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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졌던 책’ … 구원과 해방 사유하기 위한 디딤돌
‘기다려졌던 책’ … 구원과 해방 사유하기 위한 디딤돌
  • 양창렬 철학연구자·번역가
  • 승인 2017.04.11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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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발터 벤야민: 화재경보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읽기』 미카엘 뢰비 지음 | 양창렬 옮김 | 도서출판 난장 | 272쪽 | 22,000원

저자 미카엘 뢰비(1936~ )는 브라질 태생의 유대계 사회학자다. 1964년 파리에서 뤼시앵 골드만의 지도 아래 『청년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이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한 뒤, 이스라엘, 영국 등을 떠돌다가 1969년부터 파리 8대학,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다. 마르크스주의(체 게바라, 뤼시앵 골드만, 죄르지 루카치 등), 사회학(막스 베버), 낭만주의, 유토피아, 초현실주의, 생태사회주의 등에 관해 30여 권의 저서를 썼다. 이번에 번역된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는 부제가 말하듯 벤야민의 유언장과도 같은 텍스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 대한 주해서다.

벤야민은 1939년 느베르 근처의 수용소에서 풀려난 뒤 죽음의 위협을 느끼며, 이듬해 2월부터 6월 사이에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집필했다. 1940년 여름 나치의 포위망을 피해 파리를 떠나면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글들은 자신의 아파트에 남겨뒀고, 『파사젠베르크』 관련 중요 문서들은 프랑스국립도서관 사서로 있던 조르주 바타유에게 맡겼으며, 나머지 것들은 본인이 갈색 서류가방에 짊어지고 다녔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테제의 배치나 내용이 다소 상이한 여러 편의 사본들이 한나 아렌트,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도라 벤야민에게 (때에 맞지 않게) 전달됐다.

벤야민의 사유를 사상의 용해물로 읽기

벤야민은 1940년 4월 그레텔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맥락을 밝힌다. 전쟁과 전쟁을 몰고 온 비극적 상황 속에서 이 테제를 작성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대략 20년 동안 표명하지 않고 간직해왔던 통찰이라는 것. 벤야민의 이 말은 저자의 독해를 이끄는 실마리가 된다.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독소 불가침 조약을 포함한 당대의 역사적·정치적 맥락에서 읽을 것, 그리고 동시에 그 테제를 벤야민의 사유에 꾸준히 잠복해 있던 사상의 집약으로 읽을 것.

이 책 1장에서 저자는 벤야민에 관한 몇 가지 통념과 거리를 두며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다. 벤야민을 문필가가 아니라 철학자로 읽기. 벤야민의 사유를 신학적·형이상학적 경향을 띤 전기와 유물론적 경향을 띤 후기의 단절로 보지 않고 낭만주의, 메시아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융해물로 간주하기. 벤야민의 연금술을 거친 세 요소는 새로운 화합물이 된다.

첫째, ‘혁명적 낭만주의’의 목적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과거로 우회함으로써 유토피아적 미래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낭만주의의 본령은 메시아주의에 있다. 둘째, 메시아주의는 질적 시간과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의 구분을 함축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진화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의 단절’을 모색하게 한다. 셋째, 메시아주의란 진화가 야기한 파국 속에서 인민 스스로의 자기 해방을 통해 ‘메시아를 스스로 도래시키는 것’이다. 이 세 원천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뗄 수 없게 서로를 참조한다. 

2장에서 저자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한 글자씩, 한 구절씩 분석한다.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메시아주의)의 관계, 과거의 억압된 전통의 회억, 과거의 원상복구를 통해 도래하는 유토피아(무계급 사회), 생산력주의/진화론적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계급투쟁의 중요성, 승리자에게 감정이입하는 역사주의에 맞서는 역사서술, 진보의 귀결인 파시즘에 맞서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기, 파시즘에 무릎 꿇은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의 낙관주의적 숙명론에 맞서는 비관론, 역사의 연속체를 포착하고 중지와 중단을 도입하는 지금시간 등. 저자는 1979년 예루살렘 헤브라이대에서 게르숌 숄렘의 문서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이 역사철학 테제를 알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 뒤 저자는 20여 년 넘게 이 테제를 스스로 읽고, 2차 문헌들을 섭렵했으며, 강의를 통해 자신의 독해를 다듬었다. 2장은 바로 그 독해의 집약이다. 

