 역사 서술의 방식도, 그리고 작업의 구조-조직양식도 보통 사람들에 대한 대량의 기록말살형을 함께 집행하고 있다.

어려운 삶 속에서 잘 표면화되지는 않지만 개인들은 여전히 역사에의 욕망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여길 때만 자신이 사회 속에서 타자들과 공존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공존, 역사 속에서의 공존은 현세적 삶의 보장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갖는다. 단순히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고용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이 스스로의 역사적 의미를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하며,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 역시 구상을 수행하는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의 판단과 실천을 서술하는 것을 넘어서 민주적, 민중사적 성격을 확보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이제 모두 역사에의 욕망을 지닌 주체라는 것을 자각했으며, 이제 서두에서 말했던 ‘기록말살형’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공포스러운 것이 됐다. 그러므로 만약 누구도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성을 위한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역사 속에서 지워져버리고 있는 우리의 존재를 그 안에 다시 기입해 넣어야 한다. 

 

수상소감

이 졸고를 수상작으로 선정해주신 심사자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 역시 스스로도 많은 것을 깨우치고 배운 만큼 수상작 선정은 저에게 있어 큰 기쁨이고 또 은혜입니다. 
누군가와 조금만 대화를 나눠 보아도, 그리고 온라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많은 자기표현들을 조금만 주의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사람들은 한 순간도 빠짐없이 인정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것을 “사람들은 인정을 추구한다”라는 단순히 행위원리 차원에서의 명제에 머물게 하는 데서부터, 그것을 공존이라는 인륜적 상태라고 부를 수 있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 권리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과업에 필요하고 또 사용가능한 것이 역사라는 착상에서 시작된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라는 공간은 생각보다 매우 비좁고 경합적인 성격을 가진 재화와도 같아서 사람들은 역사를 두고 경쟁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역사에서의 공존 문제도 현세에서의 공존과 마찬가지로 타인들이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그러나 타인이란 때로는 정말 극단적으로 다르고 그래서 절대 이해할 수도 없고 서로를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사의 갈등현상들이 그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런 존재들과 공존을 꾀함의 어려움은 공존의 권리를 역사화하더라도 쉽게 해소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다만 시작은 소통의 노력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이번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새삼 다시 깨우쳤기에 저에게 이 글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옛날 한 선생님께서 독단과 아집으로 가득 차있던 제게 “아직 인간이 덜 됐다”라고 꾸짖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꾸짖음은 제쳐두더라도 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인지 잘 몰랐고 항상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많은 현실과 부대끼면서 이 글을 쓰게 됐고 그 과정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실천으로 옮기는 첫 걸음에서, 이제 삶으로써 소통을 지향하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이 지면을 빌어 가르침을 주셨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문병준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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