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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의 소설 혹은 블랙리스트
엔도 슈사쿠의 소설 혹은 블랙리스트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7.02.20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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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대학원 학생들과 함께 이광수 장편소설 『무정』의 <매일신보>(1917.1.1~6.14) 발표본 독해 공부를 마치고 박사학위 논문을 딴 학생을 간단히 축하해 주고 집에 돌아오니 8시가 조금 넘었다. 요즘 위가 좋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리고 오늘은 한 일도 없는데 몹시 피로하다고 느끼면서 대충 씻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피로를 가시게 하는 데는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잠이 가장 좋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눈이 떠졌을 때 시계를 보니 새벽 1시다. 어느새 일찍 잠들든 늦게 잠들든 새벽이면 깨어나는 체질로 바뀐 지 오래다. 충분한 숙면을 취하면 좋으련만 눈이 안 떠져 괴로운 나이는 다 지나가고 아무리 피로하고 정신이 몽롱해도 잠은 하루 겨우 5시간 앞뒤다.

무엇이든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정작 많지 않다. 결국은 소설 한 편을 읽기로 한다. 머리맡에는 옛날에 신구문화사에서 펴낸 『세계전후문제작품집』의 일본편이 한달 째 그대로 놓여 있다.

첫 장을 펴자 작품은 『침묵』의 작가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3.27~1996.9.29)의 일본 아쿠타가와상 33회 수상 작품이다. 그때는 1955년이었고, 이 「백색인(白い人)」의 번역자는 소설가이기도 한 정한숙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낯설게 보일 수 있을까. 왜냐하면 이 작품을 읽으려는데, 언제 어느 때 읽었던 것인지 책에는 이미 나 자신의 밑줄 긋기와 메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차례 시행돼 있었던 것이다. 예전에 한 번 밑줄 긋고 메모까지 하며 읽은 작품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로 읽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경험이라 할 만했다.

일본작가인데, 비록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거기 유학까지 했다고는 해도 프랑스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소설을 쓰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전적인 작품답게 플롯과 주인공의 내면 묘사는 치밀하다 할만했다. 그것은 독일인 어머니,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세계2차대전 중에 독일 비밀경찰의 통역꾼으로 일하게 된 어떤 음습한 인물의 심리를 그린 것이었다.

우연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어떤 필연 같은 것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학교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며칠 전 단체로 나가사키 소토메라는 곳에 있는 엔도 슈사쿠 문학관에 다녀왔는데, 이 밤에 손에 잡힌 소설이 바로 그의 것이라니. 그리고 소설은 바로 이 우연에 대하여, 인간에 대하여, 악에 대하여, 고문에 대하여, 음험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린 엔도에 따르면 나치는 인간을 약자라 단정하고 그들을 노예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 나치 부역자는 독일에 점령당한 리용 시민들의 ‘약함’을 냉철하게 분석해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구절.

“나는 처형자의 죄상이 언제나 유태인이라는 데 놀랐다. 「‘피엘 방’은 유대적 인간이기 때문에 처형함」. 불란서인들은 독일인들이 유태인을 증오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시를 보는 그들은 내심 자신이 유대적 혈통이 아님에 우선 한숨을 내쉰다. 그때, 그들은 이미 죽음을 당한 ‘피엘 방’을 배반하고 저버린 것이다. 방이 유대적 혈통이라 치더라도 같은 불란서인이라는 것을 잊는 것이다. 나치는 이렇게 해서 불란서인의 비겁한 자기보전 본능을 이용하여 그들을 분열시킬 것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 심리가 한국 사회에도 어쩌면 똑같이 통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나치들’은 인간의 나약함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거기 오른 이름들이 같은 사람임을 잊고 자신만은 이 리스트에 들어있지 않음에 우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런 유추 같은 것 말이다.

분명 인간은 약하다. 그리고 즐겨 공동체를, 다른 사람들을 배반한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 속에서 끝내 그런 나약함의 몰락을 그렸다. 그런데 이 나라는 아직도 밤이 깊은 것 같다.

방민호 편집기획위원/서울대·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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