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훈련의 古典이 던지는 메시지 … “끊임없는 종교적 수행 노력 필요”
영적 훈련의 古典이 던지는 메시지 … “끊임없는 종교적 수행 노력 필요”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2.14 0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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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_ 46강. 성해영 교수의 ‘『무지의 구름』과 관상 기도’

“신을 포함해 존재의 신비는 우리의 지성적 탐구로 완전하게 파악될 수 없기에 더 큰 의문, 달리 말해 무지의 인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알 수 없음을 알게 된다’라는 역설적 인식. 이 문제는 신비주의의 핵심이다.”
지난 11일(토) 진행된 ‘문화의 안과 밖’ 시즌3 ‘윤리와 인간의 삶’ 46강에서 성해염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한 말이다. 성 교수는 이날 윤리와 인간의 삶 7섹션 ‘윤리의 정신적 차원’ 세 번째 강연 주제로 ‘『무지의 구름』과 관상 기도’를 들고 나왔다.
성 교수는 14세기 익명의 사제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지의 구름』을 소개하며 “『무지의 구름』은 가톨릭 신비주의에서 중요한 저술 중 하나로 신과의 합일 체험과 관상 기도라는 신비주의적 수행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유형의 저술로 평가한다”라고 운을 떼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무지의 구름』은 ‘인간 영혼이 어떻게 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핵심적 문제를 관상 기도라는 수행법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라며 종교적 수행의 관점에서 ‘신과의 하나됨’이라는 신비적 합일 체험에 관한 논의를 풀어갔다.  
성해염 교수는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종교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사직 후 미국 라이스대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저서로는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문명 밖으로』, 『인문학 카페 인생 강의』, 『생각해 봤어?』, 『종교인의 연애』, 『지금, 한국의 종교』 등이 있다. 이날 강연의 주요 내용을 발췌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무지의 구름』은 ‘인간 영혼이 어떻게 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핵심적 문제를 관상 기도라는 수행법을 중심으로 다룬다. 신비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비 종교(mystery cult)’에서 그 기원이 찾아진다. ‘미스터리’라는 단어 자체는 ‘눈이나 입을 가리다’라는 그리스어 ‘무오(μυω)’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 개념은 플라톤과 그의 철학을 신비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했던 플로티누스(Plotinus)와 같은 사상가를 거쳐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의 신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신비주의는 체험이 주는 직관적인 앎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종교적 열광만을 강조하는 비합리적인 종교성으로 간주되거나, 보이지 않는 차원이 의식에 드러나는 다양한 심리적 경험에 주목하는 탓에 온갖 초자연적 경험을 총칭하는 것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심지어 의도적인 대중 매체 기피 현상을 지칭하는 비밀주의와 혼동되기도 했다. 비교종교학적 관점에서 신비주의는 “인간이 궁극적 실재와 합일되는 체험을 할 수 있으며, 의식을 변화시키는 수행을 통해 체험을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체험을 통해 얻어진 통찰에 기초해 궁극적 실재와 우주, 그리고 인간의 통합적 관계를 설명하는 사상으로 구성된 종교 전통”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신비 체험(experience), 신비 수행(practice), 신비 사상(thoughts)을 그 주된 구성 요소로 갖는다.

여러 가지 의식 변형 체험이 엄밀한 구분 없이 신비 체험으로 통칭되고 있지만,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됨으로써 존재의 원인을 알 수 있다는 ‘신비적 합일 체험(unio mystica)’이 신비주의의 결정적인 요소다. 『무지의 구름』은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테오리아(theoria)’라는, 이후에 ‘관상’ 또는 ‘관상 기도’라고 번역되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무지의 구름』이 제안하는 관상 기도는 신비주의 전통이 채택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아쇠 중 하나다. 이 단어는 의식 변형을 유도하는 기법이라는 의미와 함께 이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신비적 합일 의식 상태(Mystical State of Consciousness)를 동시에 뜻한다. 즉, 관상은 의식 변형의 기법인 ‘관상 기도’와 그 최종 목적인 ‘관상 상태’를 아우른다. 그리고 관상은 ‘명상/묵상(meditation)’이나 ‘기도(prayer)’와도 구분된다.

『무지의 구름』과 觀想(contemplation)

총 75장으로 구성된 『무지의 구름』은 기독교 전통에 속하지만, 멀리는 그리스의 테오리아 개념에까지 맞닿아 있다. 책을 통해 저자는 절대적 침묵을 근간으로 삼는 관상 기도를 통해 도달하는 신과의 합일이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관상 상태에 도달하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무엇보다 독서, 묵상, 기도가 충분히 이뤄진 다음에 관상 기도를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전통적인 방식의 단계 구분을 채택하면서, 관상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철저한 겸손의 마음을 키울 것, 무지의 구름 속에 머무를 것, 지성이 아닌 사랑으로 신을 만날 것이 그것이다. 겸손과 무지의 인식,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전적인 사랑이라는 세 가지 요소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한편 ‘무지의 구름’은 지성적 활동을 멈추고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철저한 수용의 태도를 의미한다. 신과의 무한한 거리를 인식하고, 이기적 욕망과 지성적 활동을 멈춘 침묵 속에서 겸손과 수용의 자세를 취할 때, 신을 직관하는 사건이 신의 은총으로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적 노력이나 분별심이 아닌, 신을 향한 절실한 사랑이 신의 사랑을 이끌어내고, 결국 신과 우리의 영혼을 하나로 결합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무지의 구름』은 그리스의 철학적(지성적) 신비주의와 달리 철저한 ‘사랑’의 신비주의다. 그러나 신적 은총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을 곧장 인간적인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견해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저자는 영혼이 여러 차원에서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줄기차게 강조한다. 그러므로 관상 기도 과정에서 영혼의 의도적인 노력과 신의 은총이 조화롭게 이뤄져야 한다.

