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1:05 (금)
"나쁜 삶 속에서도 좋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나쁜 삶 속에서도 좋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까?"
  • 김민혁 미국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 승인 2017.03.02 1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외 대학은 지금_ 트럼트 시대에 돌아보는 저항, 시민불복종, 민주적 시민성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해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한 달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취임식이 있던 날에는 연구실 동료들과 모니터 앞에 둘러앉아서 취임식 연설을 시청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다음과 같이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지르기도 했다. “이거 참 어둡구만…(It’s so dark).” 이슬람 7개 국가들로부터의 이민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행정명령 소동에서부터 각료 임명을 둘러싼 스캔들 등으로 하루하루 조용히 넘어가는 날들이 없어 보이지만, 이 글에서는 소란스러운 정치뉴스는 잠시 건너뛰고 보다 깊숙한 영역에 잠재돼 있는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시민들의 저항권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이전에, 논의의 맥락에 관해 조금 덧붙이고 싶다. 필자가 속해있는 미국 인디애나대는 1월 초에 벌써 봄 학기가 시작됐다. 정치학과 대학원 과정에서는 「어둠의 시기에 돌아보는 민주적 시민성(Democratic Citizenship in Dark Times)」라는 정치철학 세미나가 개설됐다. 강의를 개설한 제프리 아이작(Jeffrey C. Isaac) 교수가 강의계획서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이 세미나는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트럼프 현상이 부상한 일련의 사건들을 미국 사회의 어둠의 시기의 도래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아이작 교수는 지난해 11월에 온라인 웹진 퍼블릭 세미나(www.publicseminar.org)에 기고한 「정치학자들이여, 강의실에서 반대의견과 저항을 가르치자」라는 글을 통해 주장한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트럼프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이면서 동시에 이론적인 틀을 고민하고 일상적인 정치적 토론과 시민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을 이 ‘어둠의 시기’ 세미나를 통해 쌓아나가겠다고 제안한다.

'어둠의 시기' 세미나의 무게

어느덧 학기가 시작된 지도 한 달 반이 지나가고 있고, 필자도 이 ‘어둠의 시기’ 세미나에 참석하며 포퓰리즘, 불복종, 저항, 현대 자유민주주의 등과 관련된 다양한 문건들을 읽고 토론하며 미국를 비롯한 서구사회가 처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새로운 시각들을 접하고 있다. 우선, 첫째로 소개하고 싶은 내용은 최근에 출간된 뮬러 펜실베니아대 교수의 『포퓰리즘은 무엇인가?(What is Populism)』(펜실베니아대출판부, 2016년)와 러다니 볼로냐대 교수의 『서양정치사상의 전통에서 불복종에 관한 논의의 계보학(Disobedience in Western Political Thought: A Genealogy)』 (캠브리지대출판부, 2013. 이하 ‘불복종의 계보학’) 두 책이다.

먼저 뮬러 교수는 『포퓰리즘은 무엇인가?』에서 포퓰리즘의 근본적인 속성을 ‘반-다원주의적’이고 ‘반-자유주의적’인, 그리고 ‘반-엘리트주의적’인 정서를 결합한 정치에 대한 일원론적 해석의 시도로 규정한다. 2000년대 후반부터 상승하고 있는 유럽과 미국 내 우파 포퓰리즘의 레토릭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포퓰리즘의 특성이 그대로 관찰된다. 예컨대, 얼마 전 있었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식 연설도 같은 맥락에서 독해를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처한 문제를 그 누구도 아닌 오직 트럼프 ‘자신’ 만이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은 민주주의의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문제해결 과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취임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날 미국 시민들이 처한 상황을 ‘대재앙(carnage)’으로 묘사하면서 구체적으로 어떤 문제가 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건너뛰었다. 그러면서 그는 “미국 시민들의 대재앙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멈추게 될 것이다(American carnage stops here and now.)”라고 언급했다. 흔히 접하는 정치인들의 레토릭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대목이지만, 이러한 정치적 연설 방식은 시민들의 반-정치적 정서에 호소하는 포퓰리즘의 전형적인 수사법과 일치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이 대목과 관련해서는 아이작 교수의 분석을 참조했다).

