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1 00:30 (일)
[기고] 박근혜는 헌재의 판결에 승복했는가?
[기고] 박근혜는 헌재의 판결에 승복했는가?
  •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 승인 2017.04.15 15: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_ 정치적 승복의 인식론
<교수신문>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재 탄핵이 결정되기 3일 전인 3월 7일, <교수신문> 온라인 사이트(www.kyosu.net)를 통해 최성호 경희대 교수(철학과)「박근혜 대통령의 ‘구명조끼 질문’과 언어철학」(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3473)을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최 교수의 특별기고는 일주일이상 홈페이지 조회수 1위를 기록할 만큼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었다.
탄핵안은 결국 헌법재판관들의 전원일치로 인용됐다. 박 전 대통령이 구속수사를 받고 있는 지금, 최 교수는 또 하나의 글을 보내왔다.
지난 2004년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헌재의 재판을 받던 당시, 한나라당 대표로 있던 박 전 대통령은 “헌재 결과에 승복해야”한다는 발언을 했지만, 2017년의 그는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지 않’고 있다. 당 대표로서 헌재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던 그가 왜 지금에 와서는 승복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최 교수의 분석은 꽤나 흥미롭다. 경희대에서 언어분석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최 교수는 지난 기고와 마찬가지로 박 전 대통령 현재 상황을 언어철학적으로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최성호 교수의 새로운 글을 전문 소개한다.
 
작년 가을에서 올해 봄까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정치적 격동의 클라이맥스는 뭐니뭐니해도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한 헌재의 선고일 듯하다. 촛불 집회에서 시작된 광장의 민의는 국회의 탄핵 소추 결의안으로 모아졌고, 그러한 탄핵 소추 결의안을 인용함으로써 헌재는 광장의 민의에 법의 권위를 부여했다. 그런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한 헌재의 선고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국민주권주의의 승리이며 동시에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완성이었다.

그런데 헌재의 선고가 나온 지 꽤 긴 시간이 흘렀건만 박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해 한 번도 명확한 승복 선언을 내놓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측에서 가타부타 말이 없다보니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파면한 헌재의 판결에 대해 혹시라도 불복하는 것은 아닌지가 최근까지도 세간의 논란이 됐다. 실제로 학계, 시민사회 그리고 야권에서는 박 전 대통령이 삼성동 자택으로 귀가한 직후 내놓은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대국민 메시지가 헌재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불복 선언이라고 보면서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빚어진 갈등과 반목을 치유할 마지막 기회마저 저버렸다고 일제히 비판했다.

민주적·법적 절차의 결과에 대한 정치 지도자의 승복은 중요하다.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국민통합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법과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 확신에서 비롯한다. 정치 지도자가 민주적·법적 절차의 결과에, 설사 그 결과가 자신에게 불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깨끗이 승복하는 것은 법과 제도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고, 나아가 정치적 격변기에 헌정 질서를 안정적으로 수호함에 있어 큰 기여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을 달기 힘들다.

그런데 박 전 대통령이 헌재 판결에 승복했는지에 대해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판결에 대해 명확한 승복 선언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에 대해 불복하는 행보를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청와대를 별다른 저항 없이 나오는 박 전 대통령의 행적만 보면 헌재의 판결에 대한 명시적인 승복 선언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견 그에 승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최근까지 자유한국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던 인명진 목사는 <교통방송>에 출연해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떠난 것 자체가 승복메시지 아니냐고 말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사실상 승복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진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역시 <sbs> 라디오에 출연해 청와대를 나와서 자택으로 복귀한 것 자체가 박 전 대통령의 승복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박 전 대통령이 헌재 판결에 대해 ‘사실상’ 불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우려 속에서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박 전 대통령이 헌재 판결에 ‘사실상’ 승복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들린다. 헌재 판결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침묵이 이런 혼란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긴 하나, 필자가 보기에 그 혼란은 많은 부분 정치적 승복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에서 말미암았다.
 
정치적 승복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과 관련해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은 단순히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 이상이라는 점이 먼저 강조될 필요가 있다. 헌재의 결정에 승복하는 것은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결정의 정당성까지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 박 전 대통령 입장에서 자신을 파면한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과 그러한 헌재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판결에 의해 파면 당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이 더 이상 청와대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그러한 헌재의 판결이 내용적이거나 절차적인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후자에 해당한다. 아무런 저항 없이 청와대를 나오고 또 그 이후에도 헌재의 판결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결정을 수용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로부터 박 전 대통령이 헌재 결정의 정당성까지 수용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이는 앞서 언급한 자유한국당 관계자들의 말이 왜 궤변인지를 잘 보여준다.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와서 자택으로 복귀한 것은 단지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판결을 수용했다는 것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헌재의 판결에 승복한다는 것은 그것의 법적·정치적 정당성까지 수용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청와대에서 나와 자택으로 복귀했다는 사실만으로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판결에 승복했다고 곧장 결론 내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오히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박 전 대통령의 메시지는 박 전 대통령이 내심 헌재 판결의 법적·정치적 정당성을 수용하고 있지 않다는 우려를 낳기에 충분하다.

