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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비관주의’와 ‘의지적 낙관주의’의 사이에서
‘지적 비관주의’와 ‘의지적 낙관주의’의 사이에서
  • 고성빈 제주대·정치외교학과
  • 승인 2017.04.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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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동아시아 담론의 논리와 지향: 이론적 탐색』 고성빈 지음 | 고려대출판문화원 | 729쪽 |38,000원

동아시아담론은 근대의 끝 무렵이자 탈근대의 서광이 비치는 21세기의 새벽에 동아시아 지식계에 등장한 사조다. 냉전적 사고가 해체의 길을 걸으면서, 동아시아는 미완의 근대를 성취하려고 함과 동시에 그 문제점들을 성찰하는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 사조를 동아시아에 어떤 실체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하자는 일종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따라서 상황변화에 따라 부침할 수 있는 운동(campaign)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동아시아의 지성사적 시선에서 영속적인 주제로 삼아 연구를 진행했다. 

이 책은 동아시아담론을 제기하는 지식계의 주요 주체들의 논지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주변부 시각에서 분석하고 참조하면서 동시에 필자의 논리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서술됐다. 기본적으로는 서론에서 언급한대로 지식의 탈경계적 적용에 공감하는 탈국적의 비판적 지식인의 자세를 견지하려고 노력했다. 

근대에 대한 성찰과 탈근대적 문제의식    

동아시아담론은 서세동점의 충격에 대한 저항으로 인해 동아시아의식이 생성된 이래로 서구 근대에 대한 비판과 동아시아인의 자기성찰을 총체적으로 반추하면서 등장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동안 19세기 이래로 영향을 미쳐온 서구적 근대의 거대서사들―민족주의, 국가주의, 부국강병, 냉전이데올로기―이 탈냉전과 함께 효력이 소실되면서 동아시아 지식계는 내부적으로 그것을 대체할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근대적 거대서사의 모방에 따른 부작용과 그 잔재들―국가주의, 역사논쟁, 분단체제―에 대한 해결이 여전히 과제라는 점이다. 따라서 근대와 그것을 받아들인 동아시아의 방식에 대한 성찰의 측면을 강조하면 담론은 ‘성찰적 근대론’이기도 하고, 그 동안의 비판사조를 종합하고 업그레이드 시키고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비판사조의 탐색’이다. 만약 탈냉전 이후에 서구의 신자유주의와 전 지구화현상에 대한 동아시아의 자주적인 발전을 모색하기에 중점을 둔다면 ‘동아시아적 정체성과 대안담론’을 추구하려는 의미가 강하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려 하는 것은 동아시아담론은 상기의 삼자의 문제의식을 결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세동점과 냉전시대에 전개됐던 비판사조를 계승해 탈냉전의 새로운 상황에서 등장한 성찰적 근대론이면서도 비판사조이자 동시에 대안담론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특히 이런 경향은 중심부인 중국과 일본보다 주변부인 한국의 지식계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진보좌파적인 비판의식의 성장과 동아시아담론의 생성과 전개가 연결선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만은 국가정체성의 유동을 겪으면서 그 출로를 자연스럽게 동아시아시각에 두고 대륙에서보다도 활발하게 진보적인 특징을 담아내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일본의 견제를 의식해서인지 지식계에서마저 아직도 대국의식과 동아시아의 주도적 위상에 집착하면서 진보적인 동아시아사고에 인색하다. 일본도 비슷한데 중국과는 달리 소수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의 견해는 상당히 세계시민주의적인 접근을 보이고 있으나, 국가적으로는 여전히 보수적인 색채를 전반적으로 띠고 있다.

