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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마인츠 … 게슈타포 건물 앞에서 '야만의 역사'를 돌아보다
다시 찾은 마인츠 … 게슈타포 건물 앞에서 '야만의 역사'를 돌아보다
  • 서장원 독문학자
  • 승인 2017.02.15 11: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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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12. 오늘의 독일 지식인에게 듣다.
▲ 슈테판 링겔 (Stefan Ringel) 박사와의 대담을 마치고.

책상머리에만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인간과 사회를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겨울하늘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를 바라보며 망명이란 이러저러한 것 이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학자의 모습이 아니다. 지금까지 격주로 독일 망명 지식인 한 명씩을 선별해서 연재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딸들의 재정적 후원과 ‘소설과 사회’ 겨울 계절학기 강의료 반을 잘라내어 망명 지식인의 고향인 독일을 찾아 떠난다. 그들이 도망쳐야했고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으며 통일된 조국의 모습으로 다시 세계정치 무대의 한가운데에 우뚝하니 자리한 망명 지식인들의 고향은 지금 어떻게 변해있을까? 나치 집권으로 인한 야만의 시대에 대해 최근 독일 지식인들은 어떠한 말들을 하고 있을까? 이미 역사적으로 흘러간 인물이 된 망명 지식인의 자리에는 누가, 혹은 그 무엇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폭력의 시대에 대한 성찰 작업

▲ 마인츠대학을 찾은 필자

야만의 시대에 대한 자국의 반성과 최근 독일 내 지성계의 풍향 필드워크(field work)을 위해 루프트한자를 타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마인츠와 베를린을 방문한다. 마인츠는 내가 20년 넘게 독문학, 철학, 독일민속학을 공부하고 망명문학 연구로 박사를 한 곳이다. 학생 식당인 멘자(Mensa)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독문과 도서실로 걸어올 때면 저 멀리 비스바덴 상공으로 루프트한자가 내 조국 코리아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 / 아득한 먼 그 곳 / 그리움도 흘러가라.” 그 곳에는 한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 두 딸과 가난한 아내가 있었다. 그 비행기를 타고, 어린 애기였던 딸들이 마련해준 여비로 다시 독일에 간다. 마인츠에서 하루 밤을 자고 밖을 내다보니 길거리는 촉촉이 젖어있고, 희미하게 안개가 깔려있다. 아, 얼마만인가! 유유히 흐르는 라인강도, 천년의 마인츠 성당(마인츠 돔)도 여전하구나! 딱딱한 빵과 치즈가, 그리고 그 진한 커피가 정말 맛이 있구나. 마음이 편안하고 이제 좀 숨을 쉴만하구나! 가난한 학생이 아니라, 야만의 독일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해 나는 다시 왔다.

우연인가, 아니면 필연인가! 내가 투숙한 바로 옆 건물이 나치시대 마인츠의 게슈타포 건물이었다. 독일인들은 여기가 게슈타포 건물이었다고 분명히 써 붙여 놓았다. 몇 백 미터 저쪽에는 1938년 수정의 밤에 부셔지고 불타버린 시나고개가 몇 년 전에 증축돼 있었다. 내가 독일에 도착한 이틀 후인 1월 27일은 매년 ‘나치시대 희생자를 위한 추모의 날’로 지정돼 있었다. 마인츠 돔에서는 촛불을 밝혀놓고 안나 제거스의 작품 전시회가 있고, 나치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회가 전국적으로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었다. 안나 제거스는 유대인이자 공산주의자로 망명을 떠났다가 동독으로 귀환해 동독 문단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망명문학의 대표적인 여류 소설가다. 안나 제거스가 여기에서 태어났고, 미군 복장으로 귀환 이주한 칼 추크마이어의 고향도 마인츠다. 독일 어느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이곳 마인츠야 말로 망명 지식인에 대한 필드워크를 수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지역이다.

