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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부디,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오만까지 끌어안길”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부디,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오만까지 끌어안길”
  •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 승인 2017.04.1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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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좌의 그때 그 시절 26. 부활

어제가 부활절이었다. 올해의 부활절은 세월호 3주기 추모행사에 맞춰 왔다. 세월호의 부활을 의미하는 듯, 마치 하늘이 있어 그들을 다시 살리는 듯, 최후의 그들을 뭍에 올려놓고 왔다. 올 봄 하늘은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인 물리적 하늘 그 이상으로 느껴진다. 기독교인이 아닌 나에게도 이 부활절은 뭔가 뭉클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부활이란 영원불멸하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끔찍하고 놀랍도록 두려운 죽음에서의 부활이라는 그 비슷한 말이 맴돈다.

긴 겨울 동안 사람은 확실히 환경의 동물임을 실감했다. 눈만 뜨면 텔레비전 화면을 켜는 행동에 굴하면서, 아차, 태양열로 반응하는 흔들인형(flip-flap)처럼 인파만 보이면 저절로 손을 흔드는 맹목과 무엇이 다르랴 반성했다. 4월이 되자 나는 일부러 엇박자를 내어 최근의 뉴스지향 습관을 털어내고 일상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 나라 안팎의 세상일을 어차피 잘 모르던 그 시절이 차라리 그리웠다.

그래, 내려갈 사람은 내려갔고, 올라올 배는 올라왔으니 됐다! 그리고는 모처럼 평온이 찾아왔다. 이제 그 나머지는 스스로 귀결되리라.

▲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사진출처= 네이버블로그(http://blog.naver.com/nabca)

대선을 앞두고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모두가 몰입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담보해내야 한다는 열정이 옳겠다 싶기도 하다. 벌써부터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또 다시 막강한 배후가 염려된다거나 어제의 재림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선거도 하고 다른 준비도 했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것이다. 결과는 알 수 없을 일이로되, 설마하니 지난 번 같은 불가해한 샴의 쌍둥이를 보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보아도 그런 일은 가까운 장래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 아무래도 지난 몇 해는 온 나라가 판타지나 공상과학영화 속에서 살았나 보다.

그렇게 4월이 왔고 부활절이 됐다. 그러자 여전히 가슴을 짓누르는 막연한 죄의식이 다시 일렁였다. ‘우리가 죽인 300여 희생자들에게’(고경일) 바친 만화 한 장, 동생의 무사귀한을 위해 놓아둔 팽목항의 운동화 한 짝, 그 사진을 슬쩍 본 기억은 영원하리라. 신나게 수학여행을 떠나서 돌아올 줄 모르는 자식을 어찌 잊으며, 더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항구 팽목항에서 보낸 3년의 연옥을 어찌 잊으라 하겠는가. 아침에 눈을 떠도 마음의 달력은 영원히 그날 2014년 4월 16일에 갇혀있을 그들의 삶을 그들 아닌 우리가 이해한다는 말은 감히 하지 말자.

‘눈을 뜨면 다시 어제 아침’이라는 모티브의 코미디-판타지 영화가 있었다. 미국영화인데, 다람쥐 비슷한 마멋이 제 그림자를 보면 다시 동면에 들어가 봄이 늦는다고, 그렇게 봄이 오는 것은 점친다는 성촉절 즈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로맨스까지 곁들인 그 영화는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자 어제 아침으로 깨어나는 악몽을 털고 내일을 맞게 된다는 해피엔딩이었지만, 팽목항은 영화가 아니었다. 아직 어둑한 새벽을 뚫고 물 밖으로 처참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1073일, 뭍으로 올라와 안착하기까지 또 숱한 날들, 마음속에 멈춰있는 달력과 함께 정지되어버린 삶을 이승의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가족을 잃고 느닷없이 서로 이웃이 되어 살아온 미수습자 가족들이 세월호를 맞으러 목포신항으로 옮길 차비를 하는 장면들을 보게 됐을 때의 부끄러움, 그것은 차라리 쓰라림이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무슨 죄였을까만 그 긴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에서는 성소를 마련해 그들을 위로했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가족들이 세월호의 마지막 항해 길을 소형선박에 타고 뒤따른다는 뉴스에는 또 한 번 가슴을 졸여야 했다. 세월호가 오다가 맘 바꿔 다시 돌아가려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뒤에서 지키면서 달래려는 듯 조용히 뒤따른 그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을까. 감옥에서 탈출시도를 하는 것은 석방이 얼마 남지 않은 죄수들이라던 말이 생각났다.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이 늘 합리적이기만 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다. 자식을 따라 가족을 따라 바닷물에 뛰어들고픈 자포자기의 유혹이 일면 어쩌나. 마침내 뭍에 오른 유령 배, 그 뼈다귀를 넋 없이 바라보며 영원히 자식을 가족을 삼켜버린 바다를 원망하며 이 마지막 순간을 가까스로 이겨내고 있을 그들을, 아픔을 딛고 일어나야 하는 그 찢어진 가슴을 다독이고 싶다. 부활을 믿으세요!

물론 부활이나 영생은 호모 파버의 과학하는 두뇌로는 믿기 어려운 함수이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는 간단하기도 하다. 우리가 부모님의 산소를 찾으면 거기 앉아서는 누구나 마음속으로 대화를 한다. 돌아내려오는 길에는 소통의 후련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가슴에 살아있으면 부활이요, 영생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꽃다운 나이에 꿈에 부푼 시절에 스러진 영혼들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갑자기 나는 그간의 무작정 독서로는 이해되지 않았던 플라톤의 프시케(Psyche)를 이제야 설핏 이해할 것 같다. 프시케는 사람에게서 가장 중요한 영혼이라는 의미이며, 죽음에 의해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된 이 영혼은 오히려 강한 존재가 된다. 육체를 벗어 던지고 자유로운 사색이 가능해지므로, 영혼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보다 좋은 상태로 상승한다. 어쩌면 신의 영역 가까이로. 그 비슷한 이해를 이 봄에 함께 부활했을 젊은 넋들의 존재에서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담쟁이처럼 손에 손을 잡고 다 같이 함께 부활했을 너희들의 넋!

너희들의 넋은 이 땅에서 영원하리라. 어른들의 나태와 무능과 나아가서 오만까지를 해맑은 가슴으로 끌어안고, 세상의 온갖 나약함과 비겁함을 어루만지며, 더는 그러한 비극은 없을 것이라고 오히려 위로하면서. 너희는 아마 늘 헤매는 우리의 나침반이 되려는지도 모르겠다.

서용좌 전남대 명예교수·소설가
전남대 독일언어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하인리히뵐학회장, 한국독어독문학회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 『도이칠란트·도이치문학』등을 썼다. 퇴임 후 소설집 『반대말·비슷한말』, 장편소설 『표현형』 등을 내고 PEN문학활동상, 광주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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