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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학자들의 비판에 대한 반격 …‘해방적 정치’의 실천모색
신철학자들의 비판에 대한 반격 …‘해방적 정치’의 실천모색
  • 박성훈 연구집단 CAIROS회원
  • 승인 2017.04.0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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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 알랭 바디우 지음 | 박성훈 옮김 | 도서출판 길 | 160쪽 | 14,000원

한국 내의 정치 상황은 바야흐로 봄을 맞고 있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시민들의 대통령 퇴진 시위는 탄핵이라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와 함께 3년 동안이나 바다 속에 가라앉아있던 세월호 인양의 소식이 들려온다. 제도 정치권과 분리된 채로 일어난 정치의 사건에 관한 사유가 요구될 때, 사건과 이 사건에 대한 충실성을 진리로 제시하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유보다 더 적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이제 바디우의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라는 책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이 책의 논의는 전반적으로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개념과 재현의 정치로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정치적인 것이란 아주 거칠게 말해서, 정치의 본질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결국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것, 다시 말해 적대다. 이러한 정치의 본질은 오래 전부터 정치철학의 관심사였고, 근대에 이를 중요한 개념으로 부상시켰던 것은 나치스의 계관 철학자 카를 슈미트였다. 2차 대전 이후, 나치스의 전체주의는 일종의 절대악처럼 취급됐고, 정치철학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좋은 국가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절대악으로서의 전체주의를 피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정치철학은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지만, 그 부재를 사유하는 부정의 방식으로 정치를 사유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디우가 말하는 변증법이 분열을 간직하는 사유 방식이라는 점이다. 변증법(dialektike)은 합의나 종합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대화에는 분명히 둘이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결코 둘의 합일이 아닌 분열이 지속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사상가들 중 특히 라캉에게는 결코 기표로 재현될 수 없는 주체가 바로 그런 실재다.

 

특히 이 책이 쓰인 80년대 프랑스 사회에는 자신들을 새로운 철학자라 불렀던 ‘신철학자(nouveux philosophes)’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프랑스의 1968년 5월 혁명 당시 극좌파에 소속돼 학생운동을 했던 전력이 있으나 자신들의 과거를 반성하면서, 윤리화된 정치철학을 주창하고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비판하는 새로운 유형의 우파 철학자들이다. 바디우는 보다 확실한 대응을 위해 이들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무엇보다 80년대 중반에 이미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는 매우 경직돼 있었고, 국가의 소멸이라는 마르크스 자신의 공산주의적 모델로 가는 디딤돌이 돼야 할 당-국가 체제는 해체해야 할 또 다른 형태의 국가와 지배적 정치체제가 돼 있었다. 중요한 것은 신철학자들의 사유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을 지적하고 이를 비판하는 일이다. 이들의 사유가 정치의 어떤 해방적 차원까지도 함께 폐기해버린다는 문제를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폐허에서 (재)시작하기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세 가지 역사적 준거대상에 있어 위기에 처한다. (1)소련의 독재와 공포정치(승리의 형상), (2)베트남의 군사대국화(민족해방전쟁), (3)마르크스-레닌주의 반대해 해방적 차원의 노동해방 운동을 펼쳤던 폴란드의 사례(노동자 운동). 이 세 가지 사례에서 당-국가라는 재현의 차원에 구축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치는 위기에 봉착한다.

바디우는 신철학자들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에 대한 반격을 위해 러시아의 공포정치의 귀결로 형성된 유형 수용소를 고발한 두 사람의 탁월한 러시아 출신 작가인 솔제니친과 샬라모프의 작품을 대조한다. 신철학자들은 솔제니친을 典範的 지위에 올려놓는다. 솔제니친이 유형 수용소의 참상과 잔혹함을 기록한 훌륭한 소설가라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솔제니친의 기록에서 유형 수용소와 공포정치는 러시아 민족의 영성 고양과 정화의 과정으로 그려지며, 거기에서 스탈린은 러시아 민족에게 내려진 고난(십자가)이 된다. 여기에서 정치는 절대적인 범죄(혹은 악)이고, 수용자들은 희생자이며, 그 결과는 정치의 부재다. 이에 반해 샬라모프는 참혹한 수용소 안에서도 수용소 체계와 패거리에 소속되기를 거부하며, 인간으로 남고자 하는 인간상을 그려낸다. 수용소 안에 정치범은 없으며, 자기의 유죄를 주장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문제는 무죄-아님의 발명이며,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무죄를 가장해서는 공포정치는 결코 종식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바디우는 과감하게 이미 완결된 주기를 주파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혹은 그 자체로 헤겔주의에 따라 마르크스주의화된 정치의 구축물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마르크스주의의 구원과 (재)시작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의 폐허에서 (재)시작을 위해 붙잡아야 할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역량의 ‘있음’이다. 