관상 수행의 역설과 마음의 심층성

관상에 내재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지의 구름』이 설명하는 관상 기도의 과정을 위 디오니시우스를 포함해 초기 기독교부터 널리 활용돼 왔던 ‘정화-조명-일치(완덕)’의 3단계 구분에 입각해 정리해 보자.

‘정화(purification)’는 우리 의식의 초점을 내면으로 향하게 만들어 일체의 사고와 정념을 소거하는 행위를 뜻한다. 핵심은 일체의 사고와 정념을 버림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철저하게 수용적인 또는 수동적인 상태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철저한 정화의 노력을 통해 겸손을 익혀 우리의 영혼을 어둠 속에 머무르게 만들면, 신의 은총과 빛이 영혼에 비추어지는 ‘조명(illumination)’의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신성한 빛이 인도하는 조명 과정이 더욱 심화되면, 인간 영혼이 신과 합일하는 ‘일치(unification)’라는 ‘완성/완덕’의 사건이 발생한다. 일치는 곧 신적 관상의 상태다.

『무지의 구름』이 권고하는 관상은 ‘정화-조명-일치’라는 전통적인 방식 외에도 ‘집중-비움-드러남’이라는 수행 과정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도식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수행법으로서의 역설은 더욱 뚜렷하게 파악될 수 있다. 특정 단어의 반복적 음송, 話頭 참구, 시각적 이미지의 활용, 호흡을 세는 방법은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키는 행위이고, 동시에 분별적 사고에서부터 자아 개념에 이르는 의식의 모든 내용을 ‘비우는’ 요건이 된다. 그리고 의도적인 집중과 비움의 노력을 통해 자신을 철저하게 비워내 수용성을 극대화하면, 가려져 있던 마음의 층위가 자연스럽게 ‘드러나’ 이원적 분리가 하나로 통합되는 합일 체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관상 기도가 제기하는 물음들

『무지의 구름』은 신비주의적 수행법의 역설을 비롯해 신비주의의 비교 연구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여러 물음들을 제기한다.

첫째, 합일 체험의 존재와 인식론적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신비주의는 궁극적 실재가 마음을 통로로 삼아 체험을 통해 인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보편을 넘어선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실재가 개인의 체험으로 확인된다는 주장은 인식론적 측면에서 큰 어려움을 던진다. 신비적 합일 체험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경험이므로 직접적인 검증이 어렵기 때문이다. 검증이 곤란하다는 점 외에도 공유라는 측면에서도 난점이 있다.

둘째, 신비적 합일 체험이 종교 전통과 무관하게 동일한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말해 신비주의 전통이 강조하는 궁극의 차원은 시공을 초월할까? 신비가들이 사용하는 궁극, 절대, 초월과 같은 단어는 일견 신비적 합일 체험이 개인적 의식의 소산이거나, 교리와 같은 문화적 맥락이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道, 天, 神, 空 등은 사회문화적 맥락을 초월해 있으며, 그 내용은 지성적 추론이 아닌 수행을 통한 체험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상 세계 너머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 개념들은 동일한 그 무엇을 지칭할까, 아니면 대상의 다름이 구체적인 표현의 차이로 이어진 것일까? 궁극적 실재의 존재 가능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이 물음은 우리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한다.

셋째, 신비적 합일 체험의 사회·윤리적 함의에 대한 물음이다. 개인의 내면에 철저하게 집중하는 관상 기도는 주객의 분리를 초월하는 관상 상태를 최종적인 목표로 제시하는 탓에, 현상 세계의 특징인 이원성에 근거한 사회 윤리와 복잡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또 이 문제는 막스 베버의 구분을 따르자면 초월적인 관상 체험을 우위에 두는 타계 지향적 신비주의와 현세 지향적 신비주의의 구분으로 파악될 수 있다.

무한한 존재의 신비와 역설적 앎

『무지의 구름』은 철저한 무지의 상태에서 겸손과 사랑의 태도를 갖추면 신적 은총에 의해 신을 직관하는 사건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익명의 저자는 인간 영혼이 사랑과 겸손을 매개로 개체성을 초월함으로써 궁극적 실재인 신과 결합한다고 굳건하게 믿는다. 신과 인간 영혼의 경계가 허물어져 우리의 정체성이 보다 큰 무엇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저자는 신적 은총을 통해 관상의 상태를 경험했다 하더라도, 완성의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갈고 닦는 일이 신적 관상 이전에나 이후에도 여전히 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적 관상 상태의 생생한 경험은 예수가 그러했듯이 이웃과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구현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요컨대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신의 사랑이 어우러져 가능했던 신적 관상의 체험을 이웃 사랑으로 발전시키라는 것이다.

『무지의 구름』은 우리의 정체성과 신의 존재를 포함해 우리를 둘러싼 존재의 신비가 결코 우리에게 완전하게 인식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오랫동안 끈질기게 물어왔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물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신비다. 왜 우리 자신을 포함해 이 모든 존재들은 도대체 ‘없지 않고 있는’ 걸까? 그 이유를 우리는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만약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알게 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 앎은 과연 어떤 종류의 앎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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