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23:00 (수)
“융복합 기반 ‘지적 연결지평’ 되살려 기초교육 근본 세우자”
“융복합 기반 ‘지적 연결지평’ 되살려 기초교육 근본 세우자”
  • 손동현 대전대 석좌교수·철학
  • 승인 2017.03.06 16: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동현 석좌교수, 대학교육 혁신의 길을 제안한다 ① 고등교육 전환기
▲ 손동현 대전대 석좌교수

자연적 제약을 극복해 문화적 상태로 고양하는 데는 기술과 규범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우선 자연과의 교섭-대결에서 자연을 활용해 생존의 물질적 요건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간은 공작적 활동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기술이다.

다른 한편 인간은 공동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데 여기서 인간 스스로 형성해내야 하는 것이 규범이다. 교양(culture, Bildung)의 핵심에 이 규범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실존적 요청이다.

자연을 토대로 하되 인간 고유의 문화세계를 형성해 내는 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것이 이렇듯 기술과 규범이라는 이 두 가지의 인위적 산물이요, 이는 문화를 구성하는 두 가지 핵심요건이다. 이렇게 보면, 기술을 습득하고 규범을 익히도록 이끌고 돕는 것이 곧 교육의 근본이다.

기술은 물론 인간의 행동이 목적으로 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 기술의 힘은 있는 사실의 세계에 그 원천을 갖고 있다. 이미 있는 사실의 세계는 인과적인 힘이 작용하는 세계다. 원인이 결과를 불러 오고 따라서 시간적으로 앞서간 것이 시간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을 결정하는 세계다. 기술의 힘은 결국 물리적 자연세계의 인과관계를 잘 파악하고 활용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규범은 있어야 할 이상과 가치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장차 이룩해 낼 행동의 목적을 설정하게 하는 것으로서 주어져 있는 기존의 사실세계에 내재해 있는 인과관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런 사실의 세계를 뛰어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일은 사실로 주어져 있지 않은 이 이상과 가치가 이미 주어져 있는 사실의 세계를 이끌어간다는 것이다. 인간 행동의 고유성이 여기에 있고 그 의미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상과 가치를 목적으로 세우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기술의 힘을 동원하는 것을 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교양의 핵심을 이루는 규범이란 이상과 가치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기술의 힘에 의존하는 우리의 행동을 이끌어 간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기술의 힘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교양의 힘도 중요한 것이다.

그간 한국에서 학교교육은 무엇을 지향해 왔는지, 특히 대학의 고등교육에서는 무엇이 우선적으로 강조돼 왔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인과관계가 지배하는 사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더 중요시돼 왔는지, 아니면 목적관계를 중시해 목적으로 설정할 가치에 대한 지혜가 더 중시돼 왔는지 되물어볼 일이다.

대학교육은 내용적으로 볼 때 전공교육과 교양교육의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한국에서 그 동안 대학교육은 현실적으로 전공교육의 주 과제를 ‘전문 직업교육’에 두고 여기에만 열중해 온 것이 사실이고, 그러다 보니 ‘보편 지성교육’을 지향하는 교양교육은 등한시된 것이다. 사실세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이 어떤 교육을 통해 습득되고 가치를 품는 목적적 관계에 대한 지혜가 어떤 교육을 통해 숙성되는지 생각해 본다면, 보편 지성교육이 소홀히 되고 전문 직업교육이 강조돼 온 한국의 대학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개선돼야 할지 그 답은 분명해 보인다.

학과 중심의 '전공주의'가 대학교육에 더 악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은 기초학문분야와 응용학문분야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학과들은 무차별적으로 병렬시켜 놓은 채 신입생 모집과
교과과정 편성 등 모든 학사행정을 추진해 나가는 일이다.

교양교육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평생학습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지적 동기와 능력을 계발하는 교육이어야 한다. 여러 전문 분야들의 근본 문제와 첨단 지식들을 연계시킬 수 있는 ‘지적 연결 지평’을 갖추어 주는 교육이어야 한다.

따라서 교양교육은 각 학문 분야의 전공 교육과 배타적으로 ‘충돌’하는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공교육의 성과를 상승시켜 주는 교육이다. 기술의 힘이 선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힘이 뻗어나갈 정향을 바로 잡아줄 교양의 힘을 기를 때가 됐다. 인류의 문명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은 이제 상식이다.

