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7:00 (금)
탈북자 3만 명 시대 … 정치적 수사 아닌 ‘동등한 시민권’으로 만나야
탈북자 3만 명 시대 … 정치적 수사 아닌 ‘동등한 시민권’으로 만나야
  • 정진아 건국대 대학원·통일인문학과
  • 승인 2017.03.06 15:1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수신문-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공동 기획 '통일연구의 현재와 미래'_ 20. 탈북자에 대한 시선

A가 찾아왔다. 그는 ‘탈북자’다. 그와 나는 탈북자 대학 적응 프로그램에서 만나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이였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아주 흥미로운 방송에 출연하게 됐다고 자랑했다. 남북 청년(정확하게 말하면 탈북 청년과 남한 청년)이 같이 장사를 해 보는 프로그램이라고 했다. 북한의 장마당 세대와 최첨단 자본주의에서 성장한 남한의 젊은 세대가 과연 잘 화합할 수 있는지 실험해 보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2015년 8월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방송사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방송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그가 출연한다는 방송도 그중의 하나였다. A에게 방송을 꼭 챙겨 보겠다고 약속했지만 나는 실제로 그 방송을 보지는 못했다.

며칠 뒤 B가 찾아왔다. 그 또한 ‘탈북자’다. A가 종적을 감추었다고 했다. 방송이 나간 후 엄청난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A가 급기야 모든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나도 A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휴대전화 번호는 바뀌었고 SNS 계정은 정지돼 있었다.

‘탈북자’들, 한국 사회와 충돌하다

A가 나를 다시 찾아온 것은 그해 겨울이었다. A가 출연했던 SBS 광복 70주년 특집다큐 「어서오시라요」가 방송된 지 4개월만이었다. 나는 방송 이후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A와 C를 불러 사건 경위를 물었다. 다음은 그들과의 얘기를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방송은 7일간 촬영됐다. 첫 날에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기획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둘째 날부터는 남북 청년들이 함께 장사를 해 보는 실험을 했다. 마지막 날에는 탈북 청년이 살던 집을 재현하고 그 집에 앉아 북한의 실상과 통일에 대해 남북 청년들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 「어서 오시라요」 방송화면. <사진출처: 방송 화면 캡처>

장사를 어떻게 할지 계획을 짜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남한 청년들과 일단 한번 부딪쳐 보자는 탈북 청년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심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프로그램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갖고 있던 편견과 고정관념이 유리장벽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과 북 사이에는 강고한 벽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방송이 나간 후 통일 문제에 대한 A와 C의 발언에 엄청난 악성 댓글이 쏟아졌다. 야심차게 수행했던 장사 실험은 관심조차 끌지 못했고, 방송 말미에 잠시 토의했던 통일에 대한 내용만이 집중 공격을 받았다. 문제가 된 발언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통일을 반대한다. 지금의 방식은 북한이 자원과 싼 노동력을 제공하면 남한이 자본과 기술력을 가지고 개발하겠다는 것이다. 북한 사람의 입장이라면 ‘왜 남한에게 우리 자원을 싸게 줘야 하나? 어떻게 보면 북한 사람들은 통일의 피해자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굳이 남한하고 통일 안 해도 중국이 있다. 중국하고 북한은 예전부터 우호관계니까 남한이 교류 협력을 거부하면 남한하고 손을 안 잡아도 된다. 북한 정권이 무너져도 북한 주민들이 우리는 남한하고 통일 안 할 거야 이러면 통일 못하는 거다.”

탈북 청년들은 남한에서 얘기하는 통일 담론에 대해 북한 사람의 입장에서 발언해 보라는 옵션을 수행한 것이었다. 방송에는 그 부분이 설명되지 않았고, 남한 사람들 역시 그들의 역할을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단지 남한 사람들은 탈북 청년들이 ‘북한의 편’을 들어 남한 중심의 통일론에 정면으로 반대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분노했다. 북한의 입장에 설 거라면 우리는 너희들에게 정착지원금을 대줄 이유가 없으니 당장 북한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악성 댓글의 결론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는 새로운 유형의 ‘탈북자’가 등장했다. 물론 1990년대 중반 이전에도 ‘탈북자’는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귀순 용사’들이다. 이들은 ‘북한 체제가 싫어서 남한을 선택한 이들’로서 적극적인 체제적·이념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귀순’은 특별한 ‘사건’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이들은 그동안 반공·반북 프레임을 강화시키고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 북한 귀순 용사 이웅평 대위 기자회견. <사진출처: e-영상역사관>

