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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 최희섭 논설위원/전주대·영문학
  • 승인 2017.03.06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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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 최희섭 논설위원/전주대·영문학
▲ 최희섭 논설위원

입학식을 하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각자 자신의 여건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대학에 합격했을 것이다.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대학을 선택한 경우는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대학마다 보다 우수한 자질이 있는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 우리 대학은 이러 저러한 재정지원사업을 수주 받았고, 어떠한 특징이 있으며, 무슨 혜택이 있다고 홍보한다. 학생들이 이러한 광고를 보고 지원했건 다른 이유로 지원했건 큰 희망을 품고 대학에 들어왔을 것이다. 대학마다 자신의 장점을 자랑하지만, 건학이념이나 교훈, 교시를 크게 홍보하지는 않는 것 같다.

대학마다 건학정신, 이념, 교훈 또는 교시로 내세우는 것은 대부분 자유, 정의, 진리, 평화, 선과 같은 삶의 본질과 관계된 것들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것을 최상위 개념으로 놓고, 이에 바탕을 두고 인격을 도야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을 배출하고자 한다. 교양 있는 지도자나 지성인을 기르고자 하거나, 봉사자 내지는 전문가 양성을 교육목표나 교육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대체로 새로운 학문을 습득하는 행복하고 활력 넘치는 배움터를 지향한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요즘 우리나라의 대학이 자신의 존재 이유에 걸맞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반문해본다.

본래 대학의 한자어 ‘大學’은 ‘크게 배운다, 큰 것을 배운다’는 의미다. 대학교를 뜻하는 영어 ‘University’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선생과 학자들의 공동체’라는 의미다. 영어의 의미와 한자어의 의미를 종합해보면 대학교는 선생과 학자들이 모여 있는 크게 배우는 곳, 또는 큰 것을 배우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배우는 것, 또는 배울만한 큰 것이 무엇인가.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할 때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이 큰 것이고, 그것을 배우는 것이 크게 배우는 것인가. 지식이나 기술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데 그것을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큰 것은 건학이념이나 교훈, 교시로 밝히고 있는 삶의 본질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본질적인 요소다.

바로 이것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 대학생들은 치열한 경쟁을 거쳐 자신이 선택한 학교에 입학한다. 여기에서 교수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교수는 학생들이 활력 넘치는 대학 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졸업 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현실이 그러한가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할 수 없다는 데에 교수의 딜레마가 있다. 좀 더 가혹하게 이야기한다면 자기 학교의 건학이념이나 교시를 알지 못하고 있는 교수들도 많지 않은가 의심스럽다.

지식 전달자 내지는 기술 전수자의 역할에 만족하고 있는 교수들이 많이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힘들다.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직업인, 단순한 기능인으로서의 역할에 그치는 교수가 많다는 느낌도 드는 게 사실이다.

보수가 많은 직장에 취업하는 졸업생을 많이 배출하는 대학이 좋은 학교라고 평가받고 그러한 졸업생을 많이 가르치는 교수를 세칭 훌륭한 교수라고 한다. 우리나라 경제, 교육, 정치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평가가 좋은 대학교에서 세칭 훌륭한 교수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사회의 지탄을 받는 일부 지도자들도 평가가 좋은 대학, 세칭 훌륭한 교수에게서 배웠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진리, 정의, 자유, 평화, 선과 같은 인간다운 삶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제대로 배운 것 같지는 않다. 제대로 배웠다면 거짓과 진실, 정의와 불의, 자유와 방종, 선과 악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나라를 혼란에 빠트려 온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분들의 행태를 보면 이것들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에 잘 적응하는 기능인을 길러야 하는가? 지식과 기능은 좀 부족하더라도 인간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하는가? 본말이 전도된 시대에 본말이 전도된 교육을 해야 하는가?

최희섭 논설위원/전주대·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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