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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이면서 실제이고, 있으면서 다시 사라지는 것은?
허구이면서 실제이고, 있으면서 다시 사라지는 것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7.02.13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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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아산서평모임 지상중계
지난달 25일(수) 저녁 6시 30분,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아산정책연구원 2층 작은 회의실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해가 바뀐 이날 12회차 서평모임의 주텍스트는 안치운 호서대 교수(연극학)의 책 『연극, 기억의 현상학』(책세상, 2016)이었다.

책은 연극평론가로서 30년 넘는 세월을 극장 어두운 객석에 앉아, 시대의 모습이 반영된 연극의 의의와 미학적 가치를 소개해온 저자의 연극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베르나르-마리 콜테스의 현대 유럽 연극까지, 피나 바우쉬에서부터 기국서에 이르기까지 동서와 고금을 오가며 연극의 큰 줄기를 훑은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연극을 지탱하고 있는 이론적 배경과 개별 작품 분석까지 진행했다.?특히 우리 연극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오태석, 최인훈, 윤영선, 기국서의 작품을 시대의 고민과 함께 미학적 관점에서 분석해냈는데, 저자의 빼어난 미적 감수성이 만져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날 약정 토론에는 조만수 충북대 교수(불문학), 이진아 숙명영대 교수(한국어문학부)가 참여했다. 단순히 연극평론을 놓고 대화가 오간 게 아니라, ‘연극학’의 의미 지평을 놓고 긴 소통의 언어가 공유됐다는 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사진·자료제공=아산정책연구원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안치운 호서대 교수
연극에 관한 글쓰기는 오늘날 연극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마이너 예술의 의미를 사유하는 데 있다. 예술(교육)은 분석, 실습, 테크닉과도 관련이 없다. 예술(교육)은 일종의 자기최면 상태를 보여주고, 가르친다. 노래가 육체로 전달되어 육체 내부에서 새겨지는 것처럼. 돌아올 수 없는 여행과도 같은 연극(예술)은, 실천도, 글쓰기도 교육도 즐거움, 쾌락이어야 한다. 하나뿐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나간 것(기억)의 쾌락, 포도주처럼 과거와 관계맺는 형식으로서 쾌락, 그렇게 해서 상실과 기억이 행복한 글쓰기의 원천이 돼야 한다. 이 책은 오래된 예술(작품)에서는 과거가 새어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썼다.


연극(연구, 글쓰기)는 인문학적 앎 즉 철학, 수사학(문학)과 어떻게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있는가? 교양이란 묻고 탐색하는 행위, 그 배움에서 장소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살롱, 광장(작게는 극장)이 그것이다. 이것은 여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것이 폐쇄되고, 불가능하게 되면 정신의 귀양과 같은 서재 공간이 생긴다. 교양으로서 연극은 서재가 아니라 그 바깥에 있고, 연극은 바깥에서 떠도는 이들을 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연극, 기억의 현상학』(2016)을 썼을까? 생각한다는 뜻을 지닌 팡세(penser)는 모으다라는 라틴어 ‘pensare’에서 왔다. 플라톤은 우리들의 앎은 어렴풋한 추억, 회상이라고 했다(여기에 말(onomata)/목소리(phonè)/자연(physis)/진리(aletheia)가 있다). 앎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고, 기억하는 것이다. 예술은 자신을 스스로 과거화 시키면서 현상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자신의 일상적인 양태와 대응하던 습관적 인식능력을 뛰어넘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사물이 자신의 본성을 탁월하게 향유하고 있는 모습이다.


기억의 표현이야말로 연극의 매혹이다. 그것은 연극의 팬(fan)이 되는 것, 연극이라는 사원(fanum)에 들어가는 것이고, 연극을 보고 벼락 맞은 나무(fanaticus)처럼 되는 것이다. 연극에는 벼락 맞은 것 같은 유령, 죽은 자, 미친 자들이 그래서 산 자보다 더 매혹적일 때가 많다. 이런 의미에서 기억학은  유령학(hantologie)이다.  데리다의  정의처럼,  귀신은  다시  돌아오는  것(re-venant), 이른바 자신의 회귀, 사라진 것이 다시 저기 있음, 부재의 현존.  존재함(to be)과 존재하지 않음(not to be) 사이의 대립이 없는 것이다.