한국의 대학교육은 이러한 새로운 지적 상황을 맞아 이를 문명사적 도전으로 인식하고 이에 맞서는 응전의 자세를 보이고 있는가. 급격한 산업화의 과제를 수행하느라 분화된 전공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채 직업교육 지향적 응용학문 중심의 교육에만 매진해왔지, 새로운 시각 아래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새로운 이론을 추구하는 교육을 기초학문 분야에서 시도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이 한국 대학교육이 아니었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는 한국의 대학교육은 기성지식의 습득 교육이 아니라, 지적 능력 함양 교육이어야 하며, 그것도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창의적 사고능력의 함앙 교육이어야 한다. 창의성을 함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곧 균형잡힌 ‘융복합교육’이다. 문과와 이과를 나누고 세부 전공학과로 나누어 특정 분야의 특정 지식만을 습득케 하는 전문 특수 교육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여러 다양한 학문분야, 특히 기초학문 분야들에서 문제를 찾고 문제의 해결을 위한 원리의 탐구를 경험하는 일반 보통교육도 대등하게 실시해야 한다.

디지털기술은 문명생활의 핵심을 이루는 의사소통 및 지식의 유통 영역에서 시공적 제약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극복함으로써 인간으로 해금 시공체험의 양식을 획기적으로 변모시켰고 이로 인해 문화적 욕구와 이 욕구충족의 방식을 또한 크게 변모시켰다.

단계적 부분적 욕구충족의 방식이 외면당하고 동시적 총체적 욕구충족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거기에 필요한 지식도 융복합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됐다. 해결을 요구하는 문제 자체가 복잡한 것이어서 이제 문제해결도 다양한 여러 접근로를 함께 아울어 종합하는 융복합적 식견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융복합적 식견의 함양은 어느 한 가지의 전공 학업만으로는 달성하기 어렵고 여러 학문분야를 망라하는 지적 탐색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곧 여러 기초학문들의 기초적인 문제와 이론들을 균형있게 학습하는 학업이다. 응용학문에 앞서 기초학문을 우선시하는 이유는 후자가 현실적인 이해관계에서 물러나 원리 자체를 탐구하는 생산적 학문임에 반해 전자는 이 후자의 탐구 성과를 현실에 적용하고 응용하는 소비적 학문이기 때문이며, 또 후자는 그만큼 현실밀착적인 것이어서 지적 시야를 넓히고 안목을 깊이 하는 데에 덜 기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전체를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특정 분야만을 분립시켜 관찰하기 때문이다.

"대학의 잘못된 관행, 과감히 혁파할 기회"

그런데 한국의 대학에서 이런 21세기 정보사회의 시대적 요구인 이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의 정착과 가동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학과 중심의 ’전공주의’다. 교수와 학생이 함께 ‘전속’돼 있음으로써 ‘생활공동체’로까지 공고해진 ‘전공학과’는 교육 및 연구와 관련된 대학의 모든 활동을 주관하는 핵심 단위가 돼 왔다. 대학에 입학하며 깊은 성찰 없이 임의로 정해지는 학과를 벗어나, 학생 스스로 자율적으로 필요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학업을 이행해 나가는 것은 현재의 이 제도와 관행 아래서는 불가능하다. 물론 융복합적인 식견을 함양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학과 중심의 ‘전공주의’기 대학교육에 더 악영향을 끼치게 하는 것은 기초학문분야와 응용학문분야를 구별하지 않고 모든 학과들은 무차별적으로 병렬시켜 놓은 채 신입생 모집과 교과과정 편성 등 모든 학사행정을 추진해 나가는 일이다. 기초학문분야의 학과들이 신입생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폐과당하는 것은 바로 이 ‘불공정한’ ‘동등주의’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유감스럽긴 하나 부득이한 일이라며 당연시 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들인데, 이는 대학이 스스로 대학이기를 포기하는 자기부정적 행태라 아니할 수 없다.

기초학문 분야의 연구와 교육이 황폐화된다면 이는 대학의 존속 여부에만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존속과도 긴밀히 연관되는 문제다. 기초학문분야는 비록 그 분야의 학문을 ‘전공’하고자 하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다 하더라도 다른 응용학문 교육을 받는 모든 학생들에게 기초학문교육을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약화·위축·폐지돼서는 결코 안 될 일이다.

향후 10년 내로 대학에 진학할 학령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이 인구통계학적 사실 때문에 대학이 위기에 처해 있다고들 하는데, 뒤집어 보면, 이는 한국의 대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호기가 될 수도 있다. 종래의 잘못된 통념과 관행을 과감히 혁파할 것을 이 사태가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동현 대전대 석좌교수·철학
한국철학회 회장, 성균관대 학부대학장,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을 역임했고, 성균관대 명예교수,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석좌교수로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