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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정보 : 일본 학술출판의 특징과 현황
학술정보 : 일본 학술출판의 특징과 현황
  •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 승인 2002.12.2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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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근 / 한국출판연구소 선임연구원

학술출판은 학술연구의 성과와 출판이라는 경제활동의 공통분모 위에 성립하는 독특한 영역이다. 때문에, 학술도서를 보면 그 사회의 학문적 지향성과 ‘학술유통’의 존재 방식이 드러난다. 지식정보 사회의 필수 영양소인 학술도서가 다량 생산되고 원활히 인체(사회) 곳곳에 미칠 때 한 나라의 건강지수와 행복지수, 미래지수가 높아질 것임은 자명하다.

필자·도서관 인프라 튼튼해

학술출판 동향에 앞서 점검해야 할 것이 환경 분석이다. 일본의 학술출판은 일식 요리와 닮았다. 음식의 질을 결정하는 맛, 영양, 청결도 중요하지만, ‘눈으로 먹는다’는 말처럼 식욕을 돋구는 외양 역시 상차림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광고 카피식 제목과 목차만으로도 독서욕을 자극하며, 해당 주제를 충분히 소화해 알기 쉽게 핵심을 풀어쓴 내용, 註와 인용을 가능한 줄임으로써 학문적 편력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논리를 펴는 비권위성 등은 학술도서가 소수 전공자들의 귀족출판이 아닌 대중출판의 영역임을 입증한다. 이러한 대중노선은 학위가 없는 업계 권위자를 과감히 교수로 채용하는 대학의 임용제도나, 현학적 표현보다는 명확한 의사 전달을 존중하는 문화풍토, 전문지식과 대중적 글쓰기 능력을 겸비한 학자 및 ‘중간필자’의 두터운 층, 출판시장 전체의 상업주의 체질과도 무관치 않다. 학술서라 할지라도 독자와 마케팅을 염두에 두고 기획, 집필되는 것이 전제 조건이다.
다음은 도서관의 충실한 운영과 학술도서 구입이 학술출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일본의 ‘출판연감 2002’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공도서관 및 대학도서관은 일본이 우리에 비해 관수에서 3.5배, 자료구입비는 7배나 많다. 여기에 각 기업 및 연구소가 운영하는 자료실 역시 학술출판 시장에서 적지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각종 도서관의 도서 구입이 출판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미국이 20%, 일본이 7% 수준이지만, 한국은 1%에 지나지 않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일본 지식인들은 도서관 인프라의 열악성을 역설하며, 최근에는 도서관 대출 증가에 따른 저작자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公共貸與權 신설 등 저작권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상당수 대학출판부가 독립채산제를 취하거나 대학간 공동출판을 할 정도로 독립적이고 탄력적인 운영을 꾀한다는 점이다. 상업출판사가 발행을 꺼리는 책은 당연히 대학출판부의 몫이다. 이들은 유통과 마케팅에도 힘을 기울여 학술도서의 사회적 역할을 다져나가고 있다. 학문 분야별로 전통 깊고 규모가 큰 전문출판사가 즐비하다는 것도 일본의 강점이다. 상업출판사 가운데도 잡지와 대중서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전문·학술서 출판에 재투자하는 곳이 많다. 우리와는 출판 풍토가 다르다.
이 외에도 학자들의 평생 노작을 모은 전집 출판이 관행화 된 점, 5천종에 가까운 잡지 중 상당수가 전문·학술 잡지로서 연재물의 단행본화 연계 출판이 활발한 점 등 일본 출판에는 많은 특성이 있다. 여기에, 학술연구와 출판 보조금을 적극 지원하는 정부와 대학의 노력도 학술출판을 뒷받침하는 시스템으로서 빠트릴 수 없다.

대학의 기업화로 학술출판 침체

하지만 지난 1980년대 이후 일본 대학의 대중화, 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학술출판 역시 침체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지난해 말 인문학술서 분야의 전문 도매상이던 스즈키 서점이 도산한 것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물론 이는, 출판사와 서점 마진을 우선시하던 회사 경영상의 문제에도 기인하지만, 그 배경에는 학술서의 전반적인 매출 감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지속된 장기간 경제 불황의 여파로 출판시장은 6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상태다. 시장의 규모는 10년 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출판시장의 바로미터인 발행부수 추이를 보면 학술출판의 침체가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4년간 사회과학, 공학 등은 발행부수가 꾸준히 증가한 데 비해 순수 인문학 및 기초 자연과학 분야는 감소가 두드러졌다.
인터넷의 등장에 따른 학술자료 정보원의 다원화나 전자화가 학술출판 위기에 한몫을 하는 것도 사실이리라. 이외에도, 수업용 필수 텍스트를 채택하기보다는 갖가지 자료를 학생들에게 추천하고 자신이 만든 프린트물과 강의 노트를 이용하는 젊은 교수진이 늘어나고 있다. 어느 나라에서나 골치 아프지만, 신세대 학생들은 전공서 구입을 기피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이래저래 학술서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대학생이 분수를 풀지 못할 정도로 수학실력이 저조해진 학력 저하 경향 속에서 超대중화 학술서 출판이 활발해지고, 학술자료의 데이터베이스 출판 강화, 절판된 학술서를 되살리고 소량 부수 출판을 가능케 한 주문형 출판(Print On Demand)의 비약적 성장, 코스트 절감을 위한 저자-출판사간 표준화된 편집 포맷 사용, 지난 6월 말 발행돼 현재 13쇄 8만부가 팔린 ‘口語譯 古事記’와 같은 사례에서 보듯 탁월한 기획력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학술출판의 위기’에 응전하고 있다.

대중을 의식하는 학문세계 표출

일찍부터 실용적 아카데미즘 풍조로 ‘학문의 위기’가 논의되지 않아 온 일본이지만, 학문과 출판 그 어떤 쪽의 위기는 다른 쪽의 위기를 구조화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학술출판의 어려움은 대학의 위기, 학생들의 불법복제, 부실한 도서관 등의 환경요인뿐 아니라, 학술 연구자와 출판사의 ‘읽힐 수 있는 책 만들기’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측면에서 일본의 학술출판은 대중을 의식하는 학문세계의 표출이며, 긍정적 의미에서의 ‘학문의 비즈니스화’ 경향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키워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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