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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역법의 내력과 의미
전통역법의 내력과 의미
  • 교수신문
  • 승인 2001.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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曆 - 서민을 위한 실용달력, 왕조의 권위도 상징
정성희 / 정신문화연구원 연구원

밀레니엄을 맞는다며 온 세계가 들뜬 지도 벌써 한해가 지났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20세기와 21세기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것 같지만, 연말과 연초의 느낌이 확연히 다른 것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인간은 영원히 돌아가는 시간을 구획짓고 그 시간의 끝과 시작을 맞으며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옛날 농경사회에서 위정자들의 제일 큰 임무 중의 하나는 백성들에게 씨 뿌리는 시기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때’라는 것은 생존과 결부되어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씨를 뿌릴 때, 열매를 거둘 때, 고기잡이를 할 때 등등 지금도 흔히 사용하는 “때를 놓치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흘러가는 시간이 모두 같지 않으며 適期가 있음을 알려 준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인간 활동에는 항상 시간이 중요했으므로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연히 曆이 필요하게 되었다.

역법에 숨겨진 정치성

사실 태양과 달의 운행만으로도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역서를 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사회부터 천체의 운행을 다룬 역서라 할 수 있는 天體曆에는 그 외에도 五星의 운행까지 포함되어 매우 복잡하게 발달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역의 기능이 과학적이고도 실용적인 의미를 넘어 日蝕이나 月蝕의 예측에 占星적 해석을 덧붙이는 고대 천문학의 속성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매일 매일의 날짜를 알기 위해 사용하는 常用曆이나 농사력 같은 것은 일반력이며 曆法에서 논의되는 천체력은 아니다.

그런데 천체력이든 일반력이든 시간과 날짜에는 정치적 속성이 숨겨져 있다. 대한제국기에 소위 陰曆이라 부르는 太陰太陽曆을 버리고 유럽식의 그레고리력을 채용한 것은 기존의 음력이 결코 부정확해서가 아니었다. 이 음력은 時憲曆이라 불리는 역으로서 정확성과 계절과의 부합성 면에서 볼 때,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서양력에 비해 훨씬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달력이다. 세계사에 편입하기 위해 서양의 역을 사용해야만 하는 현실적인 명목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일 뿐, 서양력이 우수해서 改曆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개력이 곧 舊曆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명절이나 제삿날, 생일, 택일 등을 음력에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 보수성이 강한 것이 또한 曆임을 알 수 있다.

역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더라도, 정치적이고도 정서적인 측면은 더욱 농후해진다. 본래 역법이란 집권자가 만든 일종의 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역법은 사회적 요소 외에도 자연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어서 권력자의 뜻대로 정할 수 없다는 특징도 지니고 있다. 또한 역법은 어떤 형태로든 중앙집권적 체제가 갖추어진 사회가 아니면 실시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자연현상에 관한 상당한 지식과 노하우가 쌓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법에 가장 영향을 끼친 중국의 역법은 하늘의 의지가 천체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天人相關思想을 배경으로 성립하였다. 그러므로 태양이나 달, 행성 등에 관한 천체 현상이 주 관찰 대상이었고, 당시의 역은 단순한 달력이 아닌 일종의 천문계산표였다. 따라서 역법은 실용적인 달력으로서, 그리고 왕조의 권위를 나타내는 천체력으로서 정확성이 요구되었다. 그런데 천체 현상은 정확한 법칙성을 갖기는 하지만, 완만히 변화하는 것이므로 모든 시대를 통해서 역법 연구는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했고 이로 인해 역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 천체의 변화에 따른 정확한 역법을 만들고자 하는 갈망은 급기야 改曆과 함께 서양역법인 시헌력의 수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현재까지 음력이란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시헌력은 역대 역법 중 가장 과학적이며 그 정확성을 자랑한다. 시헌력은 우리 역사에서 효종 4년(1653)년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헌력이 사용되기 이전에도 삼국시대 때의 元嘉曆과 麟德曆, 통일신라의 고려초기 때의 宣明曆, 그리고 고려중기 및 조선시대까지 사용된 授時曆과 大統曆 등 수많은 역법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역법들은 사실 중국 역법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고, 사실상의 주체적이고도 자주적인 역법의 제정은 세종 때 七政算內外篇에 와서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역법은 정치적이고도 외교적인 문제로 중국력을 그대로 사용해야 했고, 중국이 시헌력이라는 서양력을 사용하게 되자 우리나라도 외교적인 관계 때문에 시헌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역법 중 으뜸은 ‘시헌력’
하지만 시헌력의 사용은 전통시대 지식인 사이에서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를 들어 전통 역법에서는 24절기 간의 길이를 15.22일로 일정하게 나누었는데, 시헌력은 태양 운동의 지속에 따라 절기간의 길이를 서로 다르게 조정하였다. 때문에 동지가 입춘이 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더욱이 시헌력은 서양이나 청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하는 이른바 위정척사적 관념 때문에 쉽게 자리를 잡지 못한 면이 많았다. “시헌력을 따르는 것은 오랑캐 과학을 따르는 것이며 正道가 무너지는 일”이라 여길 정도로 정서적 거부감이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헌력은 정통성 확보에 여념이 없었던 효종의 의도에 부합하면서 1896년 1월 1일 그레고리력으로 개력할 때까지 공식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bellve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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