이 있는 그대로의 ‘있음’으로부터, 마치 공백처럼 무시되는 어떤 것으로부터 『존재와 사건』에서 전개될 사유의 구성요소들이 예고된다. 정치에 내재하는 둘의 분열을 간직하는 비지배의 정치 또는 해방의 정치와 관련한 변증법적 개념으로 사건, 공백, 하나로 셈하기, 상황의 구조, 전정치적 상황(공백의 가장자리 또는 사건의 장소), 사건, 개입 등의 개념들을 말이다. 변증법적 사유의 프랑스 사상가들인 파스칼, 루소, 말라르메, 라캉 또한 『존재와 사건』이 소개하는 중심인물들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바디우가 말하는 변증법이 분열을 간직하는 사유 방식이라는 점이다. 변증법(dialektike)은 합의나 종합을 위한 대화가 아니라, 대화에는 분명히 둘이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결코 둘의 합일이 아닌 분열이 지속되는 과정이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한 사상가들 중 특히 라캉에게는 결코 기표로 재현될 수 없는 주체가 바로 그런 실재다.

정치적 사건에 충실한 주체의 양상

지금까지 본 것처럼, 바디우의 논의는 당-국가 중심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파괴와 이에서 벗어난 해방적 정치의 재구성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전반에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사건과 이에 충실한 주체의 양상에 관한 사유는 단순히 마르크스주의 정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잠시 우리의 상황을 살펴보자.

우리는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유래 없는 탄핵 정국을 통과했다. 하지만 촛불시위 자체를 사건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대통령의 비선이나 이를 통한 부패 혐의로 촉발된 이 국면에는 이 사태를 사건으로 선언하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자발적인 시민들의 참여와 평화롭고도 자발적인 규율 아래 진행된 모든 행사에는 어떤 찬사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통령 탄핵으로 가는 국면에서 그 진행 상황은 이미 정치적 사건에 주체의 실천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일에 대한 대중적 실천일 뿐이라 여겨진다. 오히려 이 엄청난 결과는 세월호 사건과 이에 충실한 주체인 세월호 유가족의 실천에서 유래한 귀결이다. 그 징후는 박근혜 정권의 내리막이 시작된 시점이 바로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은 그저 단순한 참사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박근혜 정권의 실패의 예시인 것이다. 또한 세월호 사건을 해석하고 이로부터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해온 세월호 유가족은 어떤 의미에서 보더라도 바디우가 제시한 주체의 특성에 부합한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박근혜 정권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들을 억눌렀으나, 세월호 사건의 주체는 지난 3년 동안 결코 그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함께 조직돼 세월호 인양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까지 버텨왔고, 이들을 억압하던 정권은 대통령 탄핵과 함께 무너졌다. 물론 이 국면에서 세월호 사건이 어떤 귀결로 이어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다. 아직 우리는 그 국면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오늘 이 나라에 살아가는 자로서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았던 진실 또한 함께 인양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지금을 돌아보며, ‘그때 우리가 겪었던 바로 그 일이 어떤 진정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었구나' 하고 말할 수 있도록.

 

박성훈 연구집단 CAIROS회원
원래 생물학 전공자였지만 지금은 철학과 신학 관련 책들을 번역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의 『행복의 형이상학』 피터 홀워드의 『알랭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 테드 W.제닝스의 『데리다를 읽는다/바울을 생각한다』 등을 번역했으며, 알랭 바디우의 『비트겐슈타인의 반철학』 등을 함께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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