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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의 ‘상호성’이 보편 윤리와 공통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다”
“황금률의 ‘상호성’이 보편 윤리와 공통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2.27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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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_ 48강.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의 ‘보편 윤리―자비, 인, 隣仁愛’

“공통 도덕에 대한 인식, 도덕 교육에서 황금률이 차지하는 중요성 회복, 그리고 넘침의 윤리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크게 요구되는 보살핌의 경제를 위한 훌륭한 기초가 될 수 있다.”
‘문화의 안과 밖’은 지난 25일(토) 서울 종로구 안국동 W스테이지에서 진행된 ‘윤리와 인간의 삶’ 7섹션 ‘윤리의 정신적 차원’ 다섯 번째 강연에 나선 강영안 서강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강 명예교수는 이날 ‘보편 윤리―자비, 인, 隣人愛’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보편 윤리의 가장 중요한 규칙으로 황금률의 가치를 고려하며 인간에게 공통의 윤리가 가능한지 화두를 던졌다. 특히 강 명예교수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유명한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이 비유에서 윤리적 행위의 네 가지 특성을 읽어냈다. 그가 말하는 네 가지 요소는 사건에 관한 지각과 지식, 상황에 대한 민감한 반응, 그에 따른 행동, 그리고 결과들에 대한 배려다.
그는 또 노스캐롤라이나대 석좌교수로 있는 로버트 메리휴 애덤스와 시카고대에서 가르치다가 타계한 윤리학자 앨런 도내건을 인용해 ‘공통도덕’의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도내건과 애덤스의 접근 사이에 ‘제3의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강 명예교수가 이날 언급한 ‘황금률’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만큼 나도 남에게 해주고, 남이 나에게 해주는 만큼 나도 남에게 해줘야 한다’는 규칙의 의미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사진 ⓒ서강대학교)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공통도덕의 존재방식, 그리고 황금률

문화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계된 개념이 일반적으로 ‘공통도덕’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떤 한 특정 문화나 특정 지역, 특정 종교와 관련해서 우리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한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한 특정 공동체를 뛰어 넘어 가능한 ‘공통도덕’ 또는 ‘상식에 근거한 도덕’을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하기 위해 나는 예일대를 은퇴하고 지금은 노스캐롤라이나대 석좌교수 자리와 ‘랏거스 종교철학 센터’ 객원 연구교수로 있는 로버트 메리휴 애덤스(Robert Merrihew Adams)와 시카고대에서 가르치다가 타계한 윤리학자 앨런 도내건(Alan Donagan)을 등장시키고 싶다.

공통윤리의 현실성과 가능성에 대한 논의를 할 때 애덤스는 윤리 이론과 도덕을 구별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를 따르면 공통된 윤리 이론은 없다 해도 여러 문화가 공통으로 공유하는 공통도덕은 존재한다. 이 점에서 그를 공통도덕에 대한 낙관론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내건은 공통도덕을 애덤스와는 다르게 이해한다. 공통도덕은 도내건을 따르면 “객관적으로 좋거나 나쁜 행동으로 고려된 인간 행위들에 관한 법 또는 계율의 체계”이다. 도내건의 이러한 이해는 칸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공통도덕과 관련해 애덤스와 도내건 사이의 대립은 칸트와 헤겔 사이의 대립을 상기시킨다. 내가 보기에는 도내건의 ‘형식적인(formal)’ 접근법 또는 칸트적인 접근법과 애덤스의 ‘실질적(material)’인, ‘사회적인’ 접근법 또는 헤겔적인 접근법 사이에 제3의 길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적으로 나는 칸트적인 방식을 좀 더 선호한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 배경에서 살아본 경험에 비춰볼 때, 도덕 또는 적어도 도덕의 어떤 부분들은 매우 상이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기독교 사상가들, 그 가운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도 거의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관련해서 동일한 윤리적 규범을 말할 수 있다. 우선 『그리스도교  교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사랑의 원리와 비유적/문자적 의미의 구별을 다루는 맥락에서 일종의 공통도덕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기에 나오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형식의 ‘황금률’은 민족 차이를 초월해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공통의 도덕 명령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존재한다고 얘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하고 있다.

