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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보편 정서에 호소하는 ‘아동문학’ … 민족 동질성 회복에 중요한 장르
인류 보편 정서에 호소하는 ‘아동문학’ … 민족 동질성 회복에 중요한 장르
  • 장정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 승인 2017.03.27 14: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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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23.방정환의 「만년샤쓰」와 북한 아동문학의 변화
▲ 소파 방정환

박물시간이었다.
“이(齒) 없는 동물을 아는가?”
선생님이 두 번씩 거푸 물어도 손드는 학생이 없더니, 별안간 ‘넷’ 소리를 지르면서 기운 좋게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음, 창남인가. 어디 말해 보아.”
“이 없는 동물은 늙은 영감입니다!”
“예에끼!”
선생은 소리를 질렀다. 온 방안 학생이 깔깔거리고 웃어도, 창남이는 태평으로 자리에 가 앉았다.

이것은 방정환의 대표작 「만년샤쓰」의 첫 대목이다. 이름이 창남이요 성은 韓가. 당시 인기 높았던 安昌南과 이름이 닮았다 하여 ‘비행가’라는 별명을 얻었던 소년. 가난 속에서도 쾌활하며 유머와 재치 만점인 일제 강점기 아동문학의 대표 캐릭터 ‘창남이’는 이렇게 태어난다.

집이 구차하고 가난한 탓에 추운 겨울에도 내의를 입지 못하는 창남이는 상의를 벗으라는 체조 선생의 명령에 주춤거리다가 할 수 없이 맨몸-‘만년 샤쓰’-를 드러낸다. 눈이 먼 어머니와 살고 있어 헤어진 옷을 기워 입고 맨발에 짚신을 걸친 채 학교를 다녀야할 만큼 불우했던 소년의 구차한 사정은 작품의 말미에서 백일하에 밝혀진다.

암울했던 시대 분위기 속에서 꿋꿋한 용기와 인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창남이 이야기는 당시 슬픔과 압제에 갇혀 있던 조선 소년들에게 눈물과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 작품은 ‘가난 속에서 더 가난한 이를 돕고 살아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동족애 정신을 강하게 발산시켜 준다.

「만년샤쓰」가 <어린이>에 처음 실린 것은 1927년 3월. 어언 이 작품이 발표된 지도 90년째. 남한에서 이 작품은 방정환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며 오늘날까지 초등 분야 인기 도서로 꾸준히 향유돼 왔다. 그렇다면 북한의 사정은 어떨까. 분단 이후 방정환과 민족주의 아동지 <어린이>는 ‘반동적 순수 아동문학’으로 폄하됐다. 대신 북한은 계급주의 아동지 <별나라> <신소년>을 그들 아동문학의 기원으로 세웠던 것이다.

다음은 북한 아동문학사 서술의 단초를 연 송영의 『해방 전의 조선아동문학』(1956)에 나오는 내용이다.

▲ 송영의『해방전의 조선아동문학』. 이외 사진들은 장정희 교수가 제공했다.

“방정환의 <어린이> 사상이란 최남선, 리광수의 반인민적인 부르죠아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중략) 방정환은 최남선 등의 ‘색동저고리’ 사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더 교묘하게 강화하면서 조선 소년들의 혁명 의식을 말살하기 위하여 반동 잡지 <어린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게 가난한 창남이로 하여금 계급적 반항 대신에 무기력하고 패배주의자로 만들어 놓았으며 눌리는 사람들의 빈궁한 원인을 우연한 화재로 바꾸어 놓으면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음폐하고 옹호하였다. 그리고 반일 계급주의 대신에 부르죠아 인도주의로 대체하였다. 이 얼마나 민족 반역적인 것인가.”(송영, 『해방 전 조선아동문학』, 1956)

1960년대 나온 윤세평의 『현대조선문학선집(아동문학집)』(1960)을 보더라도 권환·엄흥섭·신고송·박아지·정청산·안준식·김북원 등 <별나라>와 <신소년>을 무대로 활약한 계급주의 아동문학 작가 작품만 소개됐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마찬가지 형편이었다. 북한 김일성종합대 문학과 교재로 출판된 <아동문학>(1981)에서조차 ‘방정환’이라는 이름은 서술 자체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에서 방정환과 그의 작품을 정식으로 소개한 것은 1993년부터일 것으로 파악된다. 『1920년대 아동문학집』(1993)에 방정환의 동요가 「형제별」, 「늙은 잠자리」 등 6편이 실리고, 같은 해 <아동문학> 9월호에 「만년샤쓰」가 방정환의 ‘단편소설’로 실렸다. 분명하게 포착되는 변화다.

