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21:10 (목)
'조용한 삶을 살지 않은' 초현실주의 화가의 초현실적 망명
'조용한 삶을 살지 않은' 초현실주의 화가의 초현실적 망명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3.27 14: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5. 화가 막스 에른스트
▲ 막스 에른스트 초상. photo=Claudia-Biddle. 출처=http://www.widewalls.ch

독일 망명 지식인 지도에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가 등장하는 것은 1941년 4~5월 경 남프랑스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에서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1940년 6월 프랑스 국토의 60%가 나치 독일군 치하에 놓이게 되자 프랑스에, 주로 파리에 머물던 독일 망명 지식인들은 남프랑스로, 혹은 스페인을 통과해 포르투갈로 도망쳐 신대륙으로 망명의 길을 재촉하던 시기였다. 막스 에른스트 역시 다른 지식인들처럼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마르세유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막스 에른스트는 왜 이제야 망명 지식인 지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던 1933년은 그렇다 치더라도, 1937년 그 떠들썩했던 뮌헨 ‘변종예술 전시회’를 통해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변종예술가로 낙인이 찍혔는데도 막스 에른스트의 망명에 관한 이야기는 왜 그동안 잠잠했을까.

이야기가 잠잠했던 배경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이 아니라 지금 막 프랑스에서 망명의 길을 떠나던 중이었다. 에른스트는 이미 1922년부터 파리에 머물면서 활동했던 전위예술가, 그중에서도 초현실주의 화가였다. 독일이 시끄럽게 정권교체를 하고 나치 문화정책이 예술가들에게 철퇴를 휘두르던 시절, 그는 고국의 현실과는 상관없이 타국 프랑스에서 초현실주의적인 삶을 영위하며 파리의 세느강변에서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게 되자 급기야 망명을 서두르던 중이었다. 초현실주의는 현실을 초월한, 아니 문자 그대로 프랑스 말로 현실 위의 예술행위였다. 그런데도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현실적으로 독일인이었고, 초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른스트는 프랑스인들에게 ‘적대 외국인’으로 지목돼 수용소에 수감됐고, 나치 독일군이 진주하자 이번에는 나치에게 체포돼 수용소 수감생활을 했다. 그러니 이제 프랑스는 더 이상 그가 머무를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아무리 초현실주의자라고 해도 이제 현실로 끌려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망명에 이르는 초현실주의 화가의 내면 풍경

이러한 의미에서 막스 에른스트를 소개하자면 ‘현실’과 ‘초현실주의’ 두 방식을, 아니 두 커다란 범주를 동시에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해 이때 현실은 유럽 사정이고, 초현실은 예술, 혹은 막스 에른스트의 독특한 기질이나 인생관으로 이해해도 된다는 뜻이다. 논의를 위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양쪽을 아우를 수도 없는 ‘현실’과 ‘초현실’ 사이에 막스 에른스트는 자리하고 있다. 에른스트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연구에서도 현실과 예술,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항상 고려할 수밖에 없는 것은 기초사항에 속하기도 한다. 아무리 사회가 급박하게 돌아가도 인간의 본능적인 삶은 영위돼야 하고, 아무리 예술이 고상하고 사랑이 따듯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막스 에른스트는 파리에 장기간 체류했던 독일인이고, 초현실주의 화가였다는 사실에서 독일 망명 지식인을 조망하는 풍경의 범위에 넣을 수 있다.

▲ 루이제 슈트라우스와 만나 결혼한 다음해 사진. 쾰른에서 독일의 다다를 결성하던 당시의 사진이다. 왼쪽부터 건축가이자 화가인 한스 한센, 막스 에른스트, 유명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리고 요하네스 테도오르 바르겔트. 앞줄이 루이제다. 1919년의 초기 다다이즘의 현장을 보여주는 역사적 자신이다. 막스 에른스트박물관 소장.