3장에서는 벤야민 역사철학의 유산으로서, 파국들의 가능성과 대대적인 해방 운동의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열린 역사’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우리 곁에 편재한 전쟁, 종족 갈등, 대량 학살, 인종주의, 파시즘, 생태적 재난 등에 대해 ‘비관론을 조직할’ 필요성, 그리고 동시에 파국으로 직행하고 있는 기관차를 멈춰 세우기 위한 개입을 촉구한다.  

열여덟 개의 짤막한 테제와 두 개의 附記에 대한 주해서인 이 책의 분량은 250쪽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열매는 풍성하고 달콤하다. 이 책의 미덕을 몇 가지만 언급하면 이렇다. 
저자는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를 해석하는 세 전통(유물론적 관점, 신학적 관점, 마르크스주의와 유대 신학이 화해 불가능하다는 관점)과 거리를 두고 유물론과 메시아주의가 어떻게 하나의 사고의 두 표현인지 증명하려고 애쓴다.

벤야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가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샤를 보들레르에 관한 두 번째 시론(「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의 이론적 장치에 해당한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기존 연구에서는 「신학적·정치적 단편」, 「중앙공원」, 『파사주』 프로젝트의 몇몇 노트들과 역사철학 테제의 대목들 사이의 친화성을 강조해왔다. 저자는 벤야민의 초기 저술들(「대학생들의 삶」,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 서론 등)까지 거슬러 올라가 테제들을 벤야민 사유 전체의 맥락에서 읽어낸다. 적재적소에 ‘인용’된 벤야민의 글과 그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마치 벤야민의 텍스트를 ‘구제’, ‘회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생태주의적 전망까지 짚어내

이 책에는 오귀스트 블랑키, 샤를 푸리에, 레온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칼 코르슈 등이 꾸준히 등장한다. 저자는 벤야민을 19세기 유토피아주의자들이나 비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연결함으로써 주류 마르크스주의에서 억압받은 전통의 계보 안에 벤야민을 위치시킨 것이다. 또한 저자는 로마의 유대인 탄압, 프랑스 혁명은 물론이거니와 동시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 신학, 중앙아메리카의 인민 봉기 등을 통해 역사철학 테제를 예증하고 있다. 나아가 진보주의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에 함축된 생태주의적 전망을 읽어내기까지 한다. 이러한 서술은 벤야민의 통찰들을 현재화하는 모범적 방식을 보여준다.

벤야민 선집 출판을 주도하고 있는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한국에서 벤야민 수용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지적한 적이 있다. “기술복제-논문과 비교할 때 벤야민의 사상이 집약된 결정적 텍스트인 역사철학 테제와 같은 글들은 미미하게 수용되고 토론됐다.” 이번에 번역된 연구서는 이 요구에 응답하는 ‘기다려졌던’ 책이라 할 만하다. 또한 국내에서 벤야민 독해를 우회적으로 촉발하고 있는 한 축인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신학,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의 정치미학을 이해하는 데도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한정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동시대인들을 위협하는 임박한 위험에 대해, 지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파국에 대해 주의를 끌어당기려고 애쓰는 화재경보”로서의 벤야민, 동시에 구원과 해방을 사유하기 위한 디딤돌로서의 벤야민과 마주할 때다. 그리고 그 구원과 해방이란 무엇보다 이 땅에서 과거의 억압받은 전통(조선 시대의 민란, 제주 4·3항쟁, 광주 5·18, 여공들의 투쟁 등)을 역사적으로 회억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의 희생자들의 요구를 값싸게 처리해버리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양창렬 철학 연구자·번역가 
필자는 고대 원자론과 현대 정치철학을 연구하며 글을 쓰거나 책을 번역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알튀세르 효과』(공저),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공저)이 있고, 자크 랑시에르, 조르조 아감벤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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