이번 작업을 위해 마인츠를 선택한 이유는 이곳의 역사와 현장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은사이신 베른하르트 슈피스(Bernhard Spies) 교수님과 에르윈 로터문트(Erwin Rotermund) 교수님을 비롯해 독일지식인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베를린은 나치 제3제국과 망명에 관련된 수많은 역사를 종합적으로 간직하고 있고, 독일통일 과정과 통일 후에 나타난 인간과 사회의 문제점을 면밀히 밝힌 이시대의 이야기꾼이자 저명한 소설가인 잉고 슐체(Ingo Schulze)를 만나기로 한 곳이다. 이번 회에는 우선 마인츠 현장에서 보고 느낀 망각과 기억의 역사를 염두에 두고 망명 지식인에 대한 논의가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해 오늘날 독일 지성인들은 어떠한 고민을 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독일 현지에서 세 사람의 지식인에게 묻다

이탈리아에 휴가 중인 은사님은 다음 주에 뵙기로 하고, 독일 지식인들과의 현지 대화를 위해 3인을 선정한 다음 개별적으로 그들을 방문 인터뷰했다. 지식인의 성향에 따라 주제를 설정하고, 주제가 빗나가지 않도록 구체적인 대담을 유도했다. 독일 지식인들은 현재 독일로 유입되는 이주자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우선 첫 번째 과제로 삼았다. 그러한 후 1933년 이후 독일을 떠나야만 했던 나치 독재시절의 지식인들에 대해 현재의 독일 지식인들은 어떠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라는 것을 두 번째 과제로 설정했다. 세 번째는 오늘날에도 알게 모르게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망명객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독일 내에 거주하고 있는 망명객을 찾아내어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첫 번째 주제 면담을 위해 전형적인 지식인을, 두 번째 질문을 위해 독일내의 향토 사학자를, 세 번째 주제를 위해 이란 망명객을 선정했다.

▲ 크리스토프 륍 (Christoph R?b) 씨와 대담 중에.

2017년 1월 28일 슈테판 링겔(Stefan Ringel) 박사와 인터뷰했다. 링겔씨는 마인츠에서 태어나고 마인츠에서 자라 마인츠의 김나지움을 졸업한 대표적인 마인츠인이다. 그의 딸도 마인츠의 일류 김나지움을 다닌다고 자랑하고 아들도 내년에는 일류 김나지움에 입학할 예정이라고 한다. 비탈진 정원이 넓게 펼쳐진 아버지와 함께 살던 주택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본인 가족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유복한 가정이라는 것이 저절로 눈에 띈다. 아이들도 교육을 잘 받고 손님을 대하는 것이 그렇게 공손할 수가 없었다. 정치나 사회보다도 단란한 가정과 올바른 사고를 지닌 독일인들이 국가의 힘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링겔씨는 마인츠대에서 독문학, 철학, 정치학을 공부하고 독일 낭만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다음, 다년간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한 경력을 지닌 전형적인 학자다. 학문 활동 이외에도 방송국의 문학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낭만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긴 했지만 저명한 망명 작가인 하인리히 만에 대한 무게 있는 연구서를 내놓기도 했다. 교수자격논문을 준비한 경력의 전문 학자 층에 속한다. 링겔 박사와 마인츠 출신의 망명객인 칼 추크마이어와 안나 제거스에 대해 장시간 토론했다.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도 거론됐다. 추크마이어는 망명 작가이긴 하지만 지식인으로 평가하기엔 문제점이 있고, 안나 제거스는 대표적인 망명 작가이긴 하지만 공산주의 문학은 한물 건너갔다는 것이 링겔 박사의 견해였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링겔 박사와의 대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날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 유입 난민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오늘날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는 독일 유입 난민에 대한 독일에서의 논의는 나치 독일과 그 당시에 발생한 독일인들의 망명에 대한 기억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이 기억은 직접적으로 독일 기본법 (헌법) 제1조 1항인 ‘인간의 존엄은 침해당할 수 없다. 그것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 권력의 의무다’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조항은 변경 불가능한 헌법의 기본 요소이자 기본법적으로 보증된 난민권리의 근본가치를 지닙니다. 이 가치는 단지 법적인 지위뿐만 아니라 도덕적 지위까지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나치 독일에 대한 기억과 당시에 벌어진 불의를 보며 오늘날 독일은 당시와는 다르게, 도덕적으로 더 잘 행하려고 합니다.”