2000년 미국 대선의 결과를 두고 벌어진 논란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 앨 고어(Al Gore)가 내놓은 승복 연설은 정치적 승복의 본보기로 간주된다. 그해 미 대선에서 앨 고어는 이후에 43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될 공화당의 조지 부시(George Bush)와 박빙의 승부를 펼쳤는데, 최대 격전지인 플로리다주에서는 그 승부가 너무나 박빙이어서 결국 사상 초유의 대선 재검표 사태가 빚어지게 됐다. 일차 개표 결과는 조지 부시가 앨 고어를 근소한 차로 앞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재검표를 통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 숫자였고, 또 그 재검표 결과에 따라서는 2000년 미 대선의 전체 결과가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 연방 대법원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재검표를 중단시켰는데, 이에 대해 당시 민주당 지지자들은 격렬히 반발했다. 이때 앨 고어는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승복하고 그에 따라서 2000년 미 대선에서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록 저는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대해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저는 그 결정에 승복합니다. 국민 통합을 위해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저는 저의 패배를 인정 합니다.” 이러한 앨 고어의 승복 선언은 2000년 대선 개표 결과를 두고 벌어진 미국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는 데 작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중론이다.

그런데 앨 고어의 승복 선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다. 그것은 앨 고어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음에도, 다시 말해, 그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이 옳다고 믿지 않음에도 그에 대해서 승복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어떻게 연방 대법원의 결정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서 승복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앨 고어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이 옳다고 믿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에 불복한다는 말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에 승복하기 위해선 그 결정이 옳다고 믿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인간의 인식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탐구에서 도입된 믿음(belief)과 수용(acceptance)의 구분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철수가 지금 밖에 비가 온다고 믿는 것은 무엇보다도 철수가 지금 밖에 비가 온다는 것을 참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즉, 철수의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명제(지금 밖에 비가 온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판단으로서 철수에게 주어진 증거에 의해 형성되기도 하고 혹은 철회되기도 한다. 어두운 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릴 때 철수는 그 청각적인 증거에 근거해서 지금 밖에 비가 온다는 믿음을 형성하지만 곧 그 빗소리가 누군가의 스마트폰에서 나왔다는 것을 깨달을 때 철수는 그 새로운 시청각적 증거에 근거해 지금 밖에 비가 온다는 믿음을 철회한다.

한편, 수용은 이러한 믿음과 상당히 유사하고 뿐만 아니라 일상적 대화에서 ‘믿다’라는 말로 수용을 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믿음과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영미와 철수가 부부라고 할 때 다음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영미가 낮에 철수가 다른 여자와 팔짱을 끼고 다정히 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 저녁 영미는 철수에게 그 여자와의 관계를 추궁하자 철수는 사업상 만나는 사업파트너일 뿐이라고 강변한다. 한참의 말다툼 후에 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은 영미는 철수에게 ‘그래, 이번에는 그 여자가 사업파트너일 뿐이라는 당신 말을 믿을게. 하지만 다음에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각오해’라고 말하며 그날의 부부싸움을 끝낸다. 이 상황에서 영미가 철수와 팔짱을 끼고 걷던 여자가 철수의 사업파트너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증거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미가 가진 증거, 즉 철수가 그 여자와 다정히 걸어가고 있었다는 증거는 둘의 관계가 사업파트너 이상이라는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럼에도 영미가 그 여자가 철수의 사업파트너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철수와의 부부싸움을 끝내고 싶은 영미의 의지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믿음과 수용의 구분을 제안하는 철학자들은 영미가 철수의 주장을 ‘믿겠다고’ 말할 때 뜻한 바는 엄밀히 말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른 심적 행위, 즉 수용에 관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즉, 영미의 말은 이번에는 철수가 만난 여자가 철수의 사업파트너일 뿐이라는 것을 수용하겠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미가 어떤 명제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 명제를 참으로 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와 무관하게 영미가 앞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위 할지에 관해 숙고할 때 그 명제를 하나의 전제로 포함시키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영미가 철수와 팔짱을 끼고 걷던 여자가 철수의 사업파트너일 뿐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에 대한 증거와 무관하게 일단 그것을 참이라고 가정하면서 앞으로의 판단과 행위를 결정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어떤 명제를 수용하는 것은 그 명제를 믿는 것, 즉 증거에 기반해 그 명제를 참으로 긍정하는 것과 분명히 구분된다. 실제로 영미가 철수와 더 이상의 부부싸움을 원치 않아 철수가 만난 여자가 철수의 사업파트너일 뿐이라는 철수의 주장을 수용하겠다고 말하긴 했어도 내심 영미는 그 둘의 관계가 사업파트너 이상일 것이라고 계속해서 믿을 공산이 크다.

