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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 세계를 그려낸 전형적인 모더니스트 … ‘변종예술가’로 조롱당하기도
역동적 세계를 그려낸 전형적인 모더니스트 … ‘변종예술가’로 조롱당하기도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3.13 12: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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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4. 화가 파울 클레
▲ A.엘리어스버그가 찍은 파울 클레의 사진. 1911년.

저명한 독일 망명 화가를 가려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장 기본적인 기준인 유대인 혈통이나 정치적으로 반대파인 공산주의자 내지 사회주의자 등의 범주를 굳이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알아서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예술가들을 나치정권이 공개적으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망명 작가나 음악가 등의 경우에도 블랙리스트나 분서를 통해 불순분자를 지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술가들의 경우는 지목으로만 끝나지 않고 대규모의 전시회를 통해 나치가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에게 재확인 시켰다.

망명 작가나 제거해야할 지식인들은 불태웠고, 여타의 망명객들은 옷을 벗겼다면, 화가들은 팬티까지 벗긴 셈이다. 증오심이 불타오르지만 태워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두들겨 팰 수도 없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창피를 준 것이다. 만천하 사람들이 다 와서 보고 돌을 던지며 비난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화가들 중 한사람이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다. 이러한 화가들을 나치는 ‘변종예술가’라고 불렀다. 변종예술가로 매도된 수많은 화가들 중에서 왜 파울 클레가 먼저 떠올랐을까. 우선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하자. 그러한 다음 망명 지식인과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차분히 추적해 보기로 한다. 

파울 클레는 그렇게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인생을 살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어느 한 특정한 유파로만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표현주의, 구성주의, 입체파(큐비즘), 원시주의, 초현실주의 등 모든 유파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단순히 화가로만 머문 것이 아니라 화가이자 동시에 그래픽 예술가였다. 그 이외에도 데사우 바우하우스 교수를 역임했고, 바우하우스와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의 이력이다.

화가이자 바우하우스 교수였던 예술가의 ‘귀향’

▲ 독일 태생의 건축가이자 바우하우스 설립자인 그로피우스, 헝가리 작곡가인 벨라 바르토크와 함께 한 클레. 1927.

무엇보다도 이 글을 위해 중요한 것은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망명화가라는 점이다. 그런데 다른 망명객들과는 좀 차이가 있다. 망명객이라고 하면 망명초기 독일의 인접국인 유럽을 떠돌아다니다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더 이상 유럽에 머물지 못하고 대략 1940년을 전후해서 신대륙인 미국 등지로 망명의 길을 재촉하는 것이 일반적인 공식이다. 하지만 파울 클레 연보를 살펴보면 1933년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서 해직을 당하고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간다. 망명이라고는 하지만 누가보아도 귀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우리에게는 낙향이라는 개념이 있으니, 이러한 경우 낙향이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서양인이니 망명이라고 해야 할지는 연구꺼리다. 게다가 파울 클레는 귀향한 다음 특별히 망명활동이라는 것도 없었고, 고향에 돌아온 지 얼마 후인 1935년부터 병마에 시달리다 1940년 고향에서 영면한다. 이것이 파울 클레의 만년 인생사다. 하지만 1937년 나치들이 클레의 예술을 ‘변종’이라고 비방해대며 독일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작품 102점을 압수해 그 중에서 17점을 ‘변종예술’ 전시회에 전시했다. 변종예술가 파울 클레를 망명객으로 확인시키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예술사적 측면에서 볼 때 파울 클레는 복잡하고도 다양한 유파에 속하며 다양한 예술유형을 구사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당시의 예술경향이 그랬고, 그러한 흐름 속에 시대를 대표하듯 파울 클레라는 화가가 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하면 미술 분야에서 당시의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적 특성을 대변하는 화가가 파울 클레였다. 서양미술사는 이 시대와 이 시대의 흐름을 모더니즘이라고 규정한다. 파울 클레는 분명 모더니즘에 속하는 모더니스트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다양한 미술 형태를 바탕으로 한 20세기의 전형적인 모더니스트였다. 그런데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20세기 유럽에서 발흥하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 모던적 예술방식과 모더니즘 예술관을 나치들은 전적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때 나치 문화정책과 모더니즘이 충돌을 일으켰고, 그 중심부에 파울 클레라는 화가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전제조건으로 받아들인다면 파울 클레의 경우는 한 망명 예술가의 인생사나 망명현실을 조명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 망명이 발생하게 됐는가?’라는 물음이 핵심주제로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이 이러한 사실과 이에 따른 물음들이 미술사 발전에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역사적 물음이다. 제기된 문제를 전개해 나가기 위해 첫 번째로 해야 할 작업은 가해자인 나치의 문화정책 내지 예술관, 그리고 그와 더불어 피해자인 나치들에게 비방을 당했던 모더니즘 내지 파울 클레의 예술관이 무엇인지를 규명해 내는 것이 급선무다. 그러한 다음 나치들의 ‘변종예술’에 대한 정책적 모색 및 대응방식을 따져보는 것이 두 번째 과제다. 마지막으로 나치와 모더니즘 사이의 불화는 현대 예술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진단해보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나치와 모더니즘 사이의 불화