그의 입장 표명은 다음과 같이 계속됐다. “독일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유럽의 많은 국가들은 물론 틀림없이 독일이 불손하다고 인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인 저들이 다른 나라보다 더 잘난척하려고 한하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보다 문제는, 정치적 해결 모색에 반대할 때 독일의 행동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독일 정신사에서 이미 칸트의 경우가 그랬듯이 정치와 도덕은 자주 대립됩니다. 어찌됐든 요사이 난민정책 반대파들에 의해 정치적 논의는 토론 자체가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난민정책 반대파들은 ‘민족 (Volk)’, ‘독일인 본성’ 등의 개념을 가지고, 그리고 실제로 악랄했던 나치독일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고 모든 인간의 원칙적인 품위를 난폭하게 경멸했던 사실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링겔씨의 이러한 견해는 한 학자의 학문적 설명이라기보다는 독일사회와 국가 독일의 과제 및 방향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교수신문> 연재에 관해서도 의견 주고 받아

2017년 2월 4일에는 보름스 사학자 크리스토프 륍(Christoph R?b)씨와 대담했다. 보름스는 마인츠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은 걸리지 않지만 약 40~50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차창을 내다보니 안개 낀 벌판에 안나 제거스의 『제7의 십자가』의 주인공 게오르크 하이슬러가 탈주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보름스를 방문하기 전 『제7의 십자가』배경이 된 오스트호펜 나치 강제 수용소에 들렀다. 작품에는 베스트호펜(Westhofen)이라고 돼있지만 사실은 동쪽 마을인 오스트호펜(Osthofen)이 실제 배경이다.

▲ 안나 제거스의 소설『제7의 십자가』배경이 된 오스트호펜 수용소에서 필자

오스트호펜 나치 수용소의 휑하니 텅 빈 공간에 서서 나치시대 이곳에 끌려와 노역을 하는 수감자들을 나는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괴롭히고 자유와 인간의 품위를 강탈당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의 아픔과 비명이 들렸다. 죽어가는 모습이 선명했다. 폭력과 압박의 무서움, 인간과 인간들이 저지르는 만행과 살육! 오만 독선과 불의! 오스트호펜 나치 강제 수용소, 바로 이곳에서 그들의 고향인 독일에서 도주해 망명을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의 불안한 정신을 손바닥을 내려다보듯 환히 파악할 수 있었다. 나치 독재의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을 사는 인간들은 무엇을 반성해야 하는가. 오스트호펜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5분정도 거리에 놓여있는 보름스 사학자 크리스토프 륍씨 댁으로 옮겨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에는 대담보다는 질문과 답변 형식을 취했다.

“나치 독재시절에 발생한 독일 망명 지식인에 대한 연재, 혹은 이에 대한 논의는 어떠한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까?” 나는 현재 한국의 <교수신문>에 기고하고 있는 ‘독일 망명 지식인’에 대한 연재 내용 및 목적을 설명한 다음 그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크리스토프 륍씨는 보름스에서 태어난 보름스 토박이로 역사적인 도시 보름스에 대해 자부심을 지닌 향토 사학자였다.

“박해로 인해 도주를 해야만 했던 독일 망명 지식인들의 발자취와 그들의 사고에 대한 작업은 우리나라 (독일) 기억문화의 결정적인 한 조각입니다. 여기에서 기억문화란 사회적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일반적인 논의와 자신의 역사에 대한, 특히 문제가 되고 업보로 인한 역사에 대한 안전장치를 말합니다. 총체적 망각과 과거를 배제시키는 행위에 대한 투쟁이 기억문화의 과제입니다. 이것은 사회 곳곳에서 학문적인 연구로, 공개적인 담론으로, 학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20세기 망명객들의 인생경험에 대한 작업은 본질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나치-레짐의 희생자인 망명객들은 잊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나는 다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망명객들을 어떻게 구분해 설명할 수 있겠냐고 방법론적인 사항을 물어봤다.

“망명객들 각자의 운명은 개개 망명객 모두를 세밀하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맥락 파악과 선별한 망명객들을 표본화시키기 위해 망명객들을 그룹화하고 카테고리화 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합니다. 마치 지식인들의 발자취와 직종이 그렇게 다양하듯 망명한 나라에서 성공적으로 시작한 사람들도 있고 경력이 중단된 채 계속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창작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수단과 표현형식인 모국어를 외국에서 쓸모 있게 사용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작가들은―폐쇄된 공간 속에 갇혀버린 작가들은―연구 성과를 올림으로써 망명한 나라에서 환대를 받고 기술발달을 가속화 시킨 자연과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해야만 했습니다.” 망명 지식인에 대한 연구의 복잡함과 다양한 시각을 요구하는 답변이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망명 지식인에 대한 작업은 오늘날의 세대들에게 어떤 유용함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나치 독재 시대 망명 지식인에 대한 작업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숙명에도 공감이 가는 논의로서 시대를 초월한 인간과 사회의 고유한 자산입니다. 오늘날 현실에서도 인간들을 망명으로 내모는 이주상황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수많은 나라에서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망명을 떠나야만 한다든가, 혹은 그러한 인간들을 멸시하며 ‘경제 난민들’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 등이 현 시대에서 논쟁적으로 토론해야하는 문제들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가능하다면 폭넓은 정보를 바탕으로 사적인 견해를 밝혀야 하는데, 이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가 나치 독재 시절 독일 망명 지식인들의 이주에 대한 논의입니다.”

