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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판단의 심리적 메커니즘 설명 ... ‘깊은 실용주의’ 제안
도덕판단의 심리적 메커니즘 설명 ... ‘깊은 실용주의’ 제안
  • 최호영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 승인 2017.03.08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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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옳고 그름: 분열과 갈등의 시대, 왜 다시 도덕인가』 조슈아 그린 지음 | 최호영 옮김 | 시공사 | 624쪽 | 27,000원

저자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은 2002년에 프린스턴대에서 도덕철학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는 하버드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곳에서 도덕인지실험실(Moral Cognition Lab)을 이끌면서 주로 행동 실험과 기능성 뇌영상(fMRI) 기법을 사용해 도덕적 판단과 의사결정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이 번역서의 원본인 『도덕적 부족 : 감정과 이성 그리고 우리와 그들 사이의 간격(Moral Tribes: Emotion, Reason, and the Gap Between Us and Them)』(2013)은 저자가 박사 논문 이후 경험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해 온 도덕철학적 주제들을 집대성한 책이라 하겠다.

부족적 가치관의 충돌-현대 사회의 주요한 윤리적 문제

이 책 1부에서 저자는 도덕적 문제를 두 부류로 나눈다. 하나는 ‘나’ 대 ‘우리’, 이기심 대 이타심이 충돌하는 상황에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대 ‘그들’, 우리의 관심과 가치관 대 그들의 관심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상황에 관련된 것이다. 저자의 진화심리학적 가설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집단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도덕적 감정이 진화의 산물로서 존재하며, 때문에 ‘나’와 ‘우리’가 충돌하는 도덕적 문제는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감정은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의 협력에 초점을 맞춘 부족주의적(tribalistic)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이런 도덕적 감정은 ‘우리’와 ‘그들’이 충돌하는 두 번째 부류의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에 가깝다. 저자는 이렇게 부족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상황이 현대 사회의 주요한 윤리적 문제라고 규정하면서, 이 책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저자의 연구는 2000년경부터 새로운 학문 분야로 등장한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 더 구체적으로는 실험도덕철학에 해당한다. 그러나 철학적 물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접근이 과연 철학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저자는 뇌영상 연구 등을 바탕으로 인간이 상이한 뇌 부위에 기초한 이중 처리 방식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주장한다.

 

2부에서 저자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 뇌에서 감정에 기초한 인지체계와 이성 또는 추론에 기초한 인지체계가 경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인지체계는 문제 상황에서 특정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감정을 바탕으로 우리가 직관적 또는 본능적으로 상황에 대처하도록 만드는 반면에, 두 번째 인지체계는 문제 상황에서 의식적이고 통제된 추론 과정을 통해 가장 바람직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따진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상황에 따라 감정에 기초한 직관적 반응을 하기도 하고 추론에 기초한 통제된 반응을 하기도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특히 이른바 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는 이 두 인지체계가 갈등을 일으킨다.

예컨대 통제 불능의 전차가 다섯 명의 인부를 향해 질주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이대로 놔두면 인부들은 전차에 치여 죽을 수밖에 없는데, 마침 당신은 달려오는 전차와 다섯 인부의 중간쯤에서 선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위에 서 있고 당신 옆에는 커다란 등짐을 진 인부 한 명이 서 있다. 다섯 인부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이 사람과 그의 등짐을 함께 육교 아래로 떠밀어 전차를 멈추는 것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등짐을 진 인부 한 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 전차는 멈출 것이고, 그러면 다섯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등짐을 진 인부 한 명을 떠밀어 다섯 인부를 구하는 행동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이런 딜레마 상황에서 감정에 기초한 인지체계는 무고한 한 사람을 육교 아래로 떠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반면에, 추론에 기초한 인지체계는 한 사람을 떠밀어 다섯 사람을 구하는 것이 최선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관련 뇌영상 연구에 따르면 무고한 한 사람을 떠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정서 반응의 중추인 뇌의 편도체와 복내측 전전두피질이 더 활성화되는 반면에, 한 사람을 떠밀어 다섯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공리적 선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인지 통제의 중추인 배외측 전전두피질이 더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책 3~5부에 걸쳐 저자는 부족적 가치관의 충돌이라는 현대 사회의 주요한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깊은 실용주의(deep pragmatism)를 제안한다. 저자의 깊은 실용주의에 따르면 부족적 가치관의 충돌 상황에서 타협과 균형을 모색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장기적으로 당사자들의 행복을 최대화할지를 증거에 입각해 살피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깊은 실용주의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겠다. 1) 윤리 논쟁 상황에서 도덕적 본능을 신뢰하지 않기(부족주의적 성격을 띠는 도덕적 본능은 윤리 논쟁의 해결책이 아니라 원인이므로), 2) 윤리 논쟁 상황에서 부족적 가치관에 입각한 ‘도덕적 권리’나 ‘정의’에 대한 주장을 내세우지 않기, 3) 모든 사람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대립하는 부족적 가치관들에 공통된 기본 가치로서), 4) 모두의 행복을 똑같이 소중하게 취급하기(공평성 원칙), 5) 단기적 행복 대신 장기적 행복에 초점을 맞추기(즉 감정에 기초한 인지체계 대신 추론에 기초한 인지체계를 신뢰하기), 6) 무엇이 최대 다수의 장기적인 최대 행복을 낳는지를 증거에 입각해 살피기(즉 특정 권위에 의지하는 대신 행복의 조건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실험철학의 가능성과 한계

저자의 연구는 2000년경부터 새로운 학문 분야로 등장한 실험철학(experimental philosophy), 더 구체적으로는 실험도덕철학에 해당한다. 실험철학자들은 심리학이나 뇌과학 등에서 사용하는 실험이나 설문조사 같은 경험과학적 방법을 사용해 철학적 물음에 접근한다. 실험도덕철학자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당위의 문제) 그냥 성찰적으로 따지기보다(이른바 탁상공론식 철학)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옳고 그르다고 생각하는지를(일반인의 도덕 판단에 대한 사실의 문제) 경험적으로 살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철학적 물음에 대한 경험과학적 접근이 과연 철학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저자는 뇌영상 연구 등을 바탕으로 인간이 상이한 뇌 부위에 기초한 이중 처리 방식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주장하는데, 도덕적 판단의 신경 메커니즘이 도덕적 판단의 옳고 그름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책 3~5부의 깊은 실용주의에 대한 주장은 실험철학이라기보다 전통적인 철학 논변의 형태를 띤다. 저자는 대립하는 가치관들에 공통된 가치를 토대로 일종의 메타윤리학을 구축하려 한다는 점에서 근대주의적(modernist) 접근을 하고 있으며, 보편성을 넘어 차이 자체를 윤리적으로 사고하려는 탈근대적(post-modern) 접근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다는 점에서 아쉽다. 또한 깊은 실용주의 또는 공리주의가 윤리적 갈등 해결을 위한 최선의 보편주의적 접근법인지에 대해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메타윤리학으로서 깊은 실용주의에 대한 논의와 별개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도덕적 판단의 심리 메커니즘에 대한 다양한 설명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심각하게 전개되는 집단 갈등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할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집단을 편애하고 다른 집단을 배척하는 내집단(in-group) 편향,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과대평가하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공정성을 해석하는 편향된 공정성 등이 그것이다.

 

최호영 중앙대 중앙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필자는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뒤 독일 베를린자유대학에서 구성주의에 대한 연구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이론심리학과 학제적 마음연구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 『인지와 자본』(공저), 『동서의 문화와 창조』(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앎의 나무』, 『뇌의식과 과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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