연극의 처음, 연극의 끝은 글이었다. 연극은 글로 시작하고, 글로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연극의 책이란 연극이 제 스스로 출생신고서이며 입적기록이며, 사후 증명기록이다. 연극은 책을 통해 연극의 외연을 확대할 수 있었다. 연극과 사회라는 주제는 연극 내적으로는 연극의 발생, 완성, 영향에 관한 것이고, 연극 외적으로는 연극의 학제적 기록이다.
 
조만수 충북대 교수
안치운은 지도를 그리는 자가 아니다. 60세에 이르러 백발이 가득한 안치운은 가닿지 못하는 기원을 향해서, 광야를 맴돌며, 자신을 향한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다. 광야에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어딘지 모른 채, 헤매는 늙은 한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면, 그는 이렇게 오이디푸스의 한 구절을 중얼거리고 있다. “그토록 오래 묵은 죄의 희미한 자취를 이 넓은 천지 어디에서 찾으란 말인가?” 안치운은 수수께끼를 푼 현자가 아니라, 광야를 떠도는 자, 고통스러운 몸으로서의 오이디푸스가 되기를 원한다.
 
그가 세운 이정표는 일종의 무덤이다. 핏자국이 사라진, 주검이 흔적으로만 남아있는 무덤이다. 그의 표현을 따른다면, 그것은 고인돌이다. 무덤 혹은 고인돌은 ‘죽음’을 ‘기억’하는 자리이다. 책의 목차를 잠시 본다면 ‘기억의 현상학’이란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오류에서 진실로, 죽음에서 삶으로」, 「죽음과 애도의 글쓰기」, 「한국 현대 연극과 죽음의 언어」.

기억한다는 것, 그것은 망각과 사라짐에 대항하여 싸운다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다는 것, 그것은 그러므로 모순적인 조합의 단어들이다. 죽음 자체가 사라짐이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이 라 명하는 것은 ‘죽은 것’과는 다른 것이다. 죽은 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 물질성을 지닌 것이다. 죽음은 물질성이 아니다. 안치운이 여러 편의 책을 쓰면서도, 작품 리뷰가 극히 제한적인 것은 그는 하나의 작품의 생성과 소멸을 기록하고, 해설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은 것에 관한 기록이다. 죽음은 하나의 개념이다. 죽음은 부재다. 그런데 부재를 통해서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항으로서의 삶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재-존재의 한 쌍의 개념이다. 부재함은 마치 부활한 존재가 남긴 무덤과 같은 것이다. ‘그는 여기에 없다’는 것, 그것은 그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죽음’은 안치운에게는 연극과 등가의 것이다. 연극은 허구이면서 실제이고, 있으면서 다시 사라지는 것이다. 죽음과 등가의 것으로 연극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죽지 않기 위한 것, 불멸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위한 기록을 안치운은 비명이라고 부른다. 비명은 죽은 자에 대한 글이며, 죽은 글이다. 안치운이 원하는 것은 차라리 죽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기억의 ‘현상학’이라 제목을 붙이는 것은 죽음-연극이라는 것의 본질에 다다르는 인식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행위를 공간화한다면, 그것은 ‘귀향’이다. 죽음의 공간은 공간은 안치운의 어휘 속에서는 무덤, 광야, 오지, 기원이다. 무덤을 위의 인용문에서 안치운은 사각지대라고 부른다. 그 사각지대는 무덤의 구멍이며, 관이며, 사각의 블랙박스인 극장이다. 동시에 그곳은 사원이다. 그가 찾는 것은 결국 제의로서의 연극, 사원으로서의 극장이다.

부재-현존의 공간을 향해 가는 운동성, 그것이 ‘귀향’이다. 부재-현존의 지점이 기원이며 오지이다. 안치운이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작품 속에서도 특히 『사막으로의 귀환(Le Retour audésert)』을 좋아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기원은 현실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광야 혹은 사막의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귀향하는 곳, 그곳은 사막, 광야이다.위치가 없는 이 곳, 이제는 사라진 연극, 죽음으로서만 자신을 증명하는 연극으로 되돌아가는 행위가 안치운의 글쓰기이다. 다시 오이디푸스를 만난다. 눈 멀어 앞은 보이지 않고 그는 지팡이에 의지 하고 길을 걷는다. 곪은 발로,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고통스럽다. 그의 가방에서 책을 한 권씩 꺼낼 때마다 우리는 안치운의 아픔과 만나는 것이다.

