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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갑질’ 문제 있지만, 모두 ‘남탓’으로 돌리면 발전 불가능”
“정부의 ‘갑질’ 문제 있지만, 모두 ‘남탓’으로 돌리면 발전 불가능”
  • 이덕환 서강대·화학
  • 승인 2017.04.1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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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25주년 특집] 2017 연구자로서 교수를 말한다

교수들의 연구가 고질적인 고비용·저효율의 깊은 늪에 빠져버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대학에 투입되는 연구비가 크게 늘어나면서 연구 성과가 양적으로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질적으로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뜻이다. 교수들이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연구를 애써 외면하고, 남의 것을 모방하는 쉽고 평범한 연구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연구비 부당 집행, 표절·위조·변조 등의 비윤리적인 성과 발표, 비인격적 학생 지도, 관료·기업과의 부적절한 유착과 같은 연구 윤리 문제도 깨끗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기초학문 투자확대 요구는 교수 이기주의?

연구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대학 현장에서 교육이 실종되고 있는 현실도 심각하다. 실제로 교육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교수들이 지천이다. 연구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교수일수록 현실적으로 교육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공정한 평가가 쉽지 않은 교육보다 연구비와 논문으로 쉽게 평가할 수 있는 연구가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수 업적 평가가 그런 현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결국 학생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교수의 연구에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부담해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 운영비의 대부분을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충당해주고 있는 사립대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물론 교수들의 입장에서 핑계는 있다. 연구 환경이 크게 개선됐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은 신명나게 창의적이고 모험적인 연구에 전념할 수 없게 돼버렸다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의 불합리한 규제와 무능한 관료들의 고약한 갑질 탓에 국가 연구개발 사업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잠재적 범죄자’로 전락하고 있다. 비현실적인 연구 관리 규정과 연구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직된 감사 제도의 문제도 심각하다. 모두가 사실이고, 심각한 문제들이다. 연구자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수준 높은 창의적 연구가 불가능하다. 논문·특허·저술의 숫자에만 의존하는 계량적 업적 평가도 연구의 질적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대학 연구의 모든 문제가 불합리한 관리와 규제, 경직된 관료주의, 그리고 잘못된 평가제도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 교수들의 연구 관행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교수 스스로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면 진정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연구에 대한 교수들의 인식과 정부의 기대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대학에서의 연구가 학문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상향식의 풀뿌리 기초연구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추격형 연구를 진정한 선진·창조형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비를 지원하는 정부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 확대 요구를 교수들의 이기주의라고 여긴다. 교수들이 사회적으로 당장 활용할 수 있는 특허와 창업에 직접 도움이 되는 연구에 더욱 집중해야 하고, 정부 주도의 철저한 기획에 의한 하향식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대학은 정부나 교수들을 위한 연구소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고급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학생이 없는 대학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대학은 오로지 학생의 교육을 위해 운영되는 곳이다. 그래서 대학의 연구도 학생의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는 획기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학생들을 지식 창출이나 기술 개발의 들러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대학에서 수행되는 연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면 연구자로서 교수의 역할은 단순·명쾌하고 선명해진다. 교육기관인 대학에서 수행되는 교수들의 연구도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야만 한다. 교수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최대한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학생들에게 전수해주고, 연구의 모든 과정에서 학생들을 윤리적·인격적으로 이끌어주는 ‘스승’이어야만 한다. 단순히 연구 성과를 내기 위해 학생을 근로자로 활용하는 ‘연구 관리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연구에서 얻어지는 보상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과 공정하게 공유하는 것도 학생들에게 훌륭한 교육적 경험이 된다.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연구비에서 지급하는 수당도 단순히 학생들의 노동에 대해 교수가 개인적으로 지급하는 통상적인 의미의 ‘임금’일 수가 없다. 오히려 고급 전문 인력을 필요로 하는 정부와 기업이 연구를 통한 교육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인센티브가 돼야 한다.

교수의 논문·특허보다 ‘교육 기여도’ 평가해야

교육적 입장에서는 학문 발달에 필요한 지식의 증진이나 국가의 먹거리 창출에 필요한 기술의 개발은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과외소득일 뿐이다. 교육과 연구의 本末이 뒤바뀌는 일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연구비 지원과 연구 성과의 평가에 대한 인식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 교육적으로는 과외소득에 불과한 논문과 특허의 수를 근거로 교수들의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연구가 학생들의 교육과 성장에 얼마나 필요하고, 기여를 했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돼야만 한다. 

국가·사회적으로 대학의 인력을 활용하는 연구개발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대학에 교육과 확실하게 분리되는 별도의 연구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연구 윤리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 사회에서 윤리적으로 신뢰 받지 못하는 교수들의 연구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연구가 교육과 진정한 의미로 융합되고, 윤리적으로 당당한 대학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덕환 서강대·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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