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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省의 冬安居
自省의 冬安居
  • 교수신문
  • 승인 2002.12.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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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말이면 각 일간지나 잡지들이 올해의 10대 뉴스를 선정한다. 아마 올해의 국내 10대 뉴스에는 ○○○ 대통령 당선과 월드컵 4강 진출이 1, 2위에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기자들의 시각에서는 이러한 순위가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고 일반 독자들도 대체로 동의할 지 모른다.

그러나 교수의 입장에서 올해의 10대 뉴스를 꼽아보라면 ‘월드컵 4강 진출’보다는 ‘붉은 악마 현상’이, ‘○○○ 대통령 당선’보다는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가 1, 2위에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교수들은 대체로 표면적인 현상보다는 그것이 지닌 역사적 의미를 중요하게 평가하고, 단기적인 충격보다는 장기적인 추세의 변화를 의미있는 뉴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붉은 악마와 촛불시위의 역사적 의미를 교수들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정리해보자. 우선 두 가지 현상 모두가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자발적인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촉발돼 짧은 시간에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됐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다같이 시민의식의 성숙과 민족적 자존심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이제 대한민국의 다수 대중이 한반도 남쪽의 경계를 넘어서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당당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한편 지금까지 엘리트 지식인들이 선도해왔던 민주화운동과 문화운동의 주도권이 평범한 시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는 명백한 증거다. 세대로 나누자면 성장기에 냉전과 군사독재의 어두운 터널을 거치지 않은, 그래서 갖가지 피해의식과 편견, 아집에서 자유로운 젊은이들이 새로운 변혁의 주체로 등장한 셈이다.

폭발적인 대중적 에너지의 분출과정을 지켜보면서 교수들은 놀라움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이게 어찌된 일인가”하고 망연자실하며 이같은 역사적 전환의 계기를 제공하거나 포착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물론 붉은 악마 현상은 월드컵이라는 스포츠 이벤트를 매개로 삼았으므로 교수들의 경험지평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변명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여중생 압살 사건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문제, 그리고 한미관계의 재정립에 연계된 촛불시위에 대해서는 교수들의 무감각과 무책임,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혐의에서 선뜻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지 않아도 교수들은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강단 경제학의 한계를 절감했고, 학부제를 겪으면서 인문학의 枯死를 경험했다. 설상가상으로 이공계 기피현상과 고시열풍, 지방대의 몰락, 조기 해외유학 붐 등으로 교수들은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교수들은 어찌할 것인가. 의식과 사상의 빈곤을 현실로 인정하고 미국에 대한 학문과 사상과 의식의 사대주의에서 탈출하기 위한 뼈아픈 자성의 冬安居에 들어가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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