“내 안에 있으면서도 바깥 외딴 곳처럼 여겨지는 사각지대는 기억을 저장하는 장소이며, 기억을 보는 장소이다. 보는 것, 보는 장소-여기서 보는 것은 생각하는 것. 그리스어로 노에시스인데, 이 단어는 되돌아간다는 뜻의 그리스어 노스토스와 어원이 같다. 노에시스, 즉 생각하다, 인식하다, 그것은 아쉬워하다. 기억하다라는 뜻이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눈 앞에 없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없는 것을 환각으로 볼 때 고통(algos)과 굶주림이 생긴다. 향수(nostalgie)란 되돌아가는(nostos) 아픔(algos)이다.” (「연극치료에서 기억의 문제-기억공간과 극장공간」, 502쪽)
 
이진아 숙명여대 교수
『연극, 기억의 현상학』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 중 하나는 문자언어를 넘어서는 연극의 언어이다. 연극의 기억이 단순한 기록이나 저장소가 아닌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안무가 피나 바우시가 참여한 영화 「황후의 탄식」이나 해프닝, 퍼포먼스, 오브제 작업의 어디쯤에 위치하는 타테우즈 칸토르의 「죽음의 교실」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내러티브가 해체되고 시공이 종횡하는 오태석의 희곡이나 말더듬이 언어 뿐 아니라 움직임 더듬이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최인훈의 희곡을 분석하는 장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 특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현대연극학이 가장 소홀하게 다뤘으며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하게 놓아두었던 관객론이다.

안치운은 연극은 관객(보는 자)과 배우(행동하는 자)가 같은 시공간 안에 존재하며 몸으로 결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연극은 관객의 현실이다. 관객에 대한 사유는 연극이라는 현실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 연극은 관객이 드러나는[現] 존재이고, 관객은 연극을 넘어서는 실질적인[實] 존재이다. 그런 뜻에서 연극 바깥의 관객도 없고, 관객 바깥의 연극도 없다. 연극이 극장에서 관객들과 만나는 예술인 한에서는 그렇다”(424쪽)라고 말한다. 이어 “관객의 존재는 연극을 삶과 연결하되, 삶과 연극을 구별하는 요인이 된다. 연극을 삶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연극이 삶과 일치하지 않되, 삶을 분열시키고 재현함으로써 삶을 반성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연극의 보편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동시에 연극의 개별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이중적 존재다. 관극행위란 공연을 통해 관객에게 내재화한 개별성과 보편성의 구체적인 경험이다”(428쪽)라고 설명한다.

연극은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극의 기억은 다시 관객의 손으로 넘어간다. 연극은 곧 사라지는 것, 부재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결정에서 결정으로” “비현실화한 텍스트에서 현실화한 텍스트로” 바꾸어 놓는 것은 관객이다. 안치운 선생은 관객을 주목한다. 그간의 연극학이 관객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을, 관객에 대해 잘못된 접근을 했던 것을 비판한다.

극장(연극)은 ‘보다’라는 어원을 가지고 있다. 안치운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을 분석하는 글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다.”(피타고라스 학파) “그리스어로 본다(theatai)는 말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다.”라는 인용을 하기도 한다. 주지하듯 「오이디푸스 왕」은 앎에 대한 작품이다. ‘안다’와 ‘보다’는 실제로 많은 나라의 언어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다. 「오이디푸스 왕」은 ‘안다’와 ‘보다’의 역설적 의미를 다룬다. 장님인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앎, 앎, 앎’을 외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안치운의 글은 이에서 더 나아가 오이디푸스의 ‘눈’을 중심으로 독해를 시도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코러스에 대한 짧은 언급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스 비극에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서정시처럼 독백과 회상이 아니라, 서사시처럼 보고와 진술을 통한 이야기 형식이 아니라, 대화와 코러스의 합창이다”(101쪽). 비극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을 가르치는 형식이라는 설명 중에 하는 말이다. 그리스 극장이 시민의 만남과 토론의 장이며 아고라임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를 위해 극에 대한 객관화되고 통일된 의견을 정리하고 전달하는 코러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대표 시민이자 의견을 리드하는 자다. 동시에 무대 위에서 사건을 ‘보는 자’이기도 하다. 코러스는 ‘보고 관찰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하는 자인 것인가.

‘극장은 아고라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강한 울림을 갖는 시대다. 처음에는 은유였을 터인데, 이제 물리적 광장이 은유적 광장이 되는 것을 보고 있다. 광장과 코러스의 은유가 다시 연극의 미래이자 대안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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