거의 비슷한 생각을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인간의 연약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공정성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이 인간 사회에 존재하며 이것이 바로 모든 인간이 이성의 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라고 보았다. 물론 인간성의 도덕적 자기완성과 관련해서는 칼빈이 철저하게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7장 12절~14절과 누가복음 6장 31절에 관한 칼빈의 주석을 보면 정의 또는 공정성의 의식이 황금률에 담겨있다고 칼빈이 생각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황금률이 단지 예수의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주어진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황금률은 모든 인류가 가장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최소한의 보편윤리의 규칙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이 황금률을 ‘정의/올바름/공평/공정성의 기준’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은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와 함께 공존과 상생을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추구해야 할 보편윤리를 위한 기본적인 도덕 기준으로 보도록 격려해 준다.

보편윤리와 황금률, 그리고 ‘넘침’의 윤리

황금률과 관련해서 유교에서 이해하는 방식과 기독교에서 이해하는 방식의 중요한 특징을 살펴보자. 공자는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형식으로 진술한다. “남이 너 자신에게 행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을 너는 남에게 행하지 말라.” 그러나 공자가 긍정적인 형식으로도 진술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논어』 옹야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한다. “무릇 仁한 사람은 자신이 세워지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남을 세우고,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남을 도달하게 한다(夫仁者, 己欲而立人, 己欲達而達人.)” 공자는 나와 타인의 상호성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논어』에는 나(己)와 타인(人) 사이의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논어』의 일관된 가르침을 따르면 나는 다른 이들의 인정에 대해 염려해서는 안 되며, 내가 다른 이들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오히려 염려해야 한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함양을 위해 공부해야 한다. 만약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강조돼야 할 것은 자신과 다른 이들 사이의 상호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도덕적 함양이다. 보편윤리의 관점에서 유교는 주어진 구체적인 공동체에서의 개인의 도덕 교육에 분명히 기여할 수 있다.

나는 성경적 맥락에서 황금률을 다시 한 번 면밀히 살펴보자고 제안하고자 한다. 「누가복음」에만 우리의 관심을 한정시켜 보자. 「누가복음」 6장 31절에는 황금률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다음 구절이 있다. “남들이 너에게 행하기를 원하는 대로 남들에게 행하라.”

황금률은 단지 상호성의 규칙을 지키는 것 보다 한 발 더 나아갈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예수의 역설적인 권유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이 말은 놀랍다. 우선, 예수는 이 말을 명령, 그러니까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이 명령은 매우 관습적인 방식으로 주어진다. 예수는 황금률의 관습적인 의미를 완전히 전환시킨다. 표면적으로, 예수의 말은 단지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황금률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한 발 더 나아간다면 그것은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가장 깊은 차원에서 그것은 “너희의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말과 같다. 나는 가장 관습적인 이해로부터 가장 심오한 차원으로의 역설적인 변형까지 황금률의 상이한 층들을 고수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황금률은 공통도덕과 보편윤리를 위한 명시적인 규칙으로 사용되기에는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고려할 수 있다. 내어 줌의 가능성과 현실성은 ‘주어짐’, 곧 ‘선물로 받음’을 앞서 전제한다.

하웃즈바르트의 제안

나는 세계화가 제기하는 윤리적 도전에서 시작해 넘침의 윤리로 마무리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계화에 관한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의 논의는 의미 있다고 생각해 결론 부분에 덧붙이고자 한다. 미래를 위한 5단계에 대한 하웃즈바르트의 제안은 깊은 윤리적인 신념으로 뒷받침된다. 절제 있게, 이제는 충분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포기하고 내어주면서, 타자의 얼굴에 개방돼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오직 윤리적 헌신을 동반해야만 가능하다. 경제적인 세계화에 관한 하웃즈바르트의 논의에서 등장하는 모든 윤리적인 관점들은 절망과 체념의 패배주의가 아니라 희망의 종말론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하웃즈바르트는 “대안이 전혀 없다”는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신 “대안은 수천 가지”라는 TATA(There are thousands of alternatives.)를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세계화는 숙명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이다. 그리스도교를 위시하여 위대한 윤리적, 종교적 전통은 이기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타자와 함께 하는 삶의 방식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으로부터 타자 중심의 삶의 방식으로, 불만과 끊임없는 이익 추구의 경제가 지배하는 삶으로부터 넘침과 만족(saturation)과 안식의 경제가 지배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이 강조한 공통도덕에 대한 인식, 도덕 교육에서 황금률이 차지하는 중요성 회복, 그리고 넘침의 윤리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크게 요구되는 보살핌의 경제를 위한 훌륭한 기초가 될 수 있다. 세계화돼 가는 우리의 현실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자에 대한 책임과 정의 그리고 평화의 관점일 것이다. 책임이 윤리적인 인격의 존재와 행위의 양태라면, 정의와 평화는 윤리적 행위의 목적이자 공동체 속에서 번영하는 인간의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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