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4:35 (수)
친밀감 들어설 자리에 주체사상 주입 … 北 '암시적 이데올로기'로 동화 활용
친밀감 들어설 자리에 주체사상 주입 … 北 '암시적 이데올로기'로 동화 활용
  • 박금숙 고려대·아동문학가
  • 승인 2017.04.10 12: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24. 남북한 전래동화 속의 분단 장벽

초등학교 5학년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여름방학을 사흘 앞둔 일이었다. 방학하자마자 외할머니 댁에 가려고 마음먹었던 터라 혼자 앞산으로 뛰어가 나무를 껴안고 아주 많이 울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어린나이였지만, 외할머니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앞으로는 마주할 수 없다는 게 가슴이 터지도록 슬펐다.

매년 방학하는 날이면 30 리나 되는 강원도 산길을 걸어 무조건 할머니 댁으로 갔다. 두부를 만들어 팔던 어머니가 우리를 돌볼 시간이 없어 방학만 하면 외할머니 댁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방학 때가 아니어도 외할머니 댁에 가는 것은 지금의 놀이공원에 가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그곳에 가면 외삼촌을 따라 꿩 사냥이나 토끼 사냥을 가는 것도 좋았고, 외숙모가 쪄주는 옥수수며 감자를 실컷 먹는 행복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 좋은 건 간혹 들려주는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였다.

“옛날옛날 아주 오랜 옛날,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에 말이다.”
어린 시절, 머리맡에서 들려주시던 할머니 이야기의 서두는 늘 똑같았지만 내용은 변화무쌍했다. 외할머니 이야기는 부엉이가 우는 깊은 밤까지 계속됐다. 외할머니는 부엉이가 사는 집을 찾으면 벼락부자가 된다고도 했다. 부엉이가 눈이 밝아 세상에 있는 금은보화를 자기 집에 물어다 놓기 때문이랬다. 필자는 가물가물 감겨오는 눈꺼풀을 깜빡이다 언젠가는 부엉이 집을 꼭 찾아 외할머니를 호강 시켜드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잠이 들곤 했다. 외할머니의 죽음은 내 모든 것의 끝이었고 이야기의 끝이었다. 외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로 내 모험과 미래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옛날이야기를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듣고 자란 이는 단지 필자뿐만이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로 그들만의 공상과 모험이 시작됐기 때문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존재는 더 친근했으리라. 또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사랑하는 손주 손녀들이 험한 세상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기에 교훈과 경험을 간접적으로 들려주려는 그들만의 친근한 교육적 전략이었을 것이다.

남과 북의 전래동화 활용 전략

▲ 북한 소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실린 「청개구리」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교과서를 통해 글로 읽는다는 것은 또 다른 맛이었다. 외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감정과 정서를 자극했다면, 교과서에서 읽는 이야기는 지식과 인격을 형성시켜 주었다. 수업시간에 「나무꾼과 선녀」, 「개와 고양이」, 「의좋은 형제」, 「청개구리 이야기」, 「은혜 갚은 까치」, 「흥부와 놀부」 등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선생님은 선과 악의 구분을 명확하게 지어주셨다. 아이들이 바르게 살도록 가르치기 위한 전래동화의 활용은 교육적 효과를 높이기에는 최고의 방법이었다.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필자는 어른이 되어 아동문학가가 됐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남북한 교과서에 수록된 전래동화를 비교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남북한 교과서에 실린 전래 동화가 그 원형성에 관계없이 활용 목적에 따라 쓰임새가 다각적 측면에서 변용돼 쓰이고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특히 교육 목적에 따라 남과 북의 전래동화 활용은 유사성보다 차이점이 더 많았다.

남한에서는 전래동화를 활용해 교육할 때, 이념을 심어주기보다는 상상력을 키우거나 창조적 사고를 넓히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이나 이데올로기 사상을 심어주기 위한 방법으로 전래동화를 더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북한의 교과서에 나오는 몇몇의 전래동화를 살펴봤다. 북한에서는 전래동화 제목 밑에 대부분 ‘위대한 김일성 대 원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신 이야기’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원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신 이야기’라는 글귀를 달아 놓고 있었다.
 
전래동화는 원래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나중에 기록문화로 남게 됐다. 전래동화는 할머니나 어머니가 어린이들에게 “옛날, 옛날 오랜 옛날에…” 라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북한은 이것을 할머니나 어머니가 아닌 ‘어버이 수령 동지’인 ‘김일성’과 ‘김정일’이 들려주어 정치적 지도자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즉, 친밀감을 내세워 전래동화를 읽는 아이들에게 김일성과 김정일을 어버이로 떠받들게 하여 주체사상을 주입하려는 암시적 이데올로기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밀감을 느끼기에 앞서 김일성과 김정일이 할머니나 어머니를 대신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억지스러움이 묻어났다.