다음으로, 러다니 교수는 『불복종에 관한 계보학』에서 근대 서양 민주주의 이론의 탄생과정에서 주요한 정치사상가들이 근대국가 질서의 정통성과 더불어 시민들이 국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어떻게 사유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파고 들어갔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어느 시점부터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에서 불복종의 논의 앞에 ‘시민적/온건한(civil)’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기 시작했는지의 과정에 대한 추적과 그 함의에 대한 예리한 분석이다.

예컨대, 시민불복종의 대표적 사상가로 여겨지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간디,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실제로 고민하고 주장했던 바는 이른바 ‘시민불복종’ 담론에서 강조하는 무조적인 ‘비폭력’, ‘온건함’ 우선의 논리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이러한 해석은 근대 국가의 강력한 권력과 권위에 저항하고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시민들의 활동영역을 애초부터 제약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고 러다니 교수는 지적한다. 예를 들어서, 독일의 나치 정부와 같은 부당하고 억압적인 (그러나 민주적 절차를 통해 권력을 잡은) 체제 앞에서의 정당한 시민권의 행사는 결코 ‘온건’하고 ‘절차적’인 방식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시민불복종 이론'에 대한 새로운 반박

물론 이러한 러다니 교수의 해석이 폭력적 저항에 대한 절대적 옹호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민들의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은 ‘온건함’이라는 규범적 굴레를 벗어나서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이며 효과적인 시민들의 결집된 힘의 사용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방식의 직접적인 시민권의 행사가 허용되는 한에서만이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스스로의 통치권력을 제한적이고 절제된 방식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견제의 균형이 유지 될 수 있다. 따라서 러다니 교수의 『불복종에 관한 계보학』은 ‘시민불복종 이론’에 대한 반박으로도 읽혀질 수 있다. 

이외에도, 주디스 버틀러 캘리포니아대(버클리) 교수의 최근작 『집회의 행위수행적 이론에 관한 단상들(Notes Toward a Performative Theory of Assembly)』 (하버드대출판부, 2015)이나 같은 대학의 웬디 브라운 교수의 『민주주의의 해체(Undoing the Demos: Neoliberalism’s Stealth Revolution)』 (Zone Books, 2015)와 같은 저서들은 신자유주의 질서가 경제적 삶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들―정치, 사회, 교육, 의료 등 ―에 침투하며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치참여, 언론과 집회의 자유, 시민권 보장,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 등의 사회적 기능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버틀러 교수의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 개인적으로는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나쁜 삶 속에서도 좋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가?(Can One Lead a Good Life in a Bad Life?)’. 버틀러 교수의 대답은, 그리고 유사하게 나의 대답은, 부정적인 방향을 향한다. 좋은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인 조건들이 충족돼야 하기 때문이다. 밤늦도록 퇴근하지 못하고 주말에도 일을 이어나가는 삶, 불안한 미래에 걱정이 가득한 삶, 의료와 주거 등의 기본적 삶의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는 삶의 조건 속에서도 좋은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규범적 명령은 나약한 개인들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것일 수 있다.

어둠의 시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면, 아마도 지금의 어둠에 대한 근본적이고 깊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많은 사상가들 (마키아벨리, 아렌트, 마루야마 등)은 모두 어둠의 시기를 꿋꿋이 거쳐 왔고 그 결과로 인간과 정치적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남겼다. 바쁜 학기를 보내며 힘겨운 박사과정의 첫 해를 보내고 있지만, 미국사회의 정치적 현상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다음 통신원 원고를 통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을 약속드린다.

김민혁 해외통신원/인디애나대 박사과정·정치학

다양한 정치·사회적 제도들을 활용해 시민들의 자발적 협력을 강화하고 갈등을 해결하는 민주적 거버넌스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민주주의 이론과 공공정책 분야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