나치들은 기본적으로 ‘예술이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거부했다. 거부가 아니라 차단이었다. 독재자들에게 나타나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독재자들은 물음과 토론을 거부한다. 물음과 토론을 거부하는 자가 곧 독재자다. 그들은 힘으로 누르려고 하기 때문에 힘을 사랑한다. 나치들에게 ‘예술의 자율성’ 역시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예술의 기본은 자유, 즉 자율성인데 나치 국가에서는 지도자가 명령하면 따르는 것이 예술가의 길이었고, 법칙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나치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다른 가면을 쓰고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서 횡행하고 있다. 수많은 학자나 예술가들이 체제나 자본이 명령하는 대로 따르고 있다. 망명연구나 독재국가에 대한 연구가 급박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나치 국가에서 예술창작은 단지 국가, 민족, 종족에 대한 봉사였다. 예술은 본질이 아니라 도구였고,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철칙이었다.

▲ Paul Klee and Lily Klee (back centre) with Reinhard Piper, Mr. and Mrs Eliasberg, and others, Munich 1908. ?Klee-Nachlassverwaltung, Bern

나치국가의 일관된 예술정책은 독일 예술창작의 극단적인 ‘아리안화’였고, 이에 따른 ‘모든 유대적인 것은 변종 종족적인 것이다’라는 규정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문예사적 흐름으로 볼 때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일체의 전통적인 예술양식이나 이들을 뒷받침하는 학술·이론적인 사항에 대해서는―즉 현대예술론―죄로 단정하고 ‘변종예술’ 이라는 이름하에 철퇴를 내려쳤다. 나치정권에게 ‘변종예술’이란 표현주의, 인상주의, 다다이즘, 신즉물주의, 초현실주의, 입체파, 야수파 등 나치의 예술관이나 미적 이상에 부합되지 않는 일체의 예술작품이나 문화적 흐름을 의미했다. 변종화가들로는 클레를 포함해 게오르게 그로스츠(George Grosz),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리오넬 파이닝어(Lyonel Feininger),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등을 쉽게 거론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나치들은 무엇보다도 조형예술, 특히 건축과 조각을 집중적으로 주시했고, 가끔은 선전목적으로 새로운 미디어 매체인 영화와 방송을 악용했다. 이때 나치 예술정책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인물이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와 요젭 괴벨스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 위에서 명령하고 진두지휘하는 두목이었다. 나치는 예술속의 영웅적인 것이나 스포츠로 단련된 근육질의 남자들을 사랑했다. 근육질의 남자들은 조각가 요셉 토락 (Josef Thorak)의 「독일남성과 독일여성」, 「영웅적 사실주의」 등에서, 그리고 아르노 브레커(Arno Breker)의 「영웅」 및 그 이외의 작품에 잘 나타나있다. 역시 베르너 파이너(Werner Peiner)의 「독일대지」처럼(우리로 말하면 밭에 해당되기 때문에 「독일의 땅」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듯하다) ‘피-대지-그림들’의 관계가 등장하는 블론드 머리카락의 젊은 엄마들이나 농부들의 작고 건전한 세계가 자주 등장한다. 이때 ‘피’란 순수 독일혈통을 말하고, ‘대지’란 독일의 국토를 의미한다. 순수한 독일인들에 의해 아름답게 정리되고 그것을 가지고 역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그림들이 권장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게 모더니즘이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독일을 오염시키는 ‘변종예술’이었다.