2017년 현재, 이란 망명객이 들려준 망명 사유

맥락 때문에 크리스토프 륍씨와의 대담을 먼저 언급했지만 시간적으로는 이란 망명객을 먼저 만났다. 2017년 1월 29일 일요일, 마인츠에 거주하는 이란 망명객 헤스마트 타바콜리(Heshmat Tavakoli)씨 집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을 좌파 이란 망명객이라고 소개했다. 아침에 만나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고 해서 10시에 집 문을 노크했다. 아침 식사인데 샴페인을 한잔 하자며 병마개를 땄다. 우리로 하자면 막걸리를 한 잔 따라놓고 한 잔 걸치며 아침식사를 하는 풍경이었다. 부담스럽긴 했지만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곧 밝혀졌지만 파란만장하고 가슴 쓰라린 망명생활을 맨 정신에 털어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아침 식사를 오후 3시까지 하고 라인강변을 산책한 후 저녁까지 같이 식사하고 술을 마셨다. 나도 술이 웬만큼은 센데 그날은 소파에 떨어져 한 시간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서 다시 한 잔 했다.

타바콜리씨는 1984년부터 독일에 살고 있다고 했다. 비종교적인 사상을 지닌 반정부주의자로 끊임없이 체포와 처형당할 위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슬람혁명 직후 이란에서 도주해야만 했다고 한다. 새로 들어선 체제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 속에 처음에는 지하로 잠적했지만 결국 망명의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 길이 지금 30년이 넘었네요”라고 타바콜리씨가 귀뜸했다.

그는 낯선 방문객에게 술술 말을 이어갔다. “장기간 망명생활을 통해 나의 정치적 시각은 변했습니다. 글로벌한 분쟁으로 세상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확장, 세계평화와 인권을 위한 앙가주망이 내 정치적 작업을 위해서 가장 절박한 목표가 됐습니다.” 타바콜리씨는 독일에서 정치적 행동가에 속한다. ATTAC(국제금융관세연대) 회원으로 그리고 평화운동을 위해서, 세계화로 인해 생겨난 혹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하고 소수자들의 생활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한다. 참고로 1998년 프랑스에서 시작된 국제적인 반세계화와 반 신자유주의 운동단체인 ATTAC는 전 세계적으로 9만명 정도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고, 약 50개국에서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주축이 되고 있다. 이들이 행동 목표로 삼는 것은 금융축적으로 인해 그리고 금융이 지배함으로써 상실된 민주주의 공간을 회복하고 금융시장의 독재와 금융의 통제를 물리치는 것이다. 

타바콜리씨는 마인츠에서 정치교육을 위해, 그리고 대안적 사회구상에 대한 비판적 반성을 정착시키기 위한 단체를 결성했다. 하지만 다양한 참여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이란 망명객으로서의 삶은 언제나 쉽지가 않다고 한다. 독일에는 끊임없이 인종차별을 유발하는 상황이 존재하고, 가끔은 추측하지도 못할 상황이 지성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삐뚤어진 정치적 사고를 지닌 지식인들은 아마도 전 세계 어디에서나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타바콜리씨는 싱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망명 중의 삶은 현실상황에서 날카로워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 같았다.

대담 말미에 타바콜리씨에게 망명 중에 고향에 돌아간 당신 나라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는데, 당신도 고향에 돌아갈 수 있지 않았냐고 넌지시 몇 번을 물었다.

“그 사이 이란의 정치 체제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면, 나는 어제고 오늘이고 당장 이란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란은 지금도 아직 지식인들이나 다른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박해하고 살해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이 들어갈 자리는 없습니다.”

망명생활이 힘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를 후원해 주고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독일인으로 마인츠대 독문학 교수인 그의 부인이 아닌가 싶었다.

―독일의 천년고도 라인강변의 마인츠에서

서장원 독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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