방정환에 대한 북한 아동문학계의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1992년 김정일의 『주체문학론』이다. 김정일은 주체문학론에서 ‘문학 작품은 비록 개인의 창작물이지만 일단 시대의 요구와 인민의 지향에 맞는 훌륭한 작품으로 창작돼 인민의 사랑을 받게 되면 그것은 인민의 소유물로 민족의 귀중한 재부로 된다.’는 지적을 하며 방정환을 ‘근대 아동문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 작가’로 높이 평가한다. 이후 북한에서 방정환 문학은 ‘비판적 사실주의’로 수용되기 시작한다. 「만년 샤쓰」에 대해서도 ‘무산 소년의 계몽과 헌신’이라는 호의적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

얼마 전 필자는 방정환에 대한 북한의 인식 변화 과정 연구를 진행하면서 북한 문예잡지 <조선문학>에 「근대 아동문학의 개척자 소파 방정환」(김룡화, 1995)이 실린 사실을 확인했다.

이 평문은 잡지 4면에 걸쳐 방정환의 생애와 활동, 업적을 총망라함은 물론, 그의 대표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것은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개척자’로서 방정환의 위상을 북한 문학계에 뚜렷하게 인식시킨 최초의 평론이라 할 수 있다.

▲ 북한의 교재 아동문학

“192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 흔히 ‘애자식’, ‘애놈’, ‘애새끼’, ‘자식’ 으로 낮추어 부르기가 일쑤였고 존대한다는 것이 ‘아이’라고 부르는 정도였다. 아이들의 인격은 몹시 무시되었으나 어른들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 문제를 놓고 정환은 늘 깊은 생각에 잠겨 숙고하였다. 원래 ‘아이’와 ‘소년’, ‘소녀’ 등의 말은 순수한 우리 말이 아니라 한자에서 따온 말이여서 사람들에게 친숙감을 주지 못한다고 정환은 생각하고 있었다. (중략) 어린이들을 더 없이 사랑하는 정환이었기에 그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어린이’라는 말을 생각하였고 세상에 나오게 하였다.(중략)

실로 방정환은 일제의 탄압이 극도로 심해져서 우리 말과 글이 억제당하고 있던 시기 잡지 『어린이』를 창간함으로써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넋을 심어 주는 데 적지않게 기여한 진보적 아동문학 작가였다.”(김룡화, 「근대 아동문학의 개척자 소파 방정환」, 1995)

‘민족 반역자/ 반동 부르조아 작가’(1956)에서 ‘진보적 아동문학 작가/ 근대 아동문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한 작가’로 방정환의 위상 변화가 이뤄지기까지 40여 년이 걸린 셈이다. 이러한 북한 문예계의 최근 평가는 우리 남쪽의 평가와 크게 상반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사점이 있다고 본다.

적어도 ‘근대 아동문학의 개척자’ 방정환을 기점으로 하는 통일 아동문학사 서술의 일단을 합의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방정환의 대표작 「만년샤쓰」는 어떤 면에서 남북 아동문학의 이념 차이, 분단의 그늘을 극명하게 안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감동을 주는 뛰어난 아동문학은 세월을 넘어 이념의 장벽을 넘어 결국 어린이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준다.

“그러나 네가 거짓말을 하더래도 어머니께서 너의 벌거벗은 가슴과 버선 없이 맨발로 짚신을 신은 것을 보시고 아닐 것이 아니냐?”
“아아, 선생님…….”
하는 창남이의 소리는 우는 소리같이 떨리었다. 그리고 그의 수그린 얼굴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그의 짚신 코에 떨어졌다.
“저의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멀으셔서 보지를 못하고 사신답니다.”
체조 선생의 얼굴에도 굵다란 눈물이 흘렀다. 와글와글하던 그 많은 학생들도 자는 것같이 고요하고, 훌쩍훌쩍거리면서 우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조용히 들렸다.

「만년샤쓰」의 마지막 대목이다. 쾌활하고 유쾌하던 소년 ‘창남이’의 수그린 얼굴에서 떨어지는 굵은 눈물. 그것은 어쩌면 눈이 먼 어머니와 같이 불구가 돼버린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절한 슬픔이 아니었을까. 체조 선생, 창남이, 이들을 둘러싼 학생들의 눈물. 이 뜨거운 눈물에는 이념도 이데올로기도, 분단의 장벽도 없다. 오직 동정과 깊은 유대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서 ‘아동문학’은 해방 전부터 성인문학 못지않은 극심한 이념 대립 양상을 띠었다. 그러나 분단 70년을 맞은 오늘날 인류 보편의 정서에 호소하는 ‘아동문학’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분단 극복과 동질성을 회복시켜 줄 유력한 장르가 되고 있다.

 

장정희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1998년 <아동문학평론>에 동화가 당선됐다. 부산대를 거쳐 고려대 대학원에서 ‘방정환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동화집 『마고의 숲 1,2』, 『장성유동화집』, 『열한 그루의 자작나무』, 학술서 『한국 근대아동문학의 형상』, 교양서 『나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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