나치 등장으로 인한 유럽의 현실은 이미 세계사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초현실주의와 그 예술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막스 에른스트의 망명에 이르는 예술적 내면 풍경을 조명해 내는 일이다. 왜냐하면 독일출신 초현실주의 화가가 그동안 어떻게 현실과 대면하고 있었고, 이 초현실주의 화가를, 그가 창조해낸 예술품을 왜 나치가 그토록 변종예술로 폄훼하고 비방해 댔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음 이 초현실주의 화가의 망명이 유럽 미술에, 더 나아가 20세기 세계미술사 변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추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법론적으로는 막스 에른스트가 초현실의 세상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초현실의 세상에서, 초현실의 예술세계에서 그를 추적하는 것이 올바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왜냐하면 막스 에른스트야 말로 예술과 인생을 살며 초현실적인 망명을 떠났고, 본인에게는 독일의 사정이나 망명보다도 예술과 인생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1941년 당시 마르세유에는 막스 에른스트 이외에도 앙드레 브르통, 마르셀 뒤샹, 벤자멩 페레, 오스카 도밍게스 등 초현실주의자들이 미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미국에서 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에른스트에게 이미 보내줬기 때문에 그는 다른 망명객들보다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입국비자를 얻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입국 비자를 지녔다 할지라도 미국 행 선박에 승선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막스 에른스트도 아무리 미국에 있는 아들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갓 종이쪽지에 불과할 수도 있는 상황 속에 있었다. 마음으로 믿는 바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1941년 5월 1일, 막스 에른스트는 미비한 서류를 들고 무조건 세관직원과 부딪쳐 보기로 결심했다.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거나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미국 비자를 얻거나 배에 승선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에른스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최근 몇 년 동안 그린 작품들을 세관건물 바로 옆에 세워 놓았다. 세관직원들은 진열해 놓은 에른스트의 작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설명을 부탁했다. “저는 혼신을 다해 그렇게 많은 온기와 에너지와 확신을 이 작품 속에 불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해석이 단순한 단어들로 파악되기를 제 자신에게 강요합니다. 저는 이 그림들이 나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막스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미술에 대한 설명은 듣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과의 운명적인 만남

▲ 페기 구겐하임과 에른스트.

운명은 그의 편이었을까. 막스 에른스트는 이때 마르세유에서 미국 갑부의 딸로 전설적인 (미술품)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 1898~1979)을 만나게 된다. 화가와 미술품 수집상 간의 만남이었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만남이 아니었다. 구겐하임은 예술에 대한 탁월한 안목과 재력을 바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고, 때에 따라서는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미술시장의 큰 손이었다. 페기 구겐하임은 에른스트의 작품을 보자마자 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 자리에서 최근에 그린 에른스트의 모든 작품을 구입했다. 페기는 그것만으로 일을 끝내지 않았다.
 
페기 구겐하임은 미술품뿐만 아니라, 남자를 알아보는 본능적인 재능을 소지한 여자였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미술품을 보면 꼭 구매를 해야 했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꼭 품안에 넣어 잠을 자고야 마는 여자였다. 공허함을 채우듯 예술에 탐닉했고, 섹스에 중독이 된 듯 남자를 바꿔가며 잠을 잤다. 두 번 결혼했고, 수많은 남자들을 번갈아 갈아치우며 상대했다. 예술에 골몰했고, 性에 탐닉했다. 그것이 그녀의 생활방식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마르세유에서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발견한 것이다! 미남에다 남자 맛을 풍기는 막스 에른스트를 마주하고 선 것이다! 막스 에른스트의 예술이야 말로 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작품이었고, 막스 에른스트야 말로 외모와 예술혼을 동시에 지닌, 남자를 아는 여자들의 진정한 남자였다.

그는 페기 구겐하임의 도움으로 194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마르세유에서 미국 망명을 준비하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함께였다. 독일인만이 아니라, 유럽 예술가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수 있다. 이들의 미국행은 바로 유럽 초현실주의 예술의 미국행이었고, 미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이전하는 과정이었다. 이 미술사적 의미를 놓친다면, 에른스트의 미국행은 단순한 망명에 지나지 않게 된다. 구겐하임과 함께 포르투갈의 리스본을 출발한 막스 에른스트는 1941년 7월 14일 뉴욕에 도착했다.