또 그들은 전래동화를 개작해 북한 땅을 찬양하고 남한을 폄하하는 데에도 활용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북한의 중학교 1학년은 남한의 초등학교 5학년과 같다)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달나라 만리경」이라는 전래동화의 내용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 북한 인민학교 4학년에 실린 「의좋은 형제」

이 이야기에 나오는 형 토끼는 아픈 동생 토끼에게 줄 약을 구하기 위해 달나라에서 세상에 내려온다. 형 토끼는 “아침의 나라 북쪽은 누구나 다 잘 살고 잘 먹고 무상으로 치료받는 탁월가운데서 제일 좋은 지상 락원”이기에 쉽게 약을 구해가지고 달나라 토끼왕에게 돌아간다. 그것을 본 토끼왕은 “지구에 저렇듯 아름다운 나라, 온 세상에 빛을 뿌리는 곳이 있는 것은 지구의 자랑이고 온 우주의 영광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하지만 ‘남쪽 땅은 생지옥’이고 ‘벌거숭이 산에다, 먹을 것도 없고 위험해서 짐승들조차 살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북한 아이들은 전래동화를 읽으면서 이야기에 몰입되는 동시에 자연히 남한과 북한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생지옥’에다 ‘짐승들조차 살 수’ 없도록 만든 남한의 지도자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자신이 살고 있는 북한을 ‘지상락원’으로 만든 지도자 수령 동지를 위대하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발을 구르며 눈물을 흘리는 이유

1953년 7월 27일 停戰 이후, 남과 북은 정치, 문화, 경제 성장 등 전반에 걸쳐 이질화 됐다. 특히 남과 북은 추구하고자 하는 교육 목적이 달라지면서 초등학교(북한은 2001년까지는 ‘인민학교’라고 칭하다가 2002년부터 ‘소학교’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를 비롯해 중·고등학교의 교과서 역시 세월이 지날수록 극명하게 달라지고 있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교육의 기초단계라고 할 수 있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전래동화 역시, 남북이 추구하는 이념에 맞게 그 내용들을 선택하여 싣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남북한 전래동화 속에 나타난 분단 장벽은 두텁고 높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통일로 나가는 열쇠는 바로 전래동화에 있다. 전래동화는 민족 고유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전 인류적 공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남한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상한 샘물」

서초동 국립중앙 도서관 5층에는 ‘북한자료센터’가 있다. 그곳에서 북한의 아카이브 화면으로 들어가 ‘신화’나 ‘전설’이라는 주제어로 검색해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나 ‘전설’과는 다르게 뜻풀이가 나온다. 그곳에서의 ‘신화’는 김일성 일가를 신으로 모시는 혁명 신화나 탄생설화, 김일성 영웅설화 등이다. 즉 김일성 일가의 모든 행적이 신격화되고 문학적으로 형상화 됐다. 전설 역시 마찬가지다.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나 살아생전에 그가 활동했던 영웅담 등이 전설로 나온다. 이것은 주체문학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67년 김정일이 4·15 창작단을 설립한 것을 기점으로 주체 문학으로 이어지는바 1992년에 그의 저작 ‘주체 문학론’이 발표됨으로써 문학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주체 문학론에서는 문학·예술이 당성, 노동 계급성, 인민성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구현되어야 하며, 그것의 최고 표현은 수령에 대한 형상화로 집약시켰다. 일반적으로 수령과 당, 조국을 부모의 위치에 놓고 인민들을 그들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자녀로 표현하는 것이다.”(박종해, 2000.12, 171)

▲ 남한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스무냥 서른냥」

이렇게 민담, 신화, 전설 등 옛이야기를 포함하고 있는 전래동화에조차 주체사상의 찬양이 난무하다보니 아이들은 다른 세계에 대한 창의적 생각을 할 기회를 접할 수 없다. 또한 어려서부터 모험과 우주의 출발을 마련해 준 전래동화를, 위대한 령도자 동지가 들려주는 것으로 배우고 자랐으니 어찌 수령 동지에 대한 친근함과 애절함이 남다르지 않으랴.

어쩌다 가끔 북한 영상을 볼 때가 있다. 그 영상에는 어른이나 아이 가릴 것 없이 김일성이나 김정일(혹은 김정은)이 나타나면 빨간 꽃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 감격하며, 심지어 울부짖는 어른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최첨단화 된 21세기에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 교과서에 나오는 전래동화를 보고는 이런 현상이 이해가 됐다. 그들의 위대한 수령 동지에 대한 울부짖음과 떨림은 필자가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 흘린 눈물과 슬픔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계화되고 세뇌됐던 친밀감의 표현이라는 것을. 그래서 무지는 비극보다 더 슬프다!

 

박금숙 고려대·아동문학가

필자는 고려대에서 「강소천 동화의 서지 및 개작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아동문학평론>에 동시부문 신인문학상을 받았다. 주요 논문으로는 「두 작가를 동일인물로 혼동한 문학사적 오류」,「1960년대 초 아동문학에 나타난 시대의식」 등이 있고, 공저로는 『한국아동문학사의 재발견』, 『강소천』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