‘변종예술’ 전시회는 1937년 7월부터 그해 11월까지 뮌헨 ‘호프가르텐(Hofgarten)’ 화랑에서 개막됐다. 독일 32개의 박물관에서 차출한 650개의 압류된 미술품이 전시됐고, 3백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이 숫자는 당시 뮌헨 ‘독일 예술의 집’에서 ‘변종예술 전시회’와 동시에 개최된 ‘위대한 독일 예술전시회’를 훨씬 능가했다. ‘위대한 독일 예술전시회’에는 단지 50여만 명 정도가 모였을 뿐이다. 비난과 조롱을 받는 예술품 전시회가 찬사를 받는 예술품 전시회보다 훨씬 더 관심을 끈 것이다. 인간의 속성일까, 아니면 사회적 분위기가 그래서 그랬을까. 차분히 예술을 감상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어차피 예술적 가치를 논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두 전시회이니 만큼 칭찬보다는 비난이 인간들의 흥미를 더 끌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진지한 예술보다는, 아니 예술성을 앞세우기보다는 유희적이고 쾌락적인 요소가 인간의 마음을 더 움직이고 상업화되는 것은 옛날이나 요즈음이나 마찬가지다.

‘변종예술’ 전시회에 진열된 작품들은 그림 하단에 변종예술가들이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다는 해설과 함께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감을 유발시키기 위해 불구자의 사진과 결합시켜 전시했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적 모더니즘 작품은 불합리하고, 모더니즘은 퇴폐적이고, 몰락해가는 예술로 치부했다. 게다가 ‘병적이고’, ‘유대적-볼셰비키적’이기 때문에 이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들이야말로 ‘종족적으로 열등하다’는 본질 규정까지 도출해 냈다. 이러한 결론을 이끌어 낸 의도는 유대인이거나 정치적 반대파를 박해하는데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갈리아 유대인’, 대학에서 무기한 퇴직 당하다  

‘변종예술’로 지목된 미술품들은 1941년 4월까지 12개의 도시를 순회하며 전시됐다. 나치의 입장에서는 순회였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발가벗겨진 채 끌려 다니며 조롱과 비난을 받은 것이다. 베를린에서, 빈에서, 잘츠부르크에서, 함부르크에서 전시회가 개최됐다. 전시회는 요젭 괴벨스의 주도하에, 제국 조형 예술국 아돌프 치글러(1892~1959) 국장이 실무를 담당했다. 전시회를 위해, 아니 독일 미술품수집에서 ‘정화’라는 미명하에 약 6천 점의 현대 미술 작품들이 압류됐다. 이들 중 일부는 외국으로 팔려나갔고, 일부는 파괴됐다. 특이할 만한 일은 ‘변종예술’로 지목된 작품들을―사실은 서양미술사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품들을―사들인 화가, 박물관 직원들, 그리고 대학 교수들은 발각되는 대로 퇴직을 당했다. 당시 숨겨졌던 모더니즘 작품들에 대한 논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품인가, 아니면 모조품인가부터 가격이나 소유권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클레는 망명을 떠나게 됐다.

▲ 발터 벤야민과 Angelus Novus(Angel of Historye, 1920). 벤야민은 클레의 이 작품에서 문명에 대한 자신의 실존적 불안을 투사하기도 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파울 클레는 재직하고 있던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 ‘아리아인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아리아인증명서’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에 통용되던 신분증으로 나치 독일이 공무원, 의사, 법조인, 대학에 재직 중인 학자 등 고위인사들을 대상으로 ‘아리아 민족공동체(순수 독일인 국가)’에서 ‘순수 아리아인 혈통’과 비 아리아인 혈통을 구별해내기 위해 만든 증명서였다. 이 증명서를 바탕으로 나치들은 유대인, 집시들을 가려내어 박해하거나 추방하는데 사용했다. 나치들은 클레를 이미 ‘갈리아 유대인’으로 지목해 놓고 있던 참이었다. 갈리아란 역사적으로 독일의 서남부, 즉 프랑스나 스페인 등을 말하는데, 파울 클레의 조상이 어디 저 먼 남서쪽 나라의 유대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나치에게 파울 클레는 ‘변종 예술가’에다가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1933년 4얼 21일 그는 대학으로부터 무기한으로 퇴직 당했다. 클레는 동료들과의 환송회에서 “유럽에는 걱정스럽게도 시체냄새가 난다”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1933년 12월 23일 그동안 전세로 살던 집을 비워주고, 그 날로 스위스로 망명을 떠났다. 클레의 집은 바우하우스 교수로 재직하던 데사우에 있었다. 클레는 1920년부터 발터 그로피우스와 바이마르에서 일했는데, 1925년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하자 그곳에서 둥지를 틀었던 터였다. 그러한 다음 1931년부터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 재직했지만 집은 여전히 데사우에 남겨두고 하고 있었다.