에른스트에게는 망명의 길이었지만 페기 구겐하임에게는 유럽의 대표적인 작품을 전리품처럼 미국으로 운반하는 ‘예술이전’ 길이었다. 더구나 그 그림을 그린 미남 화가 막스 에른스트는 물론, 별처럼 빛나는 파리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까지 싣고 미술의 불모지이자 장차 유럽 화가들로부터 배워 새롭게 거듭날 신대륙을 향한 의기양양한 귀환이었다. 이렇게 페기 구겐하임은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오늘날의 미국 미술계에 정초를 놓아준 셈이다. 그렇게 미국에 도착한 막스 에른스트와 구겐하임은 그해 12월 결혼에 이른다. 페기 구겐하임이 막스 에른스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몇 달을 가지 못했다.

다재다능했던 모던 예술가 … 수많은 기법들 창안

▲ 「비온 뒤의 유럽」(1933)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출신의 화가다. 그 중에서도 초현실주의 궁정화가다. 서양문예사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인 궁정화가라는 과도한 말을 굳이 차용한 이유는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즉 초현실주의 화가 중에서도 중심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래픽디자이너이고 조각가다. 전위파예술이라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작가였고,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수많은 예술기법을 발견한 사람이 막스 에른스트다. 나무판, 잎, 천 등 면이 올록볼록한 것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 등으로 문지르는 수법인 ‘프로타주(Frottage)’, 색을 두텁게 칠한 후 각종 도구를 이용해 표면을 긁어내는 기법인 ‘그라타주(Grattage)’, 융기와 침강 수법인 ‘조화 진동(Oszillation)’이 그가 새로이 발견한 회화기법이다.

그 이외에도 나무판이나 하드보드지 등에 종이, 헝겊, 나뭇잎, 핀 등 여러 가지 사물을 배치하고 잉크를 칠해 찍어내는 ‘꼴라주(Collage)’,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 붙이는 ‘데칼코마니(Decalcomanie)’가 막스 에른스트가 발전시킨 20세기의 회화 기법들이다. 막스 에른스트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보면 놀라움과 황홀경에 빠진다. 「신부 옷 입히기」, 「황야의 나폴레옹」, 「비온 뒤의 유럽」은 유명하다니 자꾸 보게 되고, 새의 형상을 한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 색깔과 함께 신비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

막스 에른스트는 다재다능한 모던 예술가에 속한다. 쾰른에서 반란의 다다이스트로 시작한 후 1922년 파리로 옮겨 초현실주의의 선봉장이 된 화가다. 다다이즘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로 망명해 온 작가들이 일으킨 反문명, 反합리주의 예술 운동으로, 전쟁의 살육과 파괴에 대한 증오와 냉소를 기본 정신으로, 모든 문화적 가치, 전통적 가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며 예술 형식의 파괴와 부정을 주장한 전위적인 예술운동이다. 전통적인 문명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강한 비판의식이 기저에 깔려있다. 기성 기존의 모든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개인의 원초적인 욕구에 충실하려고 했던 예술운동이다.

에른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 복무 후 요하네스 바겔트, 한스 아르프와 함께 쾰른 다다(DaDa) 그룹을 창립했다. 전쟁에서 귀향한 후 1918년 말 유대혈통의 예술사학자이고 언론인, 그리고 화가인 루이제 슈트라우스(Luise Strauß, 1893~1944)와 결혼한 터였는데, 그녀 역시 다다그룹에 동참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유대인 부잣집 딸이었다. 1920년 그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한스 울리히가 태어났는데, 그 아들이 미국에서 마르세유로 미국입국에 필요한 서류를 보내줬다. 이 아들은 후일 아버지에 대한 전기를 쓰며 ‘결코 조용하게 살지 않은 사람’이라고 기술했다. 에른스트의 첫 번째 부인인 루이제 슈트라우스는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했다. 쾰른 다다 창립 멤버들은 처음에는 표현주의로 시작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현실경험 때문에 다다이즘으로 방향을 튼 사람들이었다. 에른스트는 특별히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본대학교에서 철학, 심리학, 예술사를 전공했다.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 막스 에른스트는 노발리스와 헤겔을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았고, 막스 슈티너와 프리드리히 니체를 위대한 비판적 사상가로 평가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며 지그문트 프로이트 저작을 접했고, 정신병 예술에 심취했다. 