앨 고어의 승복 선언 역시 유사한 분석이 가능하고 그때 그 의미가 한층 분명하게 드러난다. 앨 고어는 연방 대법원의 결정이 정당하다고 믿지 않았고, 그런 만큼 그 결정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승복 선언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 고어는 연방 대법원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수용했다. 즉, 앨 고어는 그 승복 선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증거에 근거해 연방 대법원의 결정이 정당하지 않다는 믿음을 갖는 동시에 미국 국민의 통합과 민주주의를 위해 그러한 증거와 무관하게 그 결정의 정당성을 가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향후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겠다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앨 고어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승복하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그것이 모순이 아닌 것은 영미가 비록 자신에게 주어진 증거에 근거해 철수가 낮에 만난 여자와 바람을 피웠을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갖지만 그와 동시에 철수와의 부부싸움을 더 악화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 둘이 사업파트너 관계일 뿐이라는 철수의 주장을 수용하겠다고 밝히는 것이 모순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추어 승복 선언이란 어떤 법적·정치적 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정치인의 수용과 관련된 것이다. 앨 고어의 승복 선언은 그가 연방 대법원의 결정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무관하게 그것을 수용하고, 그에 따라 향후 그 결정의 정당성을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실천적 추론에서 전제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이렇게 정치적 승복 선언을 정의할 때 명백히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재의 판결에 승복하지 않았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은 헌재의 판결이 진실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이는 헌재 판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박 전 대통령의 믿음을 드러낸다. 그런데 믿음과 수용의 차이점을 부각하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명제에 대한 믿음과 그 명제에 대한 수용이 불일치하는 사례들을 주로 살펴보았지만 실상 그런 사례는 매우 예외적이다. 우리가 어떤 명제에 대한 믿음을 갖는 대다수의 경우 우리는 그 명제를 믿으면서 동시에 수용한다. 왜냐하면 어떤 명제를 참으로 긍정하는 경우 그 명제를 실천적 추론의 한 전제로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이 헌재 판결의 정당성을 수용한다는 명시적 발언을 하지 않은 만큼 박 전 대통령은 헌재 결정의 정당성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용하지도 않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지점에서 믿음과 수용에 관한 철학자들의 구분은 또 하나의 중요한 통찰을 주는데, 그것은 수용은 수의적으로 제어 가능하지만 (under voluntary control) 믿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수의적 제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 내용이 그렇게 어렵진 않다. 영미가 자신의 남편이 바람피우지 않았다고 아무리 믿으려 해도는 그게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영미가 그것을 믿을지 말지는 영미가 자신의 의지의 발현을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종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앨 고어가 미 연방 대법원의 판결이 정당하지 않다고 믿는 것은 앨 고어가 거부할 수 없는, 그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증거가 일단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믿음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영국의 철학자 데이빗 흄(David Hume)을 비롯한 대다수 철학자들 사이의 중론인데, 이를 철학자들은 믿음이 수의적으로 제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반면 수용은 이와 다르다. 철수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영미가 수용한 것은 영미가 철수와의 부부싸움을 끝내고 싶다는 의지의 작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앨 고어가 연방 대법원의 판결의 정당성을 수용한 것은 미국 사회의 통합이라는 대의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의 작용이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내가 무엇을 수용할지 말지는 내가 의지에 의해서 제어할 수 있는 것이고, 이를 철학자들은 수용이 수의적으로 제어 가능하다고 말한다.

보도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파면을 결정한 헌재의 판결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런 만큼 그 판결에 큰 심리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 나름 억울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고 또 그 판결의 정당성을 의심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박 전 대통령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은 박 전 대통령이 수의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재 판결이 정당함을 수용하고 그것에 승복하는 것은 박 전 대통령이 얼마든지 자유로운 의지의 작용을 통해 행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런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이 헌재의 판결에 지금까지 승복하지 않는 것은 박 전 대통령의 자유로운 의지의 작용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앞으로 진행될 형사재판에서의 유불리를 고려해 승복 메시지를 내놓지 않았다는 언론의 추측성 기사도 있다. 하지만 그 개인적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헌재의 판결에 지금까지 승복하지 않는 것이 박 전 대통령의 자유로운 의지의 작용인 이상 박 전 대통령은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는 헌재의 판결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승복이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로서 헌재가 갖는 법적·정치적 권위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헌재 판결 과정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보는 많은 이들의 시각에서 박 전 대통령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뜻한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서울대에서 과학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문화연구센터 수도권 전임 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전임강사, 호주 시드니대 시간연구소 연구원, 캐나다 퀸스대 철학과 조교수를 거쳐, 현재 경희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