1990년대 중반 이후 등장한 ‘탈북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귀순 용사’와는 다른 존재다.  첫째, 탈북의 동기가 탈이념적 색채를 띠었다. 이들은 식량난 등 생존 문제로 인해 탈북했다. 남한 국민이 되기를 선택했지만, 이들의 선택은 체제적·이념적인 것이 아니었다. 둘째,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탈북과 입국이 특별한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일상이 됐다. 이제 ‘탈북자’들의 탈북은 크게 ‘사건’화되지 않는다. 셋째, 극소수에 불과했던 ‘탈북자’들이 세력화할 정도의 규모가 됐다. 넷째, 주로 ‘반공 강사’ 등으로 활동했던 ‘귀순 용사’와는 달리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한 ‘탈북자’들은 존재 조건과 활동 영역 모두에서 체제적·이념적 틀을 넘어서고 있다. 또한 ‘사건’을 통해 각인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남한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탈북자’들은 이미 한국 사회의 곳곳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동등한 자격으로서 남한 주민들과 마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변하지 않는 한국 사회

오히려 준비가 안 된 쪽은 한국 사회인지도 모른다. ‘탈북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시선은 이중적이다. 남북의 교류 협력이 활성화되고 남북 관계가 좋을 때는 ‘먼저 온 통일’이라며 추어올리고 환대하다가 남북의 군사적 긴장 관계가 높아지고 남북 대결 구도가 강화되면 예의 ‘빨갱이’로 치부한다. 남북 관계가 안 좋을 때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 빨갱이 새끼야”라는 혐오성 발언이다. 소수자에 대한 시선 중 ‘탈북자’에 대한 것만큼 극과 극을 달리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는 분단의 자기완결 시스템이자 복잡한 상호작용 시스템인, 이른바 ‘분단 생태계’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단 생태계는 좌우 대립과 분단에 의해 만들어졌고, 전쟁과 반복되는 남북 대결 구도로 인해 강화됐다. ‘분단 생태계’는 남북 대결 구도 속에 형성됐던 편견과 고정관념을 더욱 공고한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속성을 지닌다. 남한 사람들은 그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탈북자’ 3만 명 시대, ‘탈북자’들은 그들의 존재 조건과 다양한 활동 방식으로 기존의 분단 생태계를 균열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탈북자’들은 분단 생태계의 지형을 변화시키고 있는 새로운 주체들이다. 새로운 주체들은 이미 ‘귀순 용사’의 자리와 역할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반공·반북을 대변하는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기를 원한다. 악성 댓글 사건은 탈북자가 서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에 대해 ‘탈북자’와 남한 사람들의 생각이 처음으로 정면충돌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충돌이 통일론을 둘러싸고 벌어졌지만, 앞으로는 다양한 영역에서 충돌이 발생할 것이다. C는 말한다.

“설사 제가 통일을 반대한다고 한들 뭐가 문제가 되나요? 우리는 남한 국민으로서 통일을 찬성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어요. (……) 제가 촛불시위에 가 볼까 하면 새터민 분들이 너 거기 나가지 마라. 왜 나가냐? 정부에서 우리를 도와주는데 그러면 안 되지. 정부 지원이 끊기면 어떻게 하냐. 그러면 저는 그래요. 나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다.”

귀순 용사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탈북자’의 모습은 ‘고난의 행군 시기 굶주림에 못 이겨 북한을 탈출한’ 이들의 모습이다. 남한 사람들이 ‘탈북자’ 하면 연상하는 이미지는 굶주림, 꽃제비, 목숨을 건 탈출 등이다. ‘탈북자’는 연민과 지원이 대상이 될 수는 있어도 동등한 시민권을 갖거나 한국 사회가 정해놓은 자리를 벗어날 자유가 없다.

SBS 광복 70주년 특집다큐 「어서오시라요」에 대한 악성 댓글 사건은 ‘남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탈북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그것은 탈북자들 자신이 생각하는 자리와 어떤 거리를 만들고 있는가?’, ‘한국 사회가 마련해야 할 탈북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는 ‘탈북자’와 남한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고 화합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일 뿐 아니라 결국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고 화합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그 대답을 할 차례다. 악성 댓글이 아니라 진지한 자기성찰과 무게감 있는 고민을 가지고 말이다. 지금까지 ‘탈북자’들을 ‘먼저 온 통일’로 환대한다는 의미는 북을 버리고 남을 선택한 탈북자를 수용한다는 흡수통일의 의미였다. 이제 한국사회는 그 의미를 북의 정체성을 가진 ‘탈북자’들과 공존하고 화합하는 법을 서로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사람의 통일을 미리 연습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정진아 건국대 대학원·통일인문학과
필자는 연세대에서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해방 이후 남북이 만들어 가고자 했던 국가, 사회, 개인의 모습에 관심이 많다. 특히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상과 병리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남북의 사람들과 코리언디아스포라의 생활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박혜연 2017-03-21 13:59:06
과거 이른바 고난의행군이전이나 김일성이 사망하기전에 탈북한 탈북민들을 귀순용사 귀순자라고 불리우며 왠만한 귀빈대접을 받으며 잘살고있는데 현재는 상류층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호구로 생각하고 외국인노동자들보다 못한 푸대접을 받고있으니 가슴이 아프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