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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 사는 그대는 봄의 전령사
강가에 사는 그대는 봄의 전령사
  •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
  • 승인 2017.02.27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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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의 생물읽기 세상읽기 174. 갯버들

얼마전만해도 겨울추위가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점점 그놈의 시린 냉기가 영 힘들고 몹시 두렵다. 필자도 찌든 엉세판에 끔찍이 시달렸던 아득한 유년시절을 경험했지만 옛사람들의 따스한 봄 기다림이 이만저만 고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여유로운 마음만은 잃지 않았으니 몸서리치는 긴긴 한겨울을 꼬박 견뎌 이겨내는(消寒) 감미로운 낭만적 풍습으로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게 있었다.

아흐레마다 점차 추위가 누그러져 9일이 아홉 번째(9×9) 되풀이되는 막바지 81일째가 되는 날에 바야흐로 추위가 풀린다는 뜻이다. 텅 빈 매화나무가지에 꽃망울 여든 한 개를 그려놓고 동짓날부터 날마다 망울하나씩을 붉게 색칠을 해나간다. 비로소 입춘이 지날 무렵이면 매화가지에 온통 매화꽃송이가 만발한다!

이렇듯 옛날 선비들은 마냥 앉아서 물끄러미 봄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매화꽃을 피우면서 화려한 봄을 이루어냈다. 나 혼자 미국에 지낼 때다. 귀국 한 달 전부터 달력에 하루하루 빗금을 치면서 처자식 만날 것을 진저리나게 기다렸으니 그 또한 소한도 못지 않았다.

그렇다. 봄의 전령사가 뜰에 매화라면 강가에는 ‘갯버들’이다. ‘버들강아지’ ‘버들개지’ ‘버들개비’로도 불리는 이 나무는 제아무리 추워도 봄은 온다는 희망을 주는 나무렷다. 무엇보다 따사로운 햇살에 솜털을 뒤집어 쓴 갯버들 꽃 이삭은 허기를 때우는 주전부리로 제몫을 톡톡히 했으니 아삭거리는 식감에 달달한 그 맛을 잊지 못한다.

갯버들(Salix gracilistyla)은 버드나뭇과의 낙엽활엽관목으로 이삭에 솜털이 있다하여 솜털버들이라 부르며 蒲柳·水楊·細柱柳라고도 한다. 극동아시아(한국·일본·중국)가 원산지고, 바로 그 지역에 주로 난다.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하고 냇가나 산골짜기 등 물기 많은 땅에 지천으로 난다. 높이 1~2m로 뿌리 근처에서 가지가 많이 나고(叢生), 어린 가지는 노란빛을 띤 푸른빛이며, 처음에는 털이 있으나 곧 없어진다. 학명의 속명 Salix는 ‘버드나무(willow)’란 뜻이고, 종소명 gracilistyla는 ‘호리호리한(gracile·slim) 암술대(styla)’에서 비롯했다.

갯버들(pussy willow)은 ‘개울가(갯가)에 나는 버드나무’를 이르며 낭창하게 옆으로 굽어지듯 자라면서 전체 나무모양이 엉성하게 둥글어진다. 어린나무는 회색빛 도는 녹갈색을 띠다가 묵을수록 얇은 껍질이 세로로 허물처럼 벗겨지면서 밝은 갈색얼룩이 진다.

겨울눈(冬芽)에는 붉은 비늘조각(鱗片)이 모자처럼 덮어있어 솜털과 함께 추위를 막는데 하도 솜털이 빽빽하게 나있어 냉기는 얼씬도 못한다. 한겨울엔 비늘 조각이 꽃 이삭을 통째로 둘러싸고 있었으나 봄기운이 맴돌면 서둘러 그것이 벗겨지면서 보들보들한 솜이불에 싸인 이삭이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꽃의 생김새와 색깔이 비길 데 없이 소담스러워 꽃꽂이 재료로 많이 쓰인다.

잎은 마디마다 서로 어긋나게 자리하고, 거꾸로 세운 바소꼴(披針形, lanceolate)로 양 끝이 뾰족하며, 잎의 길이는 5~10cm 정도로 가장자리에는 털 흡사한 작은 톱니(鋸齒)가 있다. 잎 표면은 털이 덮여 있다가 없어지고, 뒷면은 털이 촘촘히 나서 흰 빛이 돈다. 암수딴그루(雌雄異株)로 이삭은 3~4월에 잎겨드랑이에 달리고, 암술이나 수술 중 어느 하나만을 가진 단성화(홑성꽃)로 동물꼬리 모양이면서 밑으로 처지는 이삭꽃차례(穗狀花序, spike)다. 꽃은 지난해 잎이 붙었던 자리에서 원기둥꼴로 많이 뭉쳐 피는데 은백색으로 밝게 반사하는 솜털이 있고, 꽃을 싼 잎(苞葉)의 위쪽이 흑색이며, 양면에 긴 백색털이 빽빽이 난다.

암꽃이삭은 길이 2~5㎝의 긴 타원형으로 뭉쳐 달리고, 꽃망울일 때는 검붉은 회색을 띠다가 활짝 피면 암술이 나와 연노란 회색으로 변하며, 붉은 꿀샘이 1개이고, 암술머리는 4개다. 수꽃이삭은 길이 3~3.5㎝로 암컷보다 조금 크고, 역시 타원형으로 꽃봉오리일 때는 검은 회색을 띠다가 꽃이 피면 머리에 붉은색 꽃밥(葯, anther)이 달린 수술이 나오며, 거기서 꽃가루를 터트려 온통 싯누렇게 변한다. 4~5월 열매가 익어갈 무렵에 새잎이 새록새록 솟는데 길이 3cm 정도의 긴 타원형 열매가 암꽃모양 그대로 적록색으로 여문다. 열매가 푹 익으면 버들개지가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피어오르고, 다른 버드나무들처럼 새하얀 솜에 매달린 씨앗이 갯바람에 날려(風散)간다. 덜 익은 열매는 그대로 따먹고, 약용으로는 황달·옻·두통에 쓰는데 장복하면 위장장애가 올 수 있다한다.

어느 나무나 물은 줄기 안에 있는 딱딱한 목질(물관부)을 타고 오르고, 양분은 겉껍질 안 벽(체관부)으로 내려간다. 그래서 버들강아지의 목질부와 껍질 사이에 수액이 오르면 매끄러워져 껍질이 잘 빠진다. 이른 봄철에 손가락 굵기에 반 뼘쯤 되는 물오른 버들강아지나 버드나무가지를 잘라 낫등으로 고루고루 살살, 톡톡 쳐서 조심스럽게 비틀어 껍데기를 쏙 뽑아 호드기(버들피리)를 부른다.

한쪽 끝단을 얇디얇게 삐져내 입에 물게끔 떨림판(reed)을 만들고는 삐삐삐 소리 내 불렀지. 어느새 여린 풀잎들이 야들야들 돋으면 그놈들을 따 입술사이에 끼우고는 풀피리를 불었고. 어지간히 못 먹고 못 살아도 부끄럽거나 부러울 것 하나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는데….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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