▲ 캐링턴과 에른스트. 그녀는 에른스트에 관한 글을 쓰며 결혼하지 않고 그냥 사랑하는 사이로 지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와 ‘꿈의 해석’을 접해서 인지, 아니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선 것인지 막스 에른스트는 1922년 초현실주의자인 앙드레 브르통(Andr? Breton, 1896~1966) 일파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결국에는 초현실주의 미술 분야에서 중추적인 인물이 된다. 막스 에른스트는 첫 번째 부인과 자식 등 가족도 고향 쾰른에 남겨둔 채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현실보다는 초현실의 길을 찾아 떠난 것이다. 가족보다는 예술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19년에 탄생했다. 우리는 초현실주의 설명을 위해 초현실주의의 정신적 지주인 브르통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브르통은 로트레아몽 백작의 시집에 나타난 난폭하면서도 정확한 표현 속에서, 그리고 독일 낭만주의와 프랑스 상징주의가 발견하려고 애썼던 잠재의식의 원천을 바탕으로 초현실주의의 기반을 다지려 했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서 추출해낸 언어에서 정신분석적 고백을 발견해 냈기 때문이다. 전쟁 중 브르통은 여러 정신병원에서 이 같은 정신분석적 고백에 따르는 해방의 효과를 경험한 바가 있었다. 하여튼 막스 에른스트의 예술은 파리에서 초현실주의로 꽃을 피웠다.

‘새의 대장’ 막스 에른스트와 ‘바람의 신부’ 레오노라 캐링턴은 런던의 막스 에른스트 전시회에서 만났다. 46세의 막스 에른스트는 잘 생기고 다재다능한 데다가 이미 저명한 파리의 초현실주의 화가였고, 캐링턴은 물결치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미모의 20세 처녀였다. 그녀는 섬유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영국 실업가의 딸로 반항적이었고 야심찬 화가였다. 둘은 첫눈에 반했고, 캐링턴은 런던에서 파리로 거처를 옮겨 앙드레 브르통 주변의 초현실주의자들 속으로 들어갔다. 에른스트는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레오노라 캐링턴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미친 사랑이었다. 폭풍과도 같았고,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은 저절로 휩쓸려 나갔으며,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과 영혼이 결합됐다. 레오노라 캐링턴은 미술사에서 ‘예술속의 여인들’에 속한다. 예술속의 여인들이란 저명한 예술가들의 연인을 말한다. 캐링턴은 저명한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파리에서 대형의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시골집으로 이사해 사랑을 즐기기도 했다.

▲ 「황야의 나폴레옹」(1941)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에른스트는 두 번에 걸쳐 ‘적대 외국인’으로 감금됐고, 이 상황에서 캐링턴은 막스 에른스트를 망명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막스 에른스트는 새처럼 날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캐링턴은 결국 마드리드에서 불안증을 앓게 되며 정신병 진단과 함께 정신병원으로 옮겨지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그년 포기하지 않고 창살 밖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 1941년 막스 에른스트는 마드리드에서 캐링턴과 재회했지만 그들의 새로운 관계는 유지되지 않았다. 에른스트 옆에는 그를 미국으로 데리고 갈 페기 구겐하임이 있었다. 페기 구겐하임 역시 결혼한 지 몇 달 후, 미모의 젊은 여인 도로시아 태닝에게 막스 에른스트를 넘겨줘야 했다.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끝낸 후 막스 에른스트는 1953년 네 번째 부인인 도로시아 태닝과 함께 프랑스로 귀환했다.

막스 에른스트의 미국 망명은 독일 망명 지식인 지도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막스 에른스트는 미국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었고, 동시에 미국의 젊은 작가 세대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을 줬다. 대표적인 예로 잭슨 폴락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은 막스 에른스트의 영향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스 에른스트는 독일 출신이었지만 어느 한 국가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라 세계 여기저기 세계를 떠도는 방랑아였다. 실제로 여기저기를 떠돌았지만, 그가 사귄 여인들의 국적은 다양했고, 마음과 예술혼은 세상을 떠돌았다. 에른스트는 독일인이었고, 미국인이었고, 프랑스인이었다. 독일인으로 태어나 프랑스에서 예술 활동을 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다음 프랑스로 귀환해 프랑스에서 영면했다. 그는 국적을 초월한, 현실을 초원한 초현실주의자였다.

 

 

서장원 독문학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