필자의 진단에 의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아직도 제국-식민의식과 냉전적 사고의 잔재, 제국과 국가의 경계에서 유동하는 정체성의 소수자에 대한 내부 식민주의, 중심부와 주변부가 서로 다른 동아시아사고를 표방한다는 특성과 더불어 문화적 다양성의 미흡, 비균질적 사회발전 수준 등이 담론의 공감대가 확산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문화와 지식의 탈경계현상이 확산되면서 전 지구화가 전개되는 추세에서도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세계시민의식과 타자에 대한 수평의식이 부족한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아직도 국민국가주의를 상대화하려는 태도가 미약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인 고민은 동아시아를 모호한 의미에서의 ‘방법’으로 삼아, 구체적인 의미에서의 ‘실체’를 구성해내려는 프로젝트가 아닌 탈냉전시대 동아시아에서의 정당한 지배를 촉구하는 ‘비판의 틀’은 무엇인가로 수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공동체라는 국제정치경제적인 거대과제에 집착하기보다 담론이 제시하는 인문학적 상상―탈대국주의, 탈국가주의, 비판적 지역주의, 소국주의―을 비판의 준거로 삼을 수 있는가를 토론하는 작업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진다. 즉, 담론의 인문학적인 비전(vision)을 비판의 기준으로 삼는 게 어느 정도 타당한가를 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연후에야 국가를 상대화해 내가 사는 사회의 다양한 주체들과 공존하는 삶을 모색하는데 더욱 신경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이 진단하는 동아시아적인 특수성, 즉 ‘미완의 근대완성과 탈근대적 문제의식의 이중과제’에 접근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결론에서는 앞에서 서술한 다양한 주체들의 담론에서 추출된 문제의식을 어떻게 비판이론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는지 사고실험을 수행했다. 동아시아發 비판이론의 모색이라는 큰 주제를 세 가지 세부적인 주제로 나눠 토론을 시도했다. 이것들은 각각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연결선을 달리고 있다. 첫째, 근대의 계몽기획과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접목한 이중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의 신비판이론의 논리를 동아시아담론에 접목시켜 동아시아의 공정한 지배를 위한 비판의 준거로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망해 본다. 둘째, 주변부 시각에서 진단한 동아시아상황을 참조해 강조했던 인문학적인 개념들의 유효성을 따져본다. 그중에서 대표적으로 수평주의적 사고를 비판의 기준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토론했다. 셋째, 주변부 시각에서 대국과 국가의 경계에 존재하는 소수자문제를 초국적 정의론을 자원으로 삼아 조망해 보았다.   
 
‘상상의 대안’ 가로막는 ‘지적 비관주의’

필자가 보기에 동아시아담론이 제시하는 인문학적 비전의 사고실험이 지나치게 이상적이기만 하고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현실에서의 실현가능성만을 생각하고 미래의 이상에는 눈을 감아야 한다. 동아시아담론의 지적인 프로젝트는 사실 사회과학의 논리적 시각과 실현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구름을 잡는 것 같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다. 주로 상아탑 이론가들의 이성과 논리에 의존한 이러한 ‘지적 비관주의’는 과학적 분석의 결과라는 이유로 정당화되고 존중받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러나 엄격한 주지주의를 초탈한 그래서 일면 순박하게 보이는 상상의 대안들을 지적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기에 또 다른 ‘기회’의 열림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 즉 ‘의지적 낙관주의’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 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상상에서 출발하는 의지적 낙관주의를 자원으로 삼아 과거와 현재가 아닌 동아시아 미래의 역사를 쓰고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상상의 프로젝트를 실현하기 위한 희망의 사유는 실천의 가능성을 중시하는 사회과학 영역에서도 약간의 후원자를 가지고 있는데, 월린의 ‘비전’과 기든스의 가치지향적인 ‘유토피아적 현실주의’는 공통적으로 현실의 비판을 근거로 한 미래적 이상을 옹호하는 개념들이다. 이들은 모두 지적 비관주의를 넘어 어떻게 인간이 가시적 현실화라는 사회과학적 요청의 부담을 안고서도 새로운 것을 구상하는 인문학적 사유가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

 

고성빈 제주대·정치학과
필자는 영국 런던대에서 박사를 취득했다. 동아시아담론, 중국, 일본, 티베트에 대한 주제로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며 동아시아의 지성사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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