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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칸트 그리고 벤야민, 걷기의 달인들
루소·칸트 그리고 벤야민, 걷기의 달인들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7.03.27 13: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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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박아르마 건양대 교수

문학사 혹은 철학사에서 알아주는 걷기의 달인들이 있었다. 장 자크 루소와 임마뉴엘 칸트, 발터 벤야민 등이 그들이다. 세 사람은 모두 걷기와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생 동안 걷고 또 걸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걸었다. 루소는 자연 속에서, 칸트는 마을에서, 벤야민은 도심 속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걸었다. 파리 12대학 정치철학 교수인 프레데리크 그로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Marcher, une philosophie)』에서 걷기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삶에서 걷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묻고 있다.

걷기의 양과 질에서 루소에 필적하는 인물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는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의 안시, 샹베리, 리옹을 도보로 다녔고 심지어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의 토리노까지 걸어서 갔으니 말이다. 루소의 최초의 걷기는 가출에서 시작됐고 이후는 낭만적 꿈을 좇아 떠난 여행으로 나타났다. 그는 들판을 지나고 숲을 걸으며 멀리서 성이 보일 때마다 성주의 딸과의 연애사건을 꿈꾸었다. 루소는 걷기를 통해 자유와 사랑을 얻었지만 성공을 좇아 파리로 간 이후로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걸었을 때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 고대 바빌론을 꿈꾸며 도착한 파리였지만 ‘계산적이고 시기하고’ 자들로 가득 차 있는 도시를 떠나 오로지 숲 속 오솔길을 걸으며 행복을 되찾고자 했다.

루소는 마흔이 넘어서야 파리를 떠나 ‘레르미타주’라는 작은 마을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 “밤이 깊은 침묵에 잠겨 있기를, 아침이 한없이 투명하기를” 바랐고 그 꿈은 이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원초적 인간을 자기 속에서 발견하기 위해 걷는’ 루소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심지어는 친구인 디드로조차 ‘악인만이 혼자 지낸다’는 말로 그를 비난했다. 이후 루소는 『에밀』이 불태워지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돌팔매질을 피해 쫓겨 다녔다. 그래도 그는 평온한 시간이 잠시라도 주어지면 어김없이 산책을 했다. 루소는 생애 마지막 산책을 끝내고 아내 테레즈와 아침식사를 한 뒤 오전 11시경에 사망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고 죽은 칸트도 걷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만큼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길로, 일정한 걸음걸이로 걸었다. 요컨대 규칙성이 문제였다. 말하자면 그는 건강을 유지하고 규칙적인 삶의 한 방편을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걸었다. 그는 모든 생활을 분 단위로 계산하며 일정한 규칙과 질서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가 무색할 정도로 정말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아닐 수 없었다. 저자 그로 교수는 칸트식 걷기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그의 걷기는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놓는’ 행위이며, 걷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정도로 단조롭다. 둘째 그의 걷기에는 규칙성이 나타나 있다. 매일 한 페이지를 쓰다보면 결국 엄청난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것도 규칙성의 미덕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걷기에는 필연성이 나타나 있다. 오후 5시에 산책을 시작하는 것과 걷다보면 결국 도착하는 것이 걷기의 필연성이다. 우리는 칸트가 걷는 모습을 보면서 숨이 막힐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회중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내 머리 위에는 별이 빛나는 하늘이, 가슴속에는 도덕법칙이 있다”고 말했다.

벤야민의 걷기는 관찰과 체험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파리 도심을, 그것도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결과물이자 소비의 공간인 ‘파사주(passage)’를 걸었다. 파사주는 19세기 후반에 파리에 들어서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의 건축물로서 건물과 건물 사이를 유리 구조물로 덮어 ‘외부이면서도 내부인’ 독특한 형태의 쇼핑 공간이다. 걷기와 눈요기, 마음이 동하면 쇼핑까지 가능한 공간이니 아내들에게는 천국, 남편들에게는 기피 장소가 아닐 수 없다(물론 쇼핑이 즐거운 남자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벤야민은 파사주를 걸으면서 세 가지를 발견했다. 먼저 자연이 아닌 도시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은 도시가 숲과 정글로 변하는 독특한 경험을 한다. 다음으로 서로에게 적대적인 이방인으로서의 군중을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되는 자본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걷기와 관련해서 한 사람을 더 언급한다면 소설가 발자크를 들 수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이 걷기보다는 걷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는 걷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발걸음의 원리와 서로 다른 걷기의 방식을 분석해 『발걸음의 이론』을 썼다. 비록 그는 많이 걷지는 않았지만 ‘비만증에 걸리면 걷지 못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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