파울 클레는 1879년 스위스의 베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일인으로 음악선생님이었고, 어머니는 스위스인으로 가수였다. 그는 음악소양이 깊은 가정에서 자라났고, 본인 스스로도 음악가가 되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음악과 미술 두 분야에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클레는 결국 미술을 선택했다. 미술 공부를 위해 클레는 독일의 뮌헨으로 갔다. 1900년 당시 뮌헨은 유럽에서 파리 다음가는 예술의 도시로 예술의 전통과 최신유행이 이곳에서 어우러져 꽃을 피우고 있었다. ‘뮌헨은 빛났고’ 열광과 환희, 미래지향적 분위기가 도시를 지배했다. 도시는 이곳에 모이는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다. 

클레는 뮌헨에서 미술공부를 한 후 유학을 목적으로 1년 동안 로마 여행을 하기도 했다. 1906년까지 고향 베른에 살며 유리판 뒷면에 그림을 그리는 이면 글라스화와 동판화에 집중했다. 스스로 예술적 방법을 터득하며 독학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당시에 제작한 판화 시리즈는 기존 전통의 틀을 벗어나 풍자와 유머가 담긴 그래픽 기법의 작품이었다. 리오넬 파이닝어가 말했듯이 클레는 “깊은 현명함과 놀라울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이었다. 주의 깊고, 깨어있는 어린아이와도 같으며 시각, 청각, 미각 등 감각에 의한 모든 경험은 그에게 언제나 경이롭고 새로운 것이었다.”

새롭게 발견된 자연의 법칙에서 예술적 영감 얻어

파울 클레는 역동적인 세상, 새로 발견된 자연의 법칙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집중적으로 자연을 연구하지 않고는 결코 예술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예감하고 있었다. 작은 사물, 길거리에 나둥그는 돌멩이, 새들의 깃털, 흔들리는 나뭇잎, 하찮아 보이는 물건들을 클레는 관찰했다. 클레에게 자연이란 보이는 물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방가르드와 만났고, 입체파와 미래파의 예술을 추구했다. 미래파 예술가로 미래를 지배하는 자연과학과 모든 물질과 기계에 매료됐다. 보이지 않는 사물이 클레에게는 빛을 발했다. 클레의 예술은 생의 충만함을 향하고 있었다. 파울 클레에게 예술이란 “볼 수 있는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화하는 것”이었다. 클레는 시각화를 위한 예술을 끊임없이 확장 발정시켜 나갔다. 움직임, 움직임이 그에게는 모든 것이었다. 움직임은 클레에게 삶의 이유이자 원동력이었고, 예술 창작의 근원이었다.

파울 클레는 바우하우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미술은 무엇보다도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파울 클레는 왼손잡이였다. 하지만 양손으로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은 노력이었다. 바우하우스의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예술에 그렇게 헌신하는 이 정열적인 화가의 예술적 능력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가끔은 어린애처럼 미숙하다는 조롱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것이 예술이었다. 클레에게 직접적인 제자는 없다. 나치에 의해 비난받고 조롱받는 ‘변종예술가’로 현대예술에 초석을 놓는 과정에서 제지를 당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직접적인 제자는 없지만, 그가 죽은 후 한참이 지나 20세기의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은 클레 자신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승을 나는 전혀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막
죽은 자들에게서,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게서  
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것보다는 창조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으나
가까이 가기에는 아직도 멀